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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는 미술사
다시 읽는 미술사
  • 이시종 기자
  • 승인 2014.03.22 08: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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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회화는 죽지 않고 진화한다
▲ 오명희 작. 삶의 작은 찬가 A little song of life-163x130cm 캔버스에 油彩 자개 2009

19세기 중반, 대중 누구나 쓸 수 있는 사진기가 발명되면서 ‘회화의 시대는 갔다’는 말이 나돌았다. 하지만 회화는 다양한 형태로 변화를 거듭하면서 여전히 그 영역을 굳건히 지키고 있다. 특히 요즘 미술계에서는 ‘회화로의 귀환’이라는 말이 여기저기서 들린다. 회화가 가진 예술적 생명력은 무엇일까.

글 이시종 기자

“오늘로서 회화는 죽었다.”
1839년 8월 19일 프랑스의 화가 폴 들라로슈는 이렇게 말했다. 이날은 프랑스 화가인 다게르와 과학자인 니엡슨에 의해 카메라가 발명됐다는 사실이 공식적으로 알려진 날이었다. 들라로슈의 이 말은 미술이 가진 인류의 목적 중의 하나인 재현과 기록이 더 이상 미술에 있지 않게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머지않아 화가들은 대량 실업 사태를 맞았다. 그리고 21세기 현재, 스마트폰이 보급되면서 누구나 언제 어디서나 ‘이미지 생산자’가 될 수 있는 시대가 열렸다. 붓과 물감으로 그리는 그림은 이제 진부하기 짝이 없게 느껴진다. 그래, 이만하면 회화가 죽을 이유는 충분하다.
그러나 회화는 살아남았다. 아니 각종 생생한 이미지들이 차고 넘쳐 물릴 지경인 디지털 시대에 ‘손으로 그린 그림’의 가치는 더욱 높아졌다. 낯설고 참신한 미디어 아트보다 회화 전시에는 사람들이 더욱 많이 몰리고, 아트 컬렉터들이 가장 선호하는 미술 장르도 역시 회화다. 이쯤 되면 의문이 생길 정도다. 미술에 있어서 가장 전통적인 장르인 회화는 죽지 않았을까?

회화 생명력의 핵심은 변화와 혁신

회화의 기능이 재현과 기록뿐이었다면 ‘호모 픽토르(Homo Pictor:그림 그리는 인류)’는 지금쯤 지구상에서 사라졌을 것이다. 자연과학과 공업 발달로 사진·영화·인쇄기술 및 그 응용조직이 발달되자 초상화·풍경화·사건화를 비롯한 주제화(主題畵)·선전화·삽화 등으로 생각하던 회화의 실용적 역할을 제거하여 회화의 존재가치조차 의심스럽게 되었다. 이에 대하여 회화는 기술적 방법을 가지고서는 도달할 수 없는 회화 자체의 미적 근원으로 표현하여 회화 존재의 의의를 주장하였다.
근대 회화는 여기에서 출발한다. 그것은 인상파 운동으로부터 후기인상파·포비슴(야수파)·표현주의·큐비즘(입체파)·추상주의·쉬르레알리슴(초현실주의) 등의 활동에 의하여 추진된다. 여러 가지 경향을 내포하면서도 한마디로 르네상스 이후 19세기에 이르기까지 행하여졌던 아카데미즘에 반대하며, 자연모사주의(自然模寫主義)를 버리고 조형성 탐구를 중심으로 회화 표현을 일신하여 정확한 근대 생활의 예술이 되려는 것이다. 많은 화가는 주관적인 자신의 이야기를 그림에 담기 시작했고, 자신의 소박성과 고뇌, 철학을 조형 언어인 그림으로 그려냈다. 제도적 교본을 거부한 인상주의에서부터 고상함과 고급을 부정한 팝아트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미술이란 항상 현재를 부정하면서 자신의 위치를 확보해 왔다. 변기(마르셀 뒤샹)가 예술이 되고 가루비누 상자가 쌓여(앤디 워홀) 예술 작품이 됐다.

예술의 본질적 고민인 새로움에 대한 욕구로 회화는 다시 위기에 빠졌다. 2000년대 초반 국내 미술계에서는 다시 ‘회화의 시대는 갔다’는 말이 돌기 시작했다. 회화적 기법은 더 이상 새로운 것이 없으며, 과거만을 답보하고 있다는 비판이 일었다. 그러면서 한동안 미술계에는 첨단 영상매체를 활용한 설치 미술 등이 득세했다. 몇 년간 젊은 작가들은 그리기라는 미술의 기본보다는 튀는 아이디어에 의존하는 경향이 짙었다.
하지만 최근 다시 미술계에서는 ‘회화로 귀환’이라는 말이 심심치 않게 들린다. 그림 그리는 행위 자체를 주목하는 미술관 화랑 등의 기획전이 활기를 띠고, 비디오 설치로 향하던 젊은 화가들이 새롭게 평면 회화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한 미술평론가는 “회화 등 시각 예술의 재평가가 이뤄지고 있으며, 국내외 미술기획자 역시 일반인과 격리되는 미디어를 활용한 이벤트성 전시보다 보수적 장르로 복귀하는 추세”라고 말했다. 국내 젊은 작가들로선 소모적이고 수요도 없으며 아이디어의 한계에 직면한 설치 대신 손으로 직접 작업하는 전통의 회화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미술평론가 이진숙은 자신의 저서 <미술의 빅뱅>에서 “21세기에도 호모 픽토르가 존속하는 것은 변화와 혁신을 거듭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차용, 패러디, 오마주 등을 아우르는 ‘메타 페인팅’의 등장도 한 이유이지만 인간이 지닌 ‘감각’을 손으로 직접적으로 전하는 회화는 인간이 육체를 가진 존재인 한 본능처럼 작동할 것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이진숙은 또한 “아울러 디지털 혁명으로 소통의 간접성이 증대되고, 비물질화가 가속화될수록 오히려 ‘구체적인 것의 총아’인 회화는 앞으로도 계속 존속할 것”이라고 전망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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