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0 21:55 (토)
 실시간뉴스
나경원 평창동계스페셜올림픽 조직위원장
나경원 평창동계스페셜올림픽 조직위원장
  • 이시종 기자
  • 승인 2014.03.10 00:3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0%~71%’의 특별한 기적, 아직 끝이 아니다
 

지난 2월 폐막한 평창동계스페셜올림픽. 이 대회는 세계의 지적 장애인들이 펼치는 올림픽이다. 대회가 시작되기 직전인 1월만 해도 이 대회가 평창에서 열린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렇게 0%에서 시작한 일이었다. 하지만 대회가 시작된 후 이 대회를 알게 된 국민은 71%가 됐다. 한마디로 기적이었다. 이 기적의 중심에는 나경원 조직위원장이 있었다. 71%의 기적을 이어나가기 위해 그이는 다시 뛰기 시작했다.

취재 이시종 기자 | 사진 양우영 기자 | 참고서적 무릎을 굽히면 사랑이 보인다(샘터)

나경원 평창동계스페셜올림픽 조직위원장은 여전히 활기찬 모습이었다. 정치 활동은 뜸한 요즘이지만 장애인 관련 강연과 학교 강의 등으로 요즘도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지난 2월 폐막한 평창동계스페셜올림픽의 조직위원장으로 일하면서 나 위원장은 인생에서 가장 큰 감동을 느꼈다고 했다. 사람들은 이번 평창동계올림픽을 ‘71%의 기적’이라고 불렀다. 애당초 0%에서 시작한 일이었다. 스페셜올림픽은 1968년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누이동생 유니스 슈라이버가 창시한 지적 장애인들의 스포츠 축제다. 하지만 이번 대회가 치러지기 전까지 이 대회를 아는 사람은 정확히 0%였다. 다시 말해 아무도 몰랐던 대회라는 거다. 어찌 보면 이 대회를 치러냈다는 사실 자체가 하나의 기적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대회가 열리면서 국민의 10명 가운데 7명이 스페셜올림픽을 알게 됐고, 58%는 어떤 식으로든 참가하고 싶다, 돕고 싶다고 답했다. 나경원 위원장은 이번 대회를 치르면서 “우리 사회의 가능성을 봤다”고 했다. 나 위원장이 최근 <무릎을 굽히면 사랑이 보인다>라는 책을 낸 것은 그 가능성을 잇기 위해서다.

‘우리’가 되는 가능성을 보다
“이 책은 정치인 나경원이 아니라 스페셜올림픽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사람으로서, 또 장애를 가진 아이를 기르는 엄마로서 쓴 책이에요. 장애인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이끌어내고자 쓰게 됐어요.”
이번 스페셜 올림픽을 통해 지적 장애인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편견의 벽도 많이 허물어졌지만, 나 위원장은 “여전히 갈 길이 멀다”고 했다. 책에는 이번 대회에 대한 감동적인 기록과 다운증후군 아이를 키우는 엄마로서 겪었던 애환과 희망들을 담았다. 이번 책으로 장애인들에 대한 식어가는 관심을 다시 잇고 싶은 바람이다. 나 위원장은 이번 책의 인세는 전액 (사)한국스페셜올림픽위원회에 기부할 예정이다. 나 위원장이 가장 궁극적으로 이루고자 하는 기적이란 바로 장애인에 대한 일반인들의 인식 변화다. 책에는 그이의 마음이 그대로 녹아있는 글귀가 여러 있다.
“대회 유치 결정 직후, 킴 슈라이버 국제스페셜올림픽 회장이 물었어요. ‘스페셜올림픽 이후 한국 사회가 어떻게 바뀌었으면 좋겠느냐’고요. 그때 불현듯 생각난 말이 ‘Look Once, Think Twice’였어요. 장애인이 지나가면 대개 두 번 쳐다보잖아요. 어떤 사람들은 불편한 기색으로, 또 어떤 사람들은 동정 어린 시선으로요. 이건 장애인이 익숙지 않은 존재인데다 우리 사회의 동등한 구성원이라는 생각이 여전히 부족한 탓이에요. 그 두 번의 시선을 한 번으로 줄이고 싶었어요. 대신 생각은 두 번 늘리고 싶었죠. ‘시선은 한번만, 생각은 한 번 더!’ 장애인이 차별받는 환경을 개선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두 번 생각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었어요.”
대회 기간 경기장 곳곳에서 가슴 찡한 순간들을 마주했다. 나 위원장은 “마음속으로 울고 다녔다”고 표현했다.
“순간순간 작은 기적의 연속이었죠. 방 안에만 갇혀 지내던 아이들이 환한 세상으로 나와 마음껏 달리고 있었어요. 숨이 턱까지 차올라도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지 않더라고요. 이번 대회는 제 평생 가장 감동의 대회였습니다. 피겨스케이팅 시상식에서 만난 베네수엘라 선수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해요. 금메달을 목에 걸고는 가족과 코칭스태프를 얼싸안고 환호하는데,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보다도 더 기뻐하는 모습을 보며 많은 생각이 들었어요. 그 선수에게는 스페셜올림픽이 우리가 환호하는 올림픽 이상의 가치인데, ‘우리가 저 감정을 제대로 이해하고 준비한 걸까’라는 반성이 들 정도였어요.”
대회가 끝난 지 거의 1년이 지났지만 나 위원장은 여전히 그날의 감동에 젖어 있는 듯했다. 대회 기간 동안 그는 하루 24시간을 분, 초 단위로 쪼개 가면서 발에 땀이 나도록 뛰어다녔다. 살인적인 스케줄을 초인적인 힘으로 소화해냈다. 대회 기간 내내 새벽 2시 이전에 잠든 적이 없다. 아침 6시면 어김없이 눈을 떴다. 아침부터 밤까지 경기장, 회의장, 공연장을 쉴 새 없이 돌아다녔다. 발이 아파 걷지 못할 정도로 걷고 또 걸었다.
저녁에는 2~3개의 리셉션에 참여했다. 주요 인사들과 만찬 일정도 줄을 이었다. 매일 밤 10시 30분 참모들과 모여 자정이 다 되도록 회의를 했다. ‘71%의 기적’은 하루 20시간, 발이 부르트도록 뛴 진심의 결과물이다. 당초 목표 관중 18만 명에 근접한 17만7천 명의 관중이 스페셜올림픽을 찾았다. 1만원짜리 티켓, 스페셜패스는 9만1천여 장이 팔렸다. 스페셜올림픽조직위원회(SOI)로부터 찬사를 받았다.
“제가 소망한 것을 100% 이루지는 못했지만, 정말 최선을 다한 대회였어요. 절반 이상은 성공했다고 봐요. 뿌듯하지만, 이것이 시작이라고 생각해요. 뜨겁게 달궈진 온도를 어떻게 유지하느냐, 어떻게 변화로 만들어 낼 것인가 하는 숙제가 남았죠.”

유나야 고마워

알려진 대로 나 위원장은 장애가 있는 딸 유나와 비장애인 아들 현조를 키우고 있다. 누구보다 장애인들의 복지 정책에 많은 관심을 기울여 온 것도 이런 배경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나 위원장은 사단법인 사랑나눔 위캔 이사장, 한국장애인부모후원회 공동대표 등 장애인 문제 관련 활동을 지속해 왔다.
“만약 유나가 없었다면 장애인이라는 존재에 관심을 가질 수 있었을까 생각했어요. 유나가 아니었다면 수많은 고비를 넘어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을 거예요. 성공적으로 대회를 마쳤을 때 가장 고마웠던 사람이 바로 유나예요.”
스페셜올림픽과 인연이 닿은 것도 유나 덕분이었다. 나 위원장은 2004년 국회의원 배지를 갓 달았을 때, 신문 한 구석에서 스페셜올림픽 국내 대회 기사를 보았다. 초대받지도 않았는데 그곳을 찾아갔다. 지적 장애인의 올림픽이 무엇인지 궁금해서였다.
“당시에는 지금과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작은 규모로 치러지는 대회였어요. 그때 관계자가 스페셜올림픽 국제본부에서 주관하는 청소년 리더십 프로그램인 ‘리저널 메신저(Resional Messenger)’ 교육에 유나를 보내지 않겠느냐고 제안하더라고요. 비장애인 친구와 부모가 아닌 보호자가 동행해야 한다는 조건이었어요. 유나는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매해 그 프로그램에 참가했어요. 그렇게 유나가 저보다 먼저 스페셜올림픽 본부와 인연을 맺었고 2007년 상하이 하계대회, 2009년 아이다호 동계대회, 2011년 아테네 하계대회 청소년회담에 모두 한국 대표로 참가했어요. 제가 처음 갔던 아이다호 스페셜올림픽도 유나가 간다기에 자비로 따라간 거죠.”
나 위원장은 거기서 한국 선수단을 만났다. 다들 추레한 까만 점퍼 차림이었다. 태극마크조차 만들어 달지 못해서 오른쪽 가슴팍에는 급조한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나 위원장은 “스티커가 어찌나 잘 떨어지는지, 보는 사람이 민망할 지경이었다”고 회상했다.
“관계자의 설명을 들으니 스페셜올림픽 참가 예산이 출발 이틀 전에야 나오는 바람에 선수단 유니폼을 만들 시간이 없었대요. 그 전부터 스페셜올림픽 국제대회를 한국에서 유치하자는 이야기는 있었어요. 위원회 관계자들의 부탁으로 정·관계 인사들과 만날 수 있는 자리를 주선하기도 했죠. 하지만 진척이 없었어요. 그때 저라도 나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나 위원장은 대통령부터 만나 스페셜올림픽 유치의 필요성에 대해 설득하기 시작했다. 그다음 차례로 국무총리, 국회 관계자들과 만났다. 어렵게 진척시켜 나갔지만 문제는 예산이었다. 국가에서 지원해 줄 수 있는 것은 예산의 30%뿐이었다. 나머지 예산은 대회가 열리는 지역의 지자체와 조직위원회가 마련해야 했다.
“아무리 봐도 스페셜올림픽 동계대회를 유치할 수 있는 곳은 평창뿐이었어요. 하지만 강원도는 돈이 없어 예산의 10%밖에 지원해 줄 수 없다고 하더라고요. 나머지 60%를 위원회에서 조달하기로 하고, 유치전에 뛰어들었어요.”
2010년 2월에 평창이 개최지로 확정됐고, 11월 조직위원회를 만들었다. 나 위원장은 관록 있고 경험이 많은 분을 조직위원장으로 모셔야 대회가 번듯하게 치러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명망이 있는 사회 인사들을 여럿 만나 간곡히 부탁했다. 하지만 이름도 생소한 대회의 조직위원장을 맡겠다고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제가 조직위원장 자리를 맡았어요. 참 겁도 없었죠. 만약 유나가 없었다면 시작도 못했을 일이에요. 그리고 유나가 아니었다면 수많은 고비를 넘어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유나가 어떤 마음으로 스페셜올림픽을 지켜보고 어떤 생각을 했는지 전 잘 알지 못해요. 하지만 분명 저와 같은 마음일 거라는 확신은 있어요. 앞으로 제가 어떤 길을 가더라도 유나는 엄마의 편이 되어줄 것입니다. 세상 누구보다 우리는 단단한 마음의 끈으로 이어져 있기 때문이에요.”
나 위원장은 “엄마 노릇은 잘 못하는 것이 사실”이라며 “아무리 바빠도 아이 일은 제 일하고 똑같이 중요한 일이니까 신경을 많이 쓰려고 하는데, 우선순위에서 밀릴 때가 많으니 항상 미안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번 책에는 나 위원장이 딸 유나에게 보내는 편지도 담겨 있다. 편지에는 딸을 향한 나 위원장의 미안함과 애틋함이 그대로 묻어난다.

“(상략)스페셜올림픽이 끝났는데도 엄마는 여전히 바쁘기만 하지? 어떨 때는 솔직한 심정으로 세상의 변화를 위해서 엄마가 유나를 팽개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단다. 네가 잘하는 ‘양보’를 엄마가 또 강요하고 있구나 하고…. 일주일 내내 주말 말고는 엄마랑 저녁 한 끼도 같이 못 먹는 너를 보면 엄마로서 잘하고 있는 건가 하는 회의도 들어. 난 정말 엄마로서는 빵점 엄마인가 봐. 그래도 이 빵점 엄마를 늘 백점 엄마로 생각해 주는 유나가 있어 엄마는 늘 행복하단다. 고마워. 우리 유나와 유나랑 같은 처지에 있는 아이들이 더 행복해질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하자 사랑해.” -<무릎을 굽히면 사랑이 보인다> 중

지속적인 관심이 기적을 만든다

 

나 위원장은 스페셜올림픽이 끝나고 서울 후암동의 한 장애인 시설에 한 달에 한 번, 매월 첫째 주 금요일에 목욕 봉사를 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연고가 없거나 부모가 사정상 돌볼 수 없는 중증 장애인 30여 명이 생활하고 있다. 나 위원장은 아직도 처음 목욕 봉사를 갔을 때가 잊히지 않는다고 했다.
“딸을 키우며 많은 장애인들을 보았고, 그래서 누구보다 장애인에 대해 눈도, 마음도 열려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어요. 눈을 어디다 둬야 할지 몰라 당황했어요. 애 둘을 키웠으니 2차 성징이 나타나지 않은 아이들은 그리 어렵지 않게 씻길 수 있어요. 하지만 성인 장애인, 그것도 중증 장애인의 알몸을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어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순간 얼어붙어 버렸어요. 장애인에게 다가가는 데 있어 ‘시각’이 얼마나 큰 벽이 되는지 실감했어요.”
하지만 목욕 봉사를 가는 횟수가 늘어나면서 거북스럽던 속마음이 사라지고 익숙해졌다. 그러더니 하나둘 예쁜 곳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 위원장은 나태주 시인의 <풀꽃>이라는 시의 한 구절을 인용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 시에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라는 구절이 있어요. 풀꽃만 그런 게 아니에요. 장애인도 그래요. 스물일곱 살 정민이(가명)는 두 살 때 의료 사고로 뇌병변 장애가 생겼다고 해요. 그곳에 있는 친구들 중에서도 장애 정도가 심한 편에 속해요. 비틀어진 정도가 심해서 휠체어에 앉힐 수도 없고 옆으로 눕히지도 못해요. 감정 표현도 거의 하지 않는 편이에요. 그런데 얼마 전 목욕을 다 시키고 나오며 ‘시원하지?’하고 물으니 저를 보고 씩 웃는 거예요. 그 모습이 얼마 예쁘던지, 마음까지 환해진 느낌이었어요.”
첫인상에서 시각이 차지하는 비중은 55%라고 한다. 그리고 60번 이상을 만나야 그 첫인상이 바뀐다고 한다. ‘시각’이라는 장애물을 넘어 그 사람의 본질을 보려면 60번의 만남이 필요한 것이다. 장애인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사람들은 장애인들은 다 비슷비슷하게 생겼다고 해요. 개성을 찾는 것에도 인색한데 아름다움은 말할 것도 없죠. 그런데 자주 보고, 오래 보아 익숙해지면 하나둘 각자의 개성이 보이기 시작해요. 거기서 더 나아가면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단계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장애인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존중도 거기서 출발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요.”
나 위원장은 이번 대회를 통해 우리 사회의 가능성을 보게 됐다고 했다. 많은 사람이 요즘 사회가 너무 치열하고 빡빡하다고만 하는데, 대회를 치르면서 보니 우리 사회에는 아직 온기가 남아 있더라는 것이다.
“실질적으로 그 대회가 성공했다는 평가를 들을 수 있는 건 정말 많은 분들이 도와주셨기 때문이에요. 많은 분들이 흔쾌히 마음을 갖고 참여해 주시는 것을 보면서 희망을 봤어요. 이런 감동을 지속적으로 이어가는 것, 그것을 실질적인 변화로 이끌어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장애인의 현실에 대한 프로그램이나 행사를 보면서 많은 이들은 도움의 손길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대부분 ‘이건 누가 해줄 거야’ 혹은 ‘정부가 좀 바뀌어야 해’, ‘예산이 좀 더 있어야 해’라는 생각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나 위원장은 ‘내가 무엇을 도울 수는 없을까’라고 생각해 주기를 바란다고 했다.
     
 

“봉사라는 것을 너무 거창하게 생각하지 말았으면 해요. 그게 시작이라고 생각해요. 봉사는 내가 잘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것이에요. 꼭 어떤 기관에서 봉사활동을 하는 것만이 봉사가 아니라, 지나가는 장애인을 지켜보면서 조금 기다려 주는 것, 이것이 시작입니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우리’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봤다”


 

나경원 위원장이 선수들과 함께 플로어하키 경기에 참여하고 있다. 사진 한국스페셜올림픽 위원회 제공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