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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구아이앤씨 구자관 회장의 희망 이정표
삼구아이앤씨 구자관 회장의 희망 이정표
  • 박천국 기자
  • 승인 2014.05.01 07: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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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아웃소싱 업계 최초 상장회사를 꿈꾸다
 

기업의 심벌마크를 보면 기업이 지향하는 바를 한눈에 알 수 있다. 민들레를 형상화한 (주)삼구아이앤씨의 심벌마크는 사람(人)이 눈에 띈다. 무엇보다 인적 자원이 최고의 가치인 아웃소싱 사업의 특성상 사람이 기업 경영의 핵심 요소임을 잘 보여준다.
특히 사람 인(人)자가 얽히고설켜 있는 모습은 ‘아우름’과 ‘어우러짐’이라는 말을 떠올리게 만든다. 이는 자기 혹은 자사 중심의 이익보다는 모든 분야를 아울러 사람과 사람이 어우러짐으로써 ‘더불어 잘 살아야 한다’는 (주)삼구아이앤씨 구자관 회장의 경영 철학과도 꼭 닮아 있는 듯했다.

취재 박천국 기자 | 사진 양우영 기자 | 협찬 에트로

뜨는 해는 잡을 수 있어도 지는 해는 잡지 못한다

구자관 회장은 현재 (주)삼구아이앤씨의 위상에 대해 ‘천지가 개벽한 일’이라고 표현했다. 1986년 사업을 시작한 지 20여 년 만에 창업 초기 연 매출 8천만원을 올리던 회사를 3천500억원의 매출고를 올리는 국내 대표 아웃소싱 업체로 성장시켰기 때문이다. 이처럼 국내 아웃소싱 산업의 초석을 놓은 구 회장은 무엇보다 정직과 신뢰, 그리고 성실을 최우선 가치로 삼았다. 가난과 궁핍, 배움을 향한 열망으로 힘겨운 학창시절을 보내야 했던 그는 절실함과 열정을 유일한 이정표로 삼아 험난한 인생 여정에서 자신만의 길을 구축했다.
희망을 열렬히 쫓던 그가 지금은 누군가에게 희망과 가능성의 이정표가 되어주고 있다.

이재만 어린 시절 가정형편이 어려워 다양한 경험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구두닦이, 아이스케키 장사, 메밀묵 장사, 신문배달 등 안 해보신 게 없다고요.
구자관 글쎄 그게 구차한 이야기라 그 시절 이야기를 즐겨 하진 않아요. 그 시절을 겪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겠지만 다 힘들게 살던 때였으니까요. 7남매가 함께 생활했기 때문에 유난히 불편하긴 했어요. 아버지께서 일찍부터 당시에는 선도적인 사업을 하셨어요.
그 당시 부친께서는 양계 사업에 이어 고무 사업에도 도전하셨는데 한국전쟁 이후 시대적으로 가난했던 때라 번번이 실패를 거듭하셨죠. 첫째 형님은 대학까지 졸업하셨지만, 다른 형제들은 경제적인 문제 때문에 일찌감치 학교 진학을 포기해야 했어요. 저는 8살에 외갓집 인근에 위치한 초등학교에 다녔을 만큼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져 살 수밖에 없던 시절이었어요. 결국 월사금을 내지 못해 초등학교 졸업장도 받지 못한 채 서울에 올라오니 학교를 갈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거예요. 14살이었던 저는 일명 ‘아이스케키 통’을 메고 생계를 위해 뛰어다녀야 했죠. 중학교에 진학한 친구들이 많지는 않았지만 중학교에 못 가는 설움이 매우 컸어요. 계절에 따라 이것저것 다해보니 구두닦이, 아이스크림, 메밀묵, 찹쌀떡 등 안 해본 장사가 없었지요. 그렇게 장사를 하면서 초등학교 졸업장이 없어도 입학이 가능했던 용문고등학교의 야간학교를 갔는데, 그때 그 학교가 아니었으면 저는 무학이 될 뻔했죠. 물론 정상적인 루트는 아니었어요. 야간반에 한해 돈을 주면 입학할 수 있는 구조였으니까요.
그렇게 야간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걸레와 빗자루, 솔 등 청소용품을 만드는 공장에서 일을 병행해야 했죠.

이재만 어려운 형편 속에서도 학업에 대한 뜻을 쭉 간직하고 계시다가 만학도로 국내 최고령 석사학위를 받으셨어요. 공부도 아주 열심히 하셔서 석사논문으로 우수 논문상까지 받으셨다고 들었습니다.
구자관 자랑거리인지 부끄러운 건지 모르겠습니다. 고등학교 겨우 졸업했으니 학교다운 학교를 다녀보는 게 평생의 소원이었어요. 다행스럽게도 용인대학교에서 저 같은 사람이 공부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기 위해 ‘만학도 전형’으로 학생을 뽑기 시작했죠. 그 소식을 듣고 응시했는데, 경쟁률도 3:1로 치열했던 데다 용인시민을 우선적으로 선발하려고 했던 것이어서 탈락 가능성이 높았어요. 인터넷으로 합격자를 발표하는 날에는 밥을 못 먹을 정도로 긴장했었죠. 오후 늦게까지 기다리다가 학교에서 ‘제가 합격했다’고 통보를 해왔어요.

이재만 지금은 국내 아웃소싱 업계 선두주자이지만 처음 청소 사업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어떻게 보면 특별하고, 어떻게 보면 소박하던데요. ‘남들이 하지 않는 청소나 해서 먹고 살자’는 마음으로이 사업을 시작하셨다고요.
구자관 고등학교 졸업하고 할 게 없어서 군 입대를 했는데 제대하고 보니 아버지가 솔 제조 공장을 하고 계셨어요. 하지만 청소용품을 많이 쓰지 않던 때여서 잘 팔리지 않았죠. 당시에는 솔만 있으면 충분한 밑천이 필요하지 않은 구두닦이 장사가 인기였어요. 하지만 좋은 자리는 소위 ‘주먹의 세계’가 장악하고 있어서 아무나 목 좋은 자리를 차지하진 못했죠. 그래서 궁리 끝에 ‘청소라면 누구도 뭐라 하지 않겠구나’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렇게 청소를 시작했는데 마침 1970년대부터 빌딩이 들어서기 시작했죠. 규모가 큰 빌딩은 1970년대 넘어오니 힘이 있는 사람들이 연줄을 동원해서 관리하는 시대가 되기도 했고요. 저는 사업을 시작했지만 남의 집을 청소하는 수준에 지나지 않았어요. 그러다 해창수산이라는 곳에서 청소를 의뢰해 1976년도에 비로소 법인으로 바꿔 청소 사업을 본격 시작했죠. 그래봤자 고령의 여직원 2명과 함께 상황에 따라 청소해야 하는 차장 같은 사장에 불과했지요. 그 당시 같이 일했던 여사님(구회장은 지금도 청소 업무를 맡은 나이 지긋한 여직원에게 ‘여사님’
이라고 부른다)으로부터 대단한 가르침을 받았어요. 그 분이 저한테 ‘뜨는 해는 잡을 수 있어도 지는 해는 잡지 못한다’는 말씀을 해주셨는데 처음에는 그 뜻을 잘 이해하지 못했지만 나중에 그 의미를 깨달았어요. 바로 마감 시간을 지키기 위해 뒤늦게 허겁지겁 할 일이라면 아침 일찍 나와서 일을 시작하면 된다는 것이었어요. 그분 말씀이 진리라는 생각에 그 이후로 지금까지 제가 ‘아침형 인간’이 되는데 큰 계기가 되었지요.

이재만 사업 초창기에 공장 화재로 엄청난 빚을 지고 전신 3도 화상까지 입는 등 너무 힘들어서 극단적인 선택까지 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동안 사업하시면서 숱한 고비가 있었을 텐데 위기를 어떻게 극복하셨나요
구자관 국내에서 거의 모든 청소용품이 생산되었지만, 왁스는 못만들던 때였어요. 묵은 때를 잘 벗겨내려면 왁스가 좋아야 하는데, 제가 그 왁스를 만드는 기술 개발에 성공했죠. 눈썹과 머리카락을 수없이 태워가면서 왁스를 개발한 것이죠. 그러다 왁스 공장에 왁스를 쌓아놨는데 그만 불이 나서 폭발해 버렸어요. 저는 전신의 1/3 정도 3도 화상을 입었고요. 지금 제 피부를 잘 보면 아시겠지만 검게 탄 부분이 이식 수술을 해서 붙인 피부예요. 입에 재갈을 물고 수세미로 화상 후 남은 피부 조직을 떼어내는 매우 고통스러운 치료를 받았어요. 하지만 나중에 학회에 보고될 정도로 빠르게 회복했지요. 1달 5일 만에 퇴원했으니까요. 1982년도에 치료를 마치고 세상에 나오니 빚은 산더미처럼 쌓여 있고, 임금을 받지 못한 몇 명의 직원들은 13평짜리 사무실에 앉아 체불 임금을 달라고 항의하고 있었죠. 당시 8천700만원 정도의 빚에 시달려 자살 시도를 했어요. 돈 없고 가난한데다 빚까지 있는데 육체마저 이렇게 되었으니 ‘살아서 뭐하나’라는 생각에서였죠. 병원과 잠수교에서 두 차례 자살을 기도했지만 결국 모두 실패로 돌아갔고 ‘죽을 운명도 정해져 있구나’라는 깨달음으로 다시 재기에 나설 수밖에 없었죠. 지금도 고맙게 생각하는 건 당시 길거리에 나앉은 우리 가족을 위해 복덕방(부동산) 아저씨들이 빈 집이 생기면 저희 가족들의 임시 거처로 쓰라고 알려주셨던 거예요. 덕분에 1년에 6번 정도 이사 가는 건 다반사였고, 본의 아니게 대저택에 묵은 적도 있어요(웃음).

이재만 어려운 고비를 넘기고 현재까지 업계 1위 자리를 고수하고 있는데, 장기 고객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장기 고객을 확보할 수 있는 비결은 뭘까요
구자관 1980년 후반 들어서 신세계, SK, 현대, 에버랜드 등 대기업뿐만 아니라 서강대, 세종대 등 수없이 많은 대학들로부터 일을 따내기 시작했어요. 한 번 일을 시작을 하면 10년 계약 기간을 유지하는 것이 보통이죠. 거래 액수가 대기업의 경우 적게는 200억에서 많게 는 800억원 규모입니다. 저는 특정 기업의 회장님을 알 리도 없고 집안이 대단하지도 않아서 조금의 커넥션도 없어요. 누군가 저에게 그 비결을 묻는다면 ‘아는 분이 안 계셔서 그런다’고 말씀을 드립니다. 보통 이런 사업은 학연, 지연, 혈연 등 연줄이 없으면 계약을 따내기 힘든데, 저는 그런 것이 없으니 아주 작은 일이라도 주어지면 정말 최선을 다했어요. 열심히 하지 않으면 누군가에게 이 일을 뺏기는 것이 분명했으니까요. 그렇게 업계에서 좋은 평판을 받기 시작하자 관련 담당자가 조금씩 더 큰 일을 주기 시작한 것이죠. 일례로 신세계는 23명으로 시작해 현재 2천300명이 일하고 있고, SK는 58명에서 시작해 현재 2천~3천 명 정도 일을 하고 있습니다.

책임대표사원으로 권위주의 버리고 직원을 높이다

진정한 권위를 얻으려면 역설적으로 권위를 포기해야 한다. 권위는 스스로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타인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구자관 회장은 이러한 권위의 의미를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는 경영인이다. 공식적으로는 회장이나 대표이사의 직함을 사용하기도 하지만, 사내에서는 누구나 그를 책임대표사원으로 부른다.
회사의 창업주로서 예우나 특혜를 기대하기보다 오히려 자신을 낮춤으로써 임직원들을 높이는 ‘낮춤 경영’을 통해 존경받는 CEO다.

이재만 대표이사나 회장이라는 직함 대신 책임대표사원이라는 호칭을 사용하고 계시죠. 좀 생소한데요. 책임대표사원이라는 것이 권한은 없고 무한 책임만 지는 직함이라고 하던데 이 호칭을 쓰는 특별한 이유가 있으실 것 같아요.
구자관 회사에서 일하는 분들은 청소하시는 분, 조리하시는 분, 냉·난방기 수리하시는 분 등등 누구나 관계없이 제가 사용하는 것과 동일한 명함을 가지고 있어요. 저는 이 명함을 정직원에 대한 자격증이라고 말하죠. 어떤 회사도 청소하시는 분에게까지 명함을 제작해 드리지 않거든요. 그분들은 공기와 같은 분들이에요. 청소하시는 분들이 하루만 없어도 화장실을 갈 수 없을 겁니다. 그분들 덕분에 화장실에 가면 기분이 좋을 수 있는 거예요. 그분들한테 사장이네, 회장이네 하면서 대접받으려고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그분들이 아니면 제가 못 먹고 살아요. 바꿔 말하면, 청소하시는 분을 고객사에 보내면 그 직원을 보고 기업을 평가할 수밖에 없어요.
회사가 발전한 이유는 그분들이 성심 성의껏 일을 해주셔서입니다. 제가 일을 잘해서가 아니라, 현장에서 일하시는 분들이 성실히 잘해줘서 삼구의 오늘이 있을 수 있었다고 봅니다. 그래서 삼구에는 9개 회사가 있어서 각 사장이 있는데, 사장님이 많으면 혼동이 있을 수 있으니 회사에서는 누구를 막론하고 저를 책임사원이라고 부릅니다. 제가 무한 책임을 질 테니까 직원들은 아무 걱정하지 말고 주어진 의무와 본분을 다해 달라는 속뜻도 담겨 있죠.

이재만 직원들과의 관계에서 권위주의를 앞세우기보다 소통과 배려를 강조하시는 경영 스타일로 익히 잘 알려져 있는데요. 직원들에게 어떤 경영자로 기억되길 원하시는지 궁금합니다.
구자관 회사 주식의 47%를 직원들이 소유하도록 직원에게 주식을 상당 부분 나눠줬습니다. 직원 중에 형제나 자매, 일가친척이나 친구 등 저와 개인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어요. 중역들은 다 공채 사원이고요. 제 소유가 아니라 그분들의 회사니까 당연한 거죠. 또 제가 갖고 있는 모든 것을 직원들과 나누고 싶은 마음도 있어요. 일주일에 한 번씩 꼭 슈퍼마켓에 들러요. 밀가루, 라면, 달걀 등 식료품 가격이 얼마인지를 알아야 저와 같이 힘들게 일하는 직원들이 ‘이 돈 받아서 어떻게 살까’를 생각할 수 있으니까요. 그러고 나서 물가가 좀 오르면 가슴이 덜컥 내려앉습니다. 이런 것을 고민하고 있다는 사실을 직원들이 조금은 알아줬으면 좋겠어요. 직원들과 함께 아픔을 나누고 같이 걱정해 주면서 모든 면에서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람으로 기억되었으면 하는 바람이죠.

이재만 1만여 명이 넘는 직원들을 거의 대부분 비정규직이 아닌 정규직으로 채용한 것에도 남다른 의미가 담겨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떠신지요?
구자관 현재 정직원 수가 1만4천500명 정도 됩니다. 어떻게 보면 당연히 해야 될 일이에요. 용역회사는 사실 이익을 내기가 쉬운 측면이 있어요. 상당수의 기업이 하루라도 모자라면 퇴직금을 안 주는 곳이 많은데, 저는 근무 기간 6개월만 넘으면 퇴직금을 드립니다. 임시직이나 일용직 없이 4대 보험 다 가입하고 정직원으로 발령해서 명함을 만들어 주기도 하고요. 여러 혜택이 있지만 그중에서 개인적으로는 직원들이 대출을 받을 때 기업 신용도가 반영되니 대출
을 받는 데도 도움이 되고 있죠. 고용주가 반을 부담해야 하는 4대보험이나 용역 계약 시 지급받는 퇴직금으로 만들어지는 이익을 포기한 것입니다. 그분들의 돈을 빼앗아서 얼마나 이익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덕분에 그분들도 이곳에서 존중받고 인정받으며 일한다는 자부심이 남다를 수밖에 없을 겁니다.

이재만 거의 매일 조찬 행사로 시작해서 저녁까지 바쁜 일정을 소화하시는데도 항상 열정적이신 걸 보면 체력은 타고나신 것 같아요.
구자관 지금 나이에도 턱걸이 6개 정도는 무리 없이 할 정도로 건강에는 큰 문제가 없습니다. 팔굽혀펴기는 50~60개 정도 할 정도로 체력이 좋은 편이죠. 매일같이 그 운동만큼은 빼놓지 않고 하면서 체력 관리를 하고 있어요. 아마 어려서부터 잘 단련됐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물론 열정이 있어야 건강도 뒷받침될 수 있는 거라는 생각도 들고요. 특히 조찬 회의는 회사 중역들에게 꼭 가보기를 권하고 있어요. 배우는 것도 많은 뿐더러, 열정적으로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일종의 자극제가 되기를 바라는 의미도 있죠.

이재만 작년에는 사명을 바꾸고 재도약을 준비 중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업계 최초 상장회사가 되는 것일 텐데, 현재 어느 정도 목표한 바를 이루셨는지 궁금한데요.
구자관 2010년도부터 상장을 준비해 왔어요. 하지만 상장을 할 수 있는 조건에서 수익률이 떨어지는 게 문제였죠. 현재까지 계속 실패를 거듭하는 과정에 놓여 있는 셈입니다. 상장회사가 되는 것은 주식을 가진 직원들에게도 큰 의미가 있어서 빠른 시일 안에 현실화시킬 계획입니다. (주)삼구아이앤씨의 주주회사로 삼구의 상장을 준비 중에 있고, 올해 태스크포스로 구성한 상황이어서 내년쯤 되면 주식시장에서 볼 수 있지 않을까 예상하고 있습니다.

부족한 내 것을 덜어주는 진심 어린 선행이 ‘진정한 나눔’

(주)삼구아이앤씨는 매년 그해에 어울리는 캐치프레이즈를 발표한다. 올해는 ‘덕분에’를 회사의 핵심 기치로 삼았다. 임직원들이 함께 모인 회식 자리에서는 입버릇처럼 ‘덕분에’ 건배사가 빠지지 않는다.
‘사장님 덕분에’, ‘과장님 덕분에’, ‘대리님 덕분에’라며 서로 주고받는 감사의 표현을 통해 오늘날 회사가 이룬 성과가 ‘덕분에 가능했다’고 표현한다. 구자관 회장은 ‘덕분에’ 정신을 대외적인 나눔 활동을 통해 행동으로 옮기고 있다. 그는 자신의 봉사는 진정한 나눔이 아니라며 겸손함을 잃지 않았지만, 누군가에게 희망이 되는 선행만으로도 그의 선의(善意)는 많은 기업인들에게 귀감이 될 수밖에 없다.

이재만 중증 시각장애아 교육시설인 인천혜광학교 학생들과 인연을 맺은 이후로 의안 착용 돕기 운동을 하고 계시다고요?
구자관 중증 시각장애인의 교육기관인 혜광학교에서 강연 요청이 왔어요. 아이들이 가장 좋아한다는 햄버거 200여 개를 들고 찾아간 학교에서 교장선생님을 통해 정말 안타까운 이야기를 들었어요.
저는 이미 시신 기증을 하기로 공증까지 한 사람인데, 혹시 각막 기증을 한다면 이 아이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조심스럽게 여쭤봤더니 이렇게 답하시는 겁니다. ‘이 아이들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보지도 못하고 세상을 떠나야 한다’고 말이죠. 얼마나 기가 막히던지 그 아이들 앞에 서서 제가 무슨 말을 해줄 수 있겠습니까. 저에게 1시간 좀 넘게 강연 시간이 주어졌는데 한 30분 정도 울었던 것 같습니다. 중증 시각장애인의 경우 선글라스를 끼지 않으려면 의안이 필요한데 의료보험이 되지 않아 수술비가 비싸요. 그래서 뜻있는 사람들과 함께 의안 수술을 돕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이재만 낮춤 경영을 실천하는 21세기형 CEO이신 대표님의 경영 철학이 궁금합니다.
구자관 정직과 신뢰, 그리고 성실을 최우선 가치로 삼고 사람과 사람이 어우러짐으로써 ‘더불어 잘 살아야 한다’는 것을 경영 철학으로 삼았습니다. 아웃소싱 사업은 사람이 기업 경영의 핵심 요소여서 심벌마크도 사람 인(人)자가 얽히고설켜 있는 민들레 홀씨 모양으로 정하였습니다. 민들레 홀씨가 바람에 날려 멀리멀리 퍼져나가듯이 사람을 중시하는 삼구의 경영 철학이 널리 퍼져나갔으면 합니다.

이재만 회장님의 성공 스토리는 많은 이들에게 귀감이 될 것 같습니다.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주신다면.
구자관 조금은 다른 이야기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많은 사람들이 나이가 들면 아무것도 시작할 수 없다고 지레 짐작하는 경우가 있어요. 저는 56세에 스키를 배우기 시작했고 지금은 수준급 실력을 갖췄어요. 또 61세에 대학교에 입학해서 66세에 대학원에 들어가 석사 학위를 받았고요. 또 65세에는 할리비스데이비슨 오토바이를 타기 시작했습니다. 작년에는 수상스키와 인라인 스케이트를 배워서 타고 있기도 하고요. 이처럼 시작 단계에서 나이에 대한 걱정을 앞세우기보다 새로운 것을 배우고자 하는 열정을 품었으면 좋겠어요. 늦게 시작한다고 못하는 게 아닙니다. 가장 늦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거예요. 지금 시작하면 내일 혹은 내일 모레보다 당연히 빠른 것처럼 말이죠.

이재만 2010년 지식경영대상, 2011년 한국경제를 움직이는 인물 40인에 선정되기도 하셨는데 앞으로는 어떤 계획을 가지고 계신지, 중·장기적인 비전이 있으시면 말씀해 주세요.
구자관 2020년에 1조원 매출을 달성하는 것이 가장 큰 목표입니다. 이 업계에서 1조 매출은 제조업 분야의 20조원 매출과 비등한 수준이에요. 아웃소싱 회사로서 1천억원 매출을 넘기는 것이 불가능해 보였는데, 현재 저희 기업은 3천억원을 넘어서 내년에는 5천억원 매출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회사의 비전은 미국의 엑센추어(ACCENTURE)라는 기업처럼 아웃소싱 회사가 세계적인 컨설팅 회사로 성장할 때만이 가능하다고 봐요. 그게 우리 회사의 비전이고 지속적으로 추구하려는 것이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많은 직원들이 밤낮 없이 일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진행 이재만 변호사 (법무법인 청파 대표)

서울중앙지방법원 조기조정위원, 경찰청 법률고문, 대한체육회 법
률고문, 여성가족부 정책자문위원, 주병진·송일국·주지훈·권영
찬 등 스타 사건 담당 변호사, KBS 여성공감 ‘이재만 변호사의 드
라마법정’, SBS ‘라디오로펌‘ 등 다수 방송 프로그램 출연. 이재만
변호사는 친절하고 명쾌하며 알기 쉬운 법률 해설가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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