‘시대를 앞서간 개척자’, ‘종교 간의 대화를 주창한 목자’ |
글 _ 최병일 기자 사진 _ 양우영 기자, 서울신문 DB |
“한국 근현대사를 다룬 역사책 같은 사람”
빈 들에 서서 외쳤던 시대의 양심이 하느님 곁으로 갔다. 지난 17일 영면한 강원용 목사는 대화의 힘을 믿었던 중재자였다. 종교 간의 대화는 물론, 좌와 우의 대화 그리고 우리 사회 모든 현안들이 진정한 마음을 가지고 대화한다면 풀리지 않을 것이 없다고 생각한 큰 인물이었다. 강원용 목사의 호는 여해(如海)였다. ‘바다 같음’이라는 그의 호는 다른 어떤 단어보다 강 목사를 잘 설명해주는 말이다.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그 너른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종교계는 물론 문화예술계와 정치인들까지 한마음으로 그를 추도하는지도 모른다.
고인과 가깝게 지냈던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은 “아프리카에서는 노인 한 명이 세상을 떠나면 박물관 하나가 사라진다는 말이 있는데 고인의 죽음은 마치 교회사, 정치사, 지성사를 통틀어 한국 근대사를 다룬 역사책 한 권이 사라진 거나 마찬가지”라고 애도할 정도로 그는 단순한 목회자가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 많은 영향을 미친 인물이었다.
강원용 목사는 함경남도 이원이라는 시골에서 가난한 화전민의 종손으로 태어났다. 당시는 일제 강점기였다. 18세가 되던 1935년 ‘농민이 잘사는 나라를 만들겠다’ 는 신념으로 만주 용정으로 건너갔다.
용정에서의 삶은 강원용 목사의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좌표가 된 시기였다. 은진중학교에서 고 문익환 목사와 윤동주 시인 등과 학창 시절을 보냈다. 후일 문익환 목사는 강 목사와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고, 군사 정권 시절 민주화 운동의 동지로 불의에 대항하기도 했다. 또한 농촌 계몽 운동에도 활발하게 활동했다.
그는 당시 은진중학교 교사였던 장공 김재준 목사에 의해 개신교 신앙에 눈을 뜨게 되었다. 광복이 되면서 그는 본격적으로 사회에 뛰어들었다. 평생의 신념처럼 당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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