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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정도전'으로 본 한양의 풍수
드라마 '정도전'으로 본 한양의 풍수
  • 이윤지 기자
  • 승인 2014.03.29 10: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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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은 왜 조선의 수도가 됐나?
 

KBS가 2년간의 준비기간을 거쳐 내놓은 KBS1 대하드라마 <정도전>이 사극 마니아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다. '픽션 퓨전 사극'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요즘, <정도전>의 등장은 오히려 신선했다. 알다시피 정도전은 조선의 개국공신이며, 한양을 도읍으로 정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던 사람이다. 정도전은 왜 한양을 도읍으로 정했을까. 드라마를 통해 한양의 풍수를 들여다봤다.

취재 이윤지 기자 사진 KBS1 <정도전> 방송 캡처

정통 사극을 표방하는 KBS1 대하드라마 <정도전>이 동시간대 시청률 1위로 올라서는 등 그 기세가 만만치 않다. 드라마는 주인공인 정도전(조재현 분)의 곡절 많은 인생사가 한 편의 시나리오가 됐다. 탄탄한 연기력을 펼치는 연기자들은 드라마 몰입도를 더욱 높인다. 곧 방영될 이성계(유동근 분)와의 만남은 새 왕조 탄생의 신호탄이 될 것이다. 정도전은 고려 말 급진적 개혁 성향의 정치인이었다. 그는 후에 조선을 세우는 핵심적 역할을 하게 되고, 한양을 도읍으로 정하는 데에도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된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드는 것이 있다. 정도전은 왜 한양을 도읍으로 정했던 것일까.

고려 때도 개성과 평양에 버금가는 도시로 각광

한양은 고려 중엽 때부터 당시의 수도였던 개성과 평양에 버금가는 도시로 각광을 받았다. 개경(개성), 서경(평양), 동경(경주)과 함께 4경의 하나였던 남경이라 불리던 한양은 정치적 사건이 있을 때마다 개성지기쇠퇴설(開城地氣衰退說)과 함께 남경천도설(南京遷都說)이 끊임없이 제기되었다. 고려의 수도 개성은 도선국사가 천년 도읍지로 정한 명당이었는데 도선이 개성의 지리를 살필 때 날씨가 너무 흐려 개경을 엿보는 남경의 삼각산(지금의 북한산)을 미처 보지 못했다고 한다. 날씨가 맑은 날 다시 보니 삼각산이 마치 개성을 훔쳐가려는 모습을 하고 있어 고려 왕조는 500년으로 끝나고 반드시 한양에 새로운 왕조가 세워질 것이라고 예언했다고 한다. 그 예언이 적중해서인지 한양은 1392년 조선을 세운 태조가 1394년 국도로 정한 후 지금껏 이 나라의 수도 역할을 하고 있다.
경복궁은 조선 왕조의 첫 궁궐이자 법궁(法宮, 임금이 머무는 궁궐 가운데 으뜸이 되는 궁궐)이다. 그런데 경복궁 터는 원래 고려 숙종 9년(1104) 5월에 남경(南京, 지금의 서울)에 지은 행궁(行宮, 임금이 행차 때 머물던 별궁) 자리다. 숙종이 도읍인 개경을 두고 남경에 따로 궁궐을 지은 사연은 이렇다. 기록에 따르면 숙종 원년(1096), 풍수가 김위제는 도선국사의 예언서인 <도선밀기(道詵密記)>에 근거해 왕에게 ‘남경천도설’을 건의한다. 이에 숙종 9년(1104)에 궁궐이 완성됐지만 남경 천도는 끝내 이뤄지지 않았다.

하지만 고려를 멸하고 들어선 조선 왕조는 남경, 곧 한양을 국도로 삼았다. 개경에 근거한 구세력으로부터 벗어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조선 태조 원년(1392)에 한양의 궁실을 수리한 데 이어 태조 3년에는 한양을 수도로 정하고 개국공신인 정도전 등을 보내 종묘사직과 궁궐 및 도로의 터를 잡게 했다. 이들은 현장 답사 후 고려 숙종 때의 궁궐터가 너무 좁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하여 나온 주장이 남경 행궁 터에서 남쪽으로 조금 나온 곳에 건좌손향(乾坐巽向, 북서를 등지고 남동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방위를 틀어 궁궐을 배치해야 한다는 것. 하지만 정도전은 “군자는 남면(南面, 남쪽으로 향함)하여 정사를 살핀다”는 <예기(禮記)>의 구절을 인용해 반대했다. 결국 경복궁 터는 과거 김위제가 주장한 대로 임좌병향으로, 궁궐의 방향은 정남향인 자좌오향(子坐午向, 정북을 등지고 정남을 향함)으로 했다. 궁궐과 종묘가 낙성된 것은 공사를 착공한 지 10개월 만인 태조 4년(1395) 9월이다. 조선 왕조는 북악산을 주산으로 해 경복궁을 그 아래에 두었다. 북악산은 암석이 많고 산세가 험해 음기가 강하므로 이 같은 숙살지기(肅殺之氣, 쌀쌀하고 매서운 기운)로 왕권을 지키려 한 것이다. 경복궁 터를 잡을 때 생긴 일화가 오늘날 지명에도 남은 ‘왕십리(往十里)’다. 무학대사가 도읍지를 찾느라 지금의 왕십리 일대 동쪽 들판을 살피는데, 밭을 갈던 노인이 “미련한 무학아, 여기서 헤매지 말고 서쪽으로 왕십리하라(십리를 더 가라)”고 하자 그 말을 듣고 찾은 터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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