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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만에 무대로 돌아온 추상미
5년 만에 무대로 돌아온 추상미
  • 이윤지 기자
  • 승인 2014.03.18 22: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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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R INSIDE
 

지난달, 영국 최고의 극작가 데이빗 해어(David Hare)의 대표작인 연극 <은밀한 기쁨>이 동숭아트센터 소극장에서 국내 최초로 막을 올렸다. 그리고 배우 추상미가 연극 무대에서 오랜만에 관객과 마주했다. 5년 만의 재회다. 서늘하고 깊은 눈매는 여전했고 음성에는 더 많은 것들이 담겨 있었다. 추상미와 <은밀한 기쁨>을 가까이에서 보았다.

취재 이윤지 기자 | 사진 Story P 제공

5년 만에 관객들 앞에 선 추상미는 세월이 비껴간 듯 소녀 같은 눈동자 그대로 무대에 올랐다. 다소 야윈 것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무대를 걷는 다부진 몸매와 거침없이 건강한 목소리는 특별한 에너지를 내고 있었다. 섬세한 내면 연기를 기대하게 만드는 좋은 분위기를 지닌 배우인 것도 여전했다. 출산을 겪은 후인데도 발걸음은 가뿐했고 몰입은 신속했다. 긴 시간을 기다렸다 만나는 벅찬 느낌은 관객도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추상미, 이사벨

추상미의 작고 가녀린 몸매와 도회적인 눈빛은 <은밀한 기쁨>의 강하면서도 여린 캐릭터 이사벨 그대로였다. 촛불처럼 일렁이는 이사벨의 눈빛에 모두가 집중했고 서서히 배우 추상미와 이사벨의 그림자는 같은 지점으로 맞춰졌다.
죽은 아버지의 삶의 방식과 그 가치를 인정하며, 처치 곤란한 아버지의 후처인 캐서린을 묵묵히 떠안는 둘재 딸 ‘이사벨 글라스’라는 역할을 선택한 것은 완성도 높은 대본과 작가 데이빗 해어의 명성을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작품에 들어가기에 앞서 “쉽지 않은 작품이지만 정말 매력적인 작품이고 함께하는 배우들을 믿고 있다. 벌써부터 팀워크가 좋아서 완성도 있는 작품으로 관객들과 만날 수 있을 것 같다”며 작품에 대한 기대감을 드러냈다. 5년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그녀에겐 많은 변화가 있었다. 엄마가 됐고, 주위를 보는 시각이 조금 달라졌다는 고백을 했다.
여자에게 결혼과 출산이 주는 변화는 소소하면서도 경이로운 경험일 것이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가지게 되니 사람들을 바라보는 눈과 마음에 변화가 있다고 그녀는 말했다. 주변 사람들의 상황을 미루어 보게 되고, 동정의 눈길을 가지게 됐다는 것. 캐릭터를 대할 때도 마찬가지다. 더 깊이 들여다보면서 연민을 키우면 이해가 깊어진다고. 무대 위로 걸어 나와 첫 대사를 하는 그녀의 음성에서는 지난날과는 분명 다른 카리스마가 묻어났다.
꾸준히 정통 연극을 택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이 선택이 살면서 꼭 필요해서’라고 답했다. 배우에게 있어 스스로의 삶을 진지하게 성찰하는 과정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 일이 무대 위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면 관객은 그 극적인 장면을 함께 느끼게 될 테니 그녀의 선택은 환영할 만하다. 매력적이면서도 다가가기 어려운 과민한 캐릭터 이사벨과 이제야 조금씩 친해지기 시작한 추상미는, 그녀와 처음 마주했을 때의 낯선 느낌을 이야기했다.
“현대와는 너무 다른 아버지의 가치관을 지속하는 캐릭터를 이해하기 쉽지 않았죠. 일단은 내가 그렇지 않고, 또 주변에도 그런 사람은 없으니까요. 그런데 사람들은 모두 다 크고 작은 가치관들을 가지고 있잖아요. 대단한 가치가 아닐지라도 반드시 지키고자 하는 고집은 다들 하나씩 가지고 사니까요. 이사벨의 경우 아버지에 대한 존경의 마음, 존중해 드리겠다는 신념이 있는 것처럼요. 주변을 보면 물질적인 욕구가 비교적 덜하고 영적인 것을 추구하는 데 에너지를 쏟는 사람들이 있어요. 이사벨은 남들과는 추구하는 것의 기준이 조금 다른 한 사람일 뿐이에요. 한 장면 한 장면에 대한 이해가 조금씩 더해지면서 이제 이사벨과 좀 친해진 것 같아요.”

추상미의 은밀한 기쁨

 
연극 <은밀한 기쁨>은 아버지의 죽음이라는 시대적 상징을 시작으로 탐욕이라는 괴물을 절체절명의 이데올로기로 승화시킨 자본주의의 파괴력에 잔인한 현미경을 들이대며 전통적인 가치와 인간성의 붕괴 혹은 그 회복에 대해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는 지적인 정통 희곡이다. 은밀한 기쁨(The Secret Rapture)이란 수녀가(죽음으로써)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는 순간의 환희를 뜻한다. 가족의 이야기를 통해 1980년대 대처 정부를 신랄하게 풍자하고자 했던 원작자의 교묘한 정치적 은유를 김광보 연출이 미니멀하게 펼쳐냈다. 김광보 연출은 “<은밀한 기쁨>은 정통 희곡으로, 전형적인 배우의 연극”이라고 소개했다. 작품이 함유하는 여러 정치적 메타포를 전면에 내세우기보다는, 한 가족의 드라마로서 배우들의 연기에 충실한 작품을 만들어 나가다 보면 정치적 은유 또한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고 소감을 밝혔다. 또 플롯 자체가 단순한 만큼 인물들의 심리와 갈등에 집중하고자 한다고 말했다. 희곡을 처음 접했을 때의 느낌은 “한마디로 체홉과 입센의 결합이다.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감정과 대사와 달리 인물들의 심리는 다변적이고 복합적이라는 면에서 체홉을 연상시키고, 정치적 주제를 가족의 드라마로 교묘하게 포장한 극작술이나 주제의식은 입센을 닮았다. 그러나 모든 훌륭한 희곡들이 그러하듯, 결국은 ‘인간’에 대한 이야기다. 인물에 최대한 초점을 맞추고 연출적으로 절제할 계획이다”라고 연출 의도를 밝힌 바 있다.
연극은 애인인 어윈과 함께 작은 디자인 회사를 운영하며 소박하게 살아가는 이사벨이 아버지의 죽음을 맞이해 침울해 있는 장면에서부터 시작된다. 죽음을 앞둔 아버지를 돌보며 마지막 순간을 함께한 이사벨은 조용히 아버지와 작별하기를 바라지만 환경부 차관인 언니 마리온과 성공한 기업가인 형부 톰이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고, 아버지의 젊은 새 아내인 알코올중독자 캐서린과 언니가 부딪히면서 갈등이 시작된다. 언니 부부는 교묘하게 캐서린을 이사벨에게 떠넘기고, 나아가 이사벨의 사업을 확장한다는 핑계로 세금포탈을 하려 한다. 자신의 회사에 캐서린을 취직시킨 이사벨은 그로 인해 애인인 어윈과도 갈등을 일으키지만 끊임없이 문제를 일으키는 캐서린을 버리지 못한다. 이사벨을 사랑하고 그녀와의 소박한 삶을 꿈꾸는 약혼자 ‘어윈 포스너’ 역을 맡은 영화배우 이명행은 “한 여자의 삶이 파국으로 치닫는 드라마가 너무나도 매력적”이라고 말했다.
죽은 남편만이 자신의 인간적 가치를 인정해 주었다며 그를 그리워하면서도 그의 유산을 온전히 자신의 새로운 삶을 위해 탕진하려 하는 알콜중독자 캐서린과, 이사벨의 약혼자로서 그녀와의 소박한 삶을 꿈꾸었으나 언니 부부의 농간에 흔들려 이사벨의 믿음을 배신하고 결국 되돌릴 수 없는 일을 저지르고 마는 어윈. 이렇듯 희곡은 두 개의 확고한 가치 충돌과 그 안에서 갈등하며 흔들리다 파멸에 이르는 인물들을 생생하게 그리고 있다. 그러면서 ‘부의 축적’, ‘사회적 성공’, ‘종교’란 것이 사회적으로 아무런 의심 없이 추구되어야 할 가치인가를 날카롭게 질문한다. 이 과정에서 작가는 보수적 자본주의와 기독교의 결합, 진보주의자들의 이상주의, 보수층과 하류층의 사람들이 진보주의자들을 공격하는 논리 등을 한꺼번에 비난하고 있다. 또한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이사벨의 주변 인물들은 그녀의 선의를 견뎌내지 못하고 그녀가 위선적이라며 끊임없이 비난하고, 그녀의 삶을 자신들의 뜻대로 재단하려 한다는 점이다. 결국 그들도 내면 깊은 곳에서는 옳고 그름에 대한 인식이 있다는 것인데 행동 양식은 그 반대이며, 그 가책을 모두 이사벨을 공격하는 것으로 상쇄하려 든다는 점이다.
이같이 복잡한 설정의 중심에서 주인공 이사벨이 되기란 참 힘겨워 보인다. 그러나 연극이 끝날 때까지 추상미는 내내 무엇을 더하지도 빼지도 않은 채, 유연한 반응으로 리얼리티를 이끌어내는 차분한 몸짓을 보여줬다. 갑자기 10여 년도 더 지난 드라마가 한 편 떠올랐다. 다듬어지지 않은 거친 음색, 아무것도 계산하지 않은 채 캐릭터를 과감히 끌고 나가는 에너지를 보여줬던 드라마 <거짓말>에서의 추상미는 지금과 다르면서도 아주 같다. 머물 곳 없이 떠도는 청춘 ‘세미’의 걸러지지 않은 날것의 목소리를 그녀가 지금 재연할 수는 없겠지만 배우로서 만나게 되는 작품 속 수많은 여성들과 진지하게 공감해 온 오늘의 그녀는 여전히 아름답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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