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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 40주년 이장호 감독의 터닝 포인트
데뷔 40주년 이장호 감독의 터닝 포인트
  • 박천국 기자
  • 승인 2014.04.02 23: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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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흥행은 물론, 대종상 감독상 등 자타공인 최고의 감독 반열에 올랐던 이장호 감독. 그는 척박했던 한국 영화계에 혜성처럼 등장했다. 첫 작품 <별들의 고향>으로 화려하게 데뷔한 이후 그는 발표하는 작품마다 국민적인 사랑을 받았다. 데뷔 40주년을 맞은 그는 화려했던 시절 자신에 대해 ‘관객에게 빚진 자’라며
냉혹한 평가를 내렸다. ‘왜’라는 궁금증을 품은 채 새로운 출발점에 선 그와 허심탄회한 이야기를 나눴다.

취재 박천국 기자 | 사진 양우영 기자

“새 장편영화 <시선>은 저에게는 제2의 데뷔작입니다.”
이처럼 이장호 감독에게 이번 영화는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1995년 영화 <천재선언>을 끝으로 그에게 좀처럼 영화 연출의 기회가 찾아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18년이라는 시간이 지나서야 비로소 자신의 이름을 내건 신작을 통해 대중 앞에 서게 된 것이다. 그 공백기 동안 그는 대학교 강단에서 후학을 양성해 왔다. 그것이 그를 경제적인 안정으로 이끈 것은 분명했지만 감독으로서의 갈증마저 채우지는 못했다.
이는 영화를 끊임없이 갈망해 온 그가 이번 작품을 통해 화려했던 과거를 잊고 신인 감독의 자세로 임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새로운 시선으로 영화를 바라보다

강산이 두 번이나 변했을 법한 시간 동안 그는 감독으로서 활동하지 못했다. 지난 20여 년간 한국영화의 제작 환경은 상당 부분 변화했고, 18년 만에 메가폰을 잡은 그에게 영화 현장은 낯선 풍경이 되어 있었다.
“제가 한창 영화 작업을 했을 때는 아날로그 시대였다면 지금은 첨단 디지털 시대로 바뀌었기 때문에 영화 환경 자체가 많이 달라졌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렇게 좋은 환경에서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죠. 좋은 환경에서 좋은 배우들과 함께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저에게는 큰 힘이 되었습니다. 만약 흥행이나 관객 반응을 염두에 두지 않고 하고 싶은 영화를 한다면 굉장히 만족할 만한 작품이 탄생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도 컸고요.”
이처럼 영화 현장에 들어섰던 기억만으로도 웃음을 감추지 못하는 그가 감독으로서 긴 공백기를 가졌다는 것이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 역시 정확한 이유는 알지 못하는 듯했다. 하지만 그는 그러한 어려운 과정들에 종교적인 의미를 부여했다. 신이 이전에 자신이 만들던 영화를 원치 않았기 때문에 그를 변화시키기 위한 계획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뿐이었다.
“전혀 내 뜻과 상관없이 영화를 만들려고 했는데도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작품도 나쁘지 않았고, 예전 같으면 제가 원작을 확보해 놓으면 영화로 만들어졌을 텐데 어쩐 일인지 영화화가 안 되고 번번이 좌절해야 했어요. 결국 이게 제가 믿는 신의 뜻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과거에 만들던 방식의 영화를 원치 않으셨던 거죠. 그런 생각이 들기까지 18년이라는 세월이 흘러야 했어요.”

영화 제작비 지원 과정에서 부침도 있었다. 전주대학교 정년퇴임 이후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의 영화 제작 지원 프로젝트에 지원해 최고 점수를 받았지만 행정직무위원회의 행정 승인 과정에서 제작비 지원이 부결된 것이다. 그는 부당한 절차에 불복하고 영진위를 상대로 행정 소송을 걸어야 했다.
“정년퇴임 후 다시 영화를 만들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을 때 해외영화제 수상 실적이 있는 감독의 시나리오를 심사해서 제작비 전액을 지원해 주는 프로젝트를 알게 됐어요. 그 프로젝트에 지원해서 최고 점수를 받았는데 행정직무위원회 위원들이 부결을 시켰죠. 행정 소송을 걸고 법원에서 반대 진영의 이유를 따져 보니 감독이 노령이어서 실현된 가능성이 없다는 것이었죠. 3년간의 행정 소송을 거쳐 결국 승소해 제작비를 지원받았고 이후 영진위 측의 사과도 받을 수 있었어요.
당시 영진위 내부적으로 영화인협회와 정치적으로 밀착되어 불미스러운 일들이 좀 있었던 시기였죠.”영화 준비 과정도 만만치 않았지만 캄보디아에서 50일 동안 진행됐던 해외 로케이션 촬영은 예측 불가능한 어려움의 연속이었다. 당시 가장 큰 난관은 캄보디아 당국의 비협조적인 태도로 예정돼 있던 촬영 장소를 포기하고 급하게 다른 장소를 물색하는 일이었다. 그는 “어렵게 촬영 장소를 섭외했지만, 적도에 위치한 캄보디아의 날씨와 독충으로 출연 배우들과 스태프들은 촬영에 애를 먹어야 했다”며 감독 복귀를 위해 혹독한 신고식을 치러야 했던 아픈 기억들을 꺼내놓았다.
“캄보디아라는 생소한 환경에서 촬영을 진행하다 보니 촬영 장소 섭외부터 차질이 빚어졌어요. 원래 원하던 곳이 태국과 캄보디아 국경에 위치한 정글이었는데 그곳은 앙코르와트 소유권을 가지고 분쟁이 일어나서 지뢰밭이 된 지역입니다. 그래서 그 위험을 극복하려면 군인들의 협조가 필요한데, 그것을 해주지 않았죠. 차선으로 촬영 장소를 찾다 보니 그 과정이 무척 힘들었어요. 또 적도가 갖고 있는 독충이나 날씨도
배우나 스태프들을 고생시켰고요. 무엇보다 풍토 바이러스로 배우 박용식 씨를 잃은 것이 큰 슬픔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는 제작 과정이 힘겨웠던 만큼 영화를 통해 깊이 있는 메시지를 전하고자 했다.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가치가 점차 팽배해져 가는 이 시대에 영혼의 문제를 잊지 말자는 것. 그가 감독으로서 제2의 인생을 맞이한 시점에서 꺼내들어야만 했던, 그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해진 삶의 화두였다.
“사실 이전에 만들었던 영화에 대해서 반성하는 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감독으로서 관객에게 빚진 자라는 개념을 늘 머릿속에 갖고 있어요. 그 빚을 갚기 위해 관객에게 영혼의 문제를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죠. 물질만능주의와 육체적 쾌락이 난무하는 이 시대에 감독으로서 영혼의 문제를 주제로 던지는 것이 그동안 제가 관객에게 진 빚을 되돌려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를 변화시킨 두 번의 운명적인 기회

그는 감독 생활 40년 동안 자신에게 두 번의 운명적인 기회가 찾아왔다고 했다. 하나는 막역지우인 고(故) 최인호 작가의 원작을 영화화한 <별들의 고향>으로 첫 작품 만에 인기 감독이 된 것이라면, 다른 하나는 연예인 대마초 사건에 휘말리면서 4년간 활동 정지 명령을 받았던 것이다.
얼핏 보면 두 가지가 행운과 불행이라는 상반된 가치로 읽힐 수 있는 내용이지만, 그는 그 두 가지 사건을 통해 보이는 가치에서 벗어나 보이지 않는 본질에 대해 생각할 수 있었다고 고백했다. 그에게 그런 과정이 없었더라면 최근 그의 작품은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별들의 고향>이 개봉했을 당시 극장 앞이 새까맣게 인산인해를 이뤘어요. 관객 수 10만 명을 돌파하니까 원작의 인기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20만 명을 넘어서니 가수 이장희가 만든 ‘영화 음악의 덕을 봤구나’라고 여겼죠. 그런데 관객 규모가 30만 명이 되니까 그제야 은근히 영화도 괜찮은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됐어요. 그러다 40만 명이 넘어가니 갑자기 이 영화가 혼자 가는 말처럼 우리와 상관없이 흥행을 한다는 느낌을 받게 되면서 허무하고 우울한 감정이 들었어요. 첫 작품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인기를 얻으니 마음에 변덕이 생기면서 복잡해지고 나중에는 감상에 치우치게 된 거죠. 그 사건이 신인 감독이었던 저를 심적으로 단련시켰다면, 연예인 대마초 사건에 휘말리면서 4년간 활동 정지 명령을 받은 건 오히려 위기가 기회가 된 경우예요. 긴 시간을 가지고 영화를 다시 생각해 보게 되면서 그전에는 명성에 사로잡혀 철저한 준비 없이 영화를 만들었다면, 영화판에서 떨어져 영화를 바라보게 되자 영화의 리얼리즘이 사라진 영화계의 문제를 발견하게 됐고, 사회과학 서적을 읽고 의식화되면서 <바람 불어 좋은 날>이라는 당시 현실 문제를 담은 영화를 만들 수 있었죠. 두 번째 기회는 불행한 얼굴로 저에게 찾아왔지만, 오히려 데뷔 기회보다 더 중요하고 제 일생의 중요한 터닝 포인트로 삼을 만한 진정한 ‘럭키 찬스’였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그는 1987년부터 27년간 인생의 내리막길을 경험했다. 현실과 타협해 물질을 추구했던 시절, 영화 <무릎과 무릎 사이>, <어우동>을 만들면서 그는 돈에 의해 타락하기 시작했다고 털어놨다. 그 무렵 그는 교통사고를 크게 당하게 되었고 연이은 악재가 찾아들었다.
1987년부터 27년간 영화 흥행에서 모조리 참패하면서 그는 영문을 모르는 인생의 내리막길에 접어들어야 했다. 실패로 인한 패배감도 컸지만, 한동안 영화를 만들지 못했던 좌절감과 고통이 그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그는 4년간 활동 정지 기간을 극복해낸 경험을 떠올리며 또 한 차례 찾아온 자숙과 변화의 시기로 받아들였다. 그러자 그 어려움에 맞설 수 있었다.
“인생의 내리막길에 감사해야 하고 오히려 행운의 기회라는 생각을 갖기 시작한 것은 하는 일마다 실패를 겪은 지 10년 만의 일이었어요. 그런 경험들이 저에게도 무척이나 고통스럽고 힘든 일이었지만, 예전에 고통을 이겨냈던 상황을 떠올리며 또 한 번의 터닝 포인트가 될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되더라고요. 그렇게 서서히 변화를 거듭해서 결국 이번 영화를 만들게 된 것입니다.”

미완성된 나의 인생을 통해 한국 영화계가 완성되길

최근 한국 영화는 ‘1억 관객 시대’를 열었다. 하지만 그는 감독들에게 “좋은 시절에 독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 달라”고 조언했다. 과거에는 현실 속에서 더 영화 같은 일이 벌어졌다면, 지금은 경제적 안정과 풍요 속에서 독을 키울 수 있다는 뜻이었다. 특히 대기업 자본에 의해 영화 흥행이 이뤄지는 구조는 수익을 창출해내는 매커니즘의 완성도에서 비롯될 수 있으니, 돈이 아닌 정신이 살아있는 문제들에 관심을 가져달라는 충고도 잊지 않았다.
“요즘 독립영화의 활성화가 반갑게 느껴집니다. 독립영화들은 정신이 살아있는 문제들을 영화에 표현하고 있으니까요. 세계적인 추세를 보면 영화로 돈벌이만 찾을 때 결국 무너지는 것을 보게 되는데, 결국 영화를 살리는 힘은 독립영화에서 나왔죠. 바로 이런 점에서 좋은 시절에 독이 있다는 말을 영화감독들이 명심했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그는 감독으로서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영화를 만들기 위해 진력해 나갈 계획이다. 하지만 인생의 황혼에서 선택한 자신의 행로가 좁은 길이 될지도 모른다고 표현했다. 어쩌면 돈과 명예를 가져다줄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그는 여생 동안 영혼의 문제와 이웃 사랑 등의 관념적인 주제를 영화로 만들어 우리 시대가 놓치고 있었던 가치들을 영화로 이야기할 생각이다.
“좁은 길에 들어섰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영화에 희망을 거는 것은 나처럼 변화된 감독들이 많이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생각하는 영화가 이 시대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 남기를 바라는 것이죠. 나중에 제가 죽어서 세상에 남지 않더라도 영화를 통해 씨를 뿌린 결과가 여러 감독들에 의해 한국 영화의 중요한 맥으로 유지되었으면 좋겠어요. 내 인생은 완성보다 미완성이라고 표현하고 싶은데, 그것은 미완성된 나의 인생을 통해 한국 영화계가 완성되길 희망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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