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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아트홀 이종덕 사장과 사람들
충무아트홀 이종덕 사장과 사람들
  • 박천국 기자
  • 승인 2014.04.21 18: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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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1호 예술경영 CEO

문화와 예술이라는 단어조차 잘 쓰지 않던 시절부터 우리나라 문화예술계의 발전을 위해 남몰래 땀 흘려온 사람이 있다. 공연계의 대부로 불리며 한국 문화예술 분야의 산증인인 충무아트홀 이종덕 사장이다. 그가 이룬 개인적 체험과 성취는 한국 공연예술의 성장 및 성숙과도 상당 부분 겹쳐 있다. 현재 문화 융성을 외치며 문화예술 발전을 위한 의미 있는 성과와 도전들은 과거 그가 뿌린 씨앗들이 자라 하나둘씩 열매를 이룬 땀의 결실이기도 하다.
취재 박천국 기자 | 사진 양우영 기자

“배우가 ‘앞 광대’라면 무대 뒤에서 묵묵히 땀 흘리며 배우를 돕는 사람들은 ‘뒷광대’, 나의 뒷광대 인생 50년 이야기”

올해로 여든이 된 이종덕 사장은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노신사와 다를 바 없다. 충무아트홀에서 지나치는 직원들마다 다정하게 인사를 건네는 그에게서 권위주의나 특권의식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오히려 몸에 밴 듯한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모습에서 그가 50년간 문화예술 행정가로 활동하며 걸어온 삶의 방식을 조금은 엿볼 수 있었다. 그가 명함과 함께 건넨 조그마한 카드에는 20가지의 생활신조가 적혀 있었다. 2001년 광화문을 문화예술의 본산으로 만들겠다며 의기투합한 낭만파 클럽 회원들과의 약속이 적힌 20가지 원칙인데, 그는 이 신조를 철칙으로 삼고 있다. 특히 ‘따지지 않는다’, ‘차라리 내가 손해본다’, ‘절대로 남의 나쁜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는 원칙은 그가 문화예술계에서 존경받는 원로가 될 수 있었던 중요한 비결 중 하나였다.

우연히 공무원 시험에 응시해 문화예술계 입문

그는 대학을 졸업할 무렵 직업 선택 문제로 고민이 적지 않았다. 대학 졸업과 함께 준교사 자격증을 받을 수 있어 그는 교직에 몸담으려 했지만, 이왕 가르칠 거면 교수가 되는 것도 좋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가장의 역할을 해야 했던 그가 더 이상 공부를 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힘든 일이었다. 그러다 그는 우연히 공무원시험 공고를 보게 됐다. ‘응시나 해보자’는 마음으로 원서를 내고 시험을 본 게 합격으로 이어졌다. 그의 공무원 생활은 우연히 그리고 운명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2년 정도 일을 하다 공보부로 가게 되었는데 당시 공보부 차관이었던 고종사촌 매형께서 유혹이 많은 곳에는 가지 않는 게 좋다며 영화과보다는 문화과로 갈 것을 조언해 주셨습니다. 저는 그 부서에 가면 업무에만 전념할 수 있는지를 다시 묻고는 ‘아무래도 영화보다는 낫지’라는 답을 듣고 고민할 것 없이 문화과에 지원하게 됐습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지금까지 50년간 공연예술 분야의 행정가로 일하게 된 것이죠.”
하지만 그가 문화예술 분야 행정가로 일하던 시절만 해도 전반적인 문화예술 인식 수준이 상당히 낮을 수밖에 없다. 과거 일본에서 번역한 내용으로 만들어 시대에 뒤떨어진 공연법이 문화예술계의 발전을 가로막고 있던 때이기도 했다. 극장을 퇴폐 문화나 하위문화로 취급하고 초등학교나 중학교 등 학교 주변에 극장을 짓지 못하게 막았다. 이를 해결하고자 당시 그는 법률 개정을 위해 고군분투한 적도 있다.
“심지어 지방에서는 퇴폐 풍속을 단속한다며 학교 주변의 극장을 폐쇄하는 것으로 공연 문화 발전을 꽁꽁 묶어놓고 있었죠. 극장이라면 퇴폐한 장소로 보고 초등학교나 중학교 등 학교가 있으면 그 주변에 극장을 못 지었던 시기였어요. 당시 공연법에서는 최소한 300m 거리를 두고 학교와 떨어지게 극장을 지어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었어요. 중요한 것은 300m가 직선거리인지 아니면 길을 따라서 인지가 중요했는데, 결국 제 노력으로 ‘300m는 직선거리를 말한다’라는 내용으로 법을 바꿀 수 있었죠. 1971년도에 그런 일이 있었던 것은 제가 공무원이었지만 추진력이 강하고 무슨 일을 할 때 ‘정의의 기준에서 어긋나는 것은 못 참고 빨리 고쳐야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그때부터 성격이 칼날 같았고 부정한 일은 전혀 하지 못했던 것 같아요.”

그는 문화예술 행정가로서 공연계 사람들과의 친분을 쌓기 위해 노력해 왔다. 낮에는 공무원으로서 문화예술 행정 업무를 담당했다면, 밤에는 문화예술인들과 어울리면서 인맥을 쌓아 나갔다. 이는 그가 행정가로서 두각을 나타낼 수 있었던 비결이 되기도 했다. 이를테면 1973년 러시아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서 1등 없는 2등으로 귀국했을 때 카퍼레이드를 기획한 것도, 1988년 서울올림픽 당시 자신이 발굴한 코리아나의 ‘손에 손잡고’를 통해 전 세계인들을 감동시킨 것도, 2002년 독일에서 대성공을 거둔 발레리나 강수진의 화려한 국내 무대를 성사시킨 인물도 바로 이종덕 사장이었다.
“정부의 매니저라고 하면 맞을지 모르겠지만 낮에는 공무원으로 밤에는 문화예술인과 어울리면서 밤낮 정신없이 살았던 기억이 나요. 그러다 보니 문화공보부에서의 공직생활은 물론이고 한국문화예술진흥원, 서울예술단, 예술의전당, 세종문화회관, 성남아트센터, 충무아트홀 등을 거치면서 문화와 정치, 재계 인사들과 가리지 않고 두루 교류를 해온 탓에 사람들은 저에게 문화계의 마당발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문화예술 경영 2세대들의 헌정 출판기념회

그는 1988년 서울예술단 단장과 이사장을 역임한 바 있지만, 문화예술 CEO로 활동을 시작한 것은 1995년 예술의전당 사장으로 취임하면서부터다. 당시 예술의전당은 지금의 모습과 달리 대중에게 철저히 외면받는 문화공간이었다. 취임 전부터 그는 서울예술단이 예술의전당 내에 상주할 수 있도록 만든 일등공신으로 예술의전당 내 직원들의 관료주의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예술의전당을 찾는 관객들을 위한 편의시설도 부족했을 뿐만 아니라 표지판이나 장소 안내판 등 기본적인 시설도 갖춰지지 않았던 시기였다. 그는 취임하자마자 예술의전당을 변화시키기 위해 개혁을 단행해야 했다.
“예전 예술의전당은 굉장히 고급화되어 있었지만 문턱은 높고 대중은 찾아오지 않는 텅텅 빈 극장에 불과했어요. 그 전부터 서울예술단 이사장으로 있으면서 예술의전당의 문화를 알게 되었죠. 예술의전당 사장부터 전 직원까지 관람객을 왕으로 모시지 않고 권위주의와 관료주의에 빠져 있었던 겁니다.
그러다 보니 제가 사장으로 취임하면서부터 개혁을 했어요.” 찾아오는 관람객들을 위해 장소 안내판을 고치고 규격화한 것은 물론, 저녁에는 서초동 주민들을 위해 광장에서 무료 영화를 상영하기도 했다. 주민들도 조금씩 예술의전당에 대한 마음을 열고, 시민들의 발걸음이 이어질 때쯤 강성 노조가 그의 발목을 잡았다. 그의 취임 이후 예술의전당이 너무 빠르게 변화하다 보니, 노조원들의 반발을 산 것이다.
그의 임기가 6개월 정도 남은 시점이었다. 하지만 그는 노조들을 외면하지 않았다. 문화예술 행정가로서 오랜 기간 의견 조율과 협상 과정에 능했던 그는 노조원들 속으로 들어가 사장으로서 진심어린 이해를 구했다.

“임기가 6개월 정도 남은 상황이었는데 콘서트홀 앞에서 노조원들이 꽹과리를 치면서 항의 시위를 벌이는 겁니다. 그래서 그 노조원들한테 가서 30분 정도 시간을 달라고 울면서 호소를 했어요. 그렇게 노조원들과 마주하고 나서 저는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여러분들은 국가의 녹을 먹고 사는 사람들인데 어떤 문제로든 오는 관람객들을 도망가게 만들면 죄인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 문을 닫아야 합니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고 나서 노조원들과 눈을 마주쳤는데 마음속으로 내 말이 맞다는 것을 느낀 듯했죠. 그 이후 백지를 나눠주고 ‘나를 심판해 달라’며 노조원들을 대상으로 투표를 시작했어요. 솔직히 역대 다른 사장들처럼 6대 사장이었던 저도 ‘임기를 채우지 못하겠구나’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제가 47 대 11로 승리했어요. 사장이 노조에게 심판해 달라고 하는 전례가 없었을 텐데 그 자리에서 제가 신임을 받고 3년의 임기를 채울 수 있었습니다.”

예술의전당에서 함께했던 동료들은 그를 잊지 않았다. 이종덕 사장에게 헌정 출판기념회를 먼저 제안한 것이다. 하지만 그는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어 한사코 반대를 했다. 그러다 그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원로 문화예술 CEO에게 후배들이 헌정 출판기념회를 여는 문화를 조성하는데 첫 발판이 되어 달라는 말이었다. 그렇다면 그 역시 극구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예술의전당에 있을 때 부장이나 차장을 했던 분들이 지금 다 공연장 사장으로 계십니다. 그분들이 그 당시의 경험을 잊지 못하고 저와 뜨거운 인연이 되어서 지금은 기관장으로 있으니 자신들이 직접 헌정 출판기념회 형식으로 열어주겠다는 제안을 먼저 했어요. 사실 처음에는 반대를 했는데 ‘이번 헌정 출판기념회의 기록이 시초가 되어서 앞으로 이러한 헌정 출판 기념회가 계속 생길 수 있었으면 한다’는 부탁을 해서, 그런 이야기라면 극구 반대할 이유가 없었죠. 그래서 <공연의 탄생> 출간과 출간기념회를 열게 된 것입니다.”
이번 책에는 그가 문화예술계에서 50년간 활약해 온 다양한 경험담들이 담겨 있다. 문화예술 행정가로서의 노하우는 물론, 예술의전당과 세종문화회관, 성남아트센터와 충무아트홀에 이르기까지 문화예술 CEO로서 문화예술인을 상대하는 방법과 사장으로 취임하는 곳마다 부흥을 이끌었던 비결도 공개된다. 그는 문화예술 분야에서 일을 하고 있거나 이 분야를 준비 중인 후배들에게 좋은 교과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아마 이 책에는 후학들이 배워야 할 내용들이 많이 담겨 있을 겁니다. 저처럼 문화예술 경영자로 활약하고 있는 후배 제자들에게 어떤 경영 마인드로 기업을 운영하고 있는지, 저와는 어떤 관계인지를 쓰게 해서 문화예술 현장의 생생한 이야기는 물론, 윗사람을 모시는 매너까지 알 수 있어서 후학들에게는 이 책이 좋은 경험이 될 것 같습니다.”

그는 여전히 열정적이다. 그래서 지금도 그를 필요로 하는 곳이 많다. 당초 올해로 충무아트홀 임기가 끝나고 단국대 문화예술 대학원장 취임을 준비하고 있었지만, 충무아트홀을 관할하는 서울 중구청장의 간곡한 요청으로 임기를 1년 연장하기로 했다. 그는 1년 동안 충무아트홀을 통해 창작 뮤지컬을 선보이는 것은 물론, 후학 양성의 꿈을 조금씩 준비해 나갈 계획이다.
“저는 열악한 환경에서 문화예술 분야의 일을 해왔지만 2세대 문화예술 경영인이 보다 나은 환경에서 마음껏 꿈을 펼칠 수 있도록 마지막 눈을 감는 날까지 그 길을 먼저 걸어온 선배로서의 소임을 다하고 싶습니다. 또 예술가를 후원하고 사람을 키우는 데 앞장서기 위해 여력을 다할 예정입니다.”

<공연예술계 명사가 말하는 이종덕 사장>

김동호 문화융성위원회 위원장_ 그는 ‘시대의 낭만파’라고 불러도 전혀 손색이 없는 인품의 소유자다. 그는 세종문화회관 시절 몸소 ‘낭만파클럽’을 만들었다. 그는 멋을 안다. 노래도 잘 부르고 춤도 잘 추어 어떤 모임에서든 분위기를 유쾌하게 이끌어 가는 주인공이다. 대한민국에서 무용 공연을 그보다 많이 본 사람을 찾기 힘들 정도로 예술에 푹 파묻혀 한평생을 보낸 인물이다.
영화배우 문희_ 작은 것 하나 놓치지 않고 예술가를 배려하고 응원하는 이종덕 사장님의 모습에서 후배들이 왜 사장님을 공연계의 대부라고 하는지를 알 수 있었다.
연극배우 박정자_ 어디에 있든지 ‘꽃자리’처럼 여기고 그 공간의 의미를 훨씬 더 크고 높게 만들어내는 사람, 우리 모두가 기억하고 추억하는 이종덕 사장님은 바로 그런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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