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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 이시종 기자
  • 승인 2014.03.07 17: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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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환의 미국 거꾸로 보기

‘과식’에 길들여진 인간들은 남보다 더 얻으려 하고 더 높아지려고 애쓴다. 부와 권력, 명예, 그리고 장수조차 과식하려고 대든다. 그런데 욕망은 과식으로 채워지지 않는다. 물을 계속 부으면 물 잔이 넘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역설적으로 욕망의 수를 줄이고 무게를 덜어내고 저장 공간을 비울수록 충족감은 더 커진다. 예수나 석가, 공자와 맹자가 ‘과식’과 ‘탐욕’을 경계하고 마음을 비우라고 가르친 것도 이 때문이다.

글ㆍ사진 박영환(KBS앵커 LA특파원)

#1 과식의 일상화… ‘공복’과 ‘기아’를 잊은 인간들 
“현대인의 생활을 고려해 볼 때 육체노동자가 아니라면 세 끼를 모두 챙겨 먹는 것 자체가 ‘과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인류가 살아온 300만 년 중 299만 9950년이 공복과 기아의 역사였는데 현대 들어서     ‘아침이 되었으니까’, ‘점심때가 됐으니’, ‘저녁 먹을 시간이 되어서’라면서 습관적으로 위장 안을 음식물로 꽉꽉 채우고 있으니 말이다.
-이시하라 유미가 쓴 <몸이 원하는 장수요법> 중에서

‘고도원의 아침편지’가 배달해 온 짧은 글이 점심식사 내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마치 모래알을 씹듯 음식은 거칠었고 입안은 스멀스멀했다. 과식은 미국에 온 뒤 내가 가장 심각하게 고민하는 일상의 문제다. 운동 시간을 늘렸지만 몸무게가 5Kg이나 늘었다. 두꺼워진 뱃살 탓이다. ‘나이 살’이 아닐까 위안하지만 진짜 원인은 과식이다. LA 한인 식당에서 음식 1인분은 몸집이 큰 서양인 기준이다. 처음에는 배가 불러서 다 먹을 수 없어서 음식을 남겼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던가. 채 한 달도 지나지 않아 나온 음식을 다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 지인들과의 잦은 저녁식사도 뱃살을 키운 원흉일 것이다. 점심이 소화되지도 않았는데 저녁을 먹어야 하는 경우도 있다. 저녁은 아침이나 점심보다 양이 과하다. 식사를 마치면 술자리로 이어진다. 푸짐한 한국식 안주는 통과의례다. 과식이 일상화되면서 위는 쉴 틈이 없다. 몸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에너지로 소비되지 않고 쌓인 칼로리가 지방으로 축척돼 몸이 무거워진 거다. 과식은 신체기관의 선순환을 가로막아 질병의 원인이 된다. 그런데 과식이 어디 음식뿐이겠는가?

#2 인간세상 곳곳에 널려 있는 과식 증후군
겨울이 따뜻한 캘리포니아에서 오렌지가 얼어붙는 초유의 일이 벌어졌다. 20년 만에 찾아 온 맹추위 때문이다. 한반도의 겨울은 더 혹독했다. 서울의 어느 친구는 영화 <tomorrow>가 찾아왔다고 했다. 그 즈음 전남 고흥군에서 전기요금을 못내 전기가 끊기는 바람에 촛불을 켜놓고 잠을 자던 할머니와 손자가 화재로 숨지는 안타까운 일이 벌어졌다. 처음에는 전기를 무턱대고 끊어버린 무정함에 화가 났다. 미국의 전력회사들은 난방비를 내기 어려운 가정에 대해선 요금 감면 프로그램을 제시한다. 일방적 조치 대신 합리적인 대안을 모색한다. 인간의 존귀함을 최우선시 하기 때문이다. 가슴 한쪽에서 나도 공범이나 가해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엄습했다. 할머니와 아이가 냉방에서 긴 밤을 지샐 때 우리 가족들은 난방기를 틀어놓고 속옷만 입고 지냈다. 대다수 가정이 그랬을 것이다. 한편에선 전기공급을 차단당하는 고통이 있었지만 다른 쪽에서는 이른 바 ‘전기의 과식’, ‘난방의 과식’이 겨울 내내 지속된 것이다. 동굴 안에서 불을 피워놓고 차디 찬 등을 맞대고 부비면서 엄동설한을 이겨냈던 원시인들의 아름다운 공동체 의식은 화석이 돼버렸다. 인간들은 점점 타인의 고통과 아픔에 둔감해져 갔고 과식에 따른 소화기 질병이 생겨났다. 놀랍게도 야생동물은 소화불량이 없다. 먹이도 단 한 가지다. 초식 아니면 육식이지만 인간은 잡식이다. 인간에게는 산해진미를 아우르는 이른 바 풀코스(Full course)도 있다. 사자는 배부르면 사냥감을 내팽개치지만 인간들은 영양을 축적하기 위해 밤새워 배불리 먹었다. 오늘날 인간의 과식은 그 유전적 습성의 흔적이다. 동물의 끼니는 생존을 위한 최소한이지만 인간은 과식을 욕망한다. 과식은 생존과 출세의 무기이기도 하다. 인간관계를 확장하고 유지하기 위해 하루 6차례 이상 식사를 하는 사람도 있다. 그는 식사가 지겹다고 했다. 비싼 음식이지만 코와 혀끝에서 맛을 느끼지도 못할 뿐더러 역겹다고 했다. 그에게 음식은 차라리 독이었다. 겨울잠을 자는 곰이나 다람쥐, 갯벌의 짱뚱어도 과식을 한다. 하지만 동면을 위한 최소한의 에너지 비축이라는 점에서 인간의 과식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짱뚱어는 진흙 속에서 무려 6달을 잔다. 잠을 워낙 많이 잔다고 해서 ‘잠둥어’로 불렸다가 ‘짱뚱어’가 됐다고 한다. 365일 중 절반을 굶는 셈이니 분명 과식은 아니다.

#3 과식에 짓눌린 삶으로는 눈앞의 꽃조차 볼 수 없다
조선시대 왕들의 평균 수명은 47세였다. 최고의 식단과 어의의 돌봄에도 왜 수명이 짧았을까? 영화 <광해>에서도 나오지만 야식까지 챙겨 드는 과식도 원인이 됐을 듯하다. 화려한 왕의 밥상이 행복의 보증수표가 아니라는 사실은 진리다. 성군으로 이름난 세종도 40살이 채 안 돼 당뇨에 시달렸다. 삶의 모든 면이 과식이었던 최고의 권력자에게 따랐던 독살과 신변 위협도 왕들의 단명을 재촉했을 것이다. 화엄경에 나오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와 신라 고승 원효의 얘기도 화두는 마음이다. 원효는 당나라 유학길에 올라 어느 무덤 앞에서 잠을 잤다. 잠결에 목이 말라 물을 마셨는데, 날이 새어서 깨어 보니 잠결에 마신 물이 해골에 괸 물이었음을 알고, 사물 자체에는 정(淨)도 부정(不淨)도 없고 모든 것은 오로지 마음에 달렸음을 깨달아 대오(大悟)했다는 이야기다. 원효는 그 길로 유학을 포기하고 돌아왔다. 고은 시인은 ‘꽃’을 통해 속도를 앞세운 과식의 삶에 경고음을 울린다.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못 본 그 꽃.” 올라갈 때 세상은 욕망의 세상이다. 조금만 더 욕망하면 남들이 부러워하는 모든 걸 움켜쥘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주변에 눈길을 줄 여유가 없다. 주변에 향기 짙은 꽃이 피어도 느끼지 못한다. 정상의 자리는 고독 그 자체다. 오래 머무를 수도 없다. 늘 불안하다. 경쟁자들이 밧줄에 매달려서 계단을 밟고 낙하산에 매달려 끝없이 올라오고 내려온다. 감나무 꼭대기에서 겨울을 버텨낸 까치밥이 무게를 이기지 못해 끝내 땅바닥에 떨어지듯 추락은 인간에게 숙명이다. 중력의 법칙처럼 피할 길이 없다. 추락은 욕망의 근본적 해체를 낳는다. 마음이 깃털처럼 가벼워지면서 우주를 품을 만큼 커진다. 비로소 올라갈 때 보지 못했던 꽃이 내려갈 때는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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