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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연 불교여성개발원장이 꿈꾸는 불교의 르네상스
정경연 불교여성개발원장이 꿈꾸는 불교의 르네상스
  • 박천국 기자
  • 승인 2014.05.08 01: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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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연 원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활동가이자 열정가다. 정 원장은 관여하고 있는 단체만도 어림잡아 다섯 군데가 넘을 정도다. 사실 정 원장은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교수로도 유명하다. ‘장갑 작가’로 30여 년 넘게 미술계에 자기만의 고유한 영역을 개척하며 국내외 미술 평단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아 왔다. 때문에 불교여성개발원은 정 원장의 예술가적 감성 경영을 기반으로 대내외적인 활동에 탄력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취재 박천국 기자 | 사진 양우영 기자

불교여성개발원은 대한불교 조계종의 불교계 여성 단체로 지난 2000년 창립된 단체다. 불교계 내부에서도 ‘치마 불교’라는 말이 나올 만큼 여성 불자들의 비율이 높지만, 관습처럼 내려온 성차별적 요소를 줄이고 이를 여성의 눈으로 개선해 나가는 곳이라고 할 수 있다.
2012년 12월 2년 임기로 제7대 정경연 원장(사단법인 지혜로운여성 4대 이사장)이 임명됐다. 정 원장은 미술계에서 먼저 주목을 받은 인물이다. 현재 정 원장은 (사)한국텍스타일디자인 협회 명예회장과 (사)한국니트패션 산학협회 명예회장은 물론, 홍익대학교 산업미술대학원장도 맡고 있다.

성 평등과 불교의 사회 참여 확대에 기여

 
정경연 원장은 “불교여성개발원이 불교 내 여성 권익의 향상을 위해 활동하는 것은 맞지만, 여성과 남성을 함께 아우르는 단체가 되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를 위해 정 원장은 승만경연구회를 비롯해 불교여성연구소, 웰다잉운동본부, 명상리더십센터, 교정교화센터, 불교여성다문화봉사단, 사찰음식문화센터 등을 중심으로 불교와 시회 간 소통의 장을 형성해 나가고 있다.
“웰다잉운동본부에서 중요한 개념 중 하나인 웰다잉(well-dying)이라는 게 사실 웰리빙(well-living)이라는 점이에요. 잘 죽기 위해서 한순간 한순간 웰리빙할 때 웰다잉이 기다리는 겁니다. 명상리더십센터의 경우 청소년 정신 문제나 사회 다문화 가정, 두리모(미혼모)와 관련된 지원 등을 하고 있습니다.”
정 원장은 더불어 사는 삶을 강조했다. 내가 아닌 우리, 우리 가족이 아닌 다른 이웃, 더 나아가 세계 속에 대한민국을 고민해 볼 수 있는 삶의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는 이 같은 깨달음에 대해 불교의 정신이 집약돼 있는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이라는 대승불교의 가르침을 소개했다.
“불교계 여성의 위치를 재정립해서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들과 더불어 살아간다는 뜻의 ‘상구보리 하화중생’의 정신을 실천하고 싶어요. 물론 말로는 쉬운 일이지만 실행하기는 힘든 일일 거예요. 하지만 제가 먼저 마음을 낮추고 인생 공부에 나서면 이러한 활동뿐만 아니라 작업도 깊이 있게 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어요.”
또 불교여성개발원은 2년에 한 번씩 여성 불자 108인을 선정하고 있다. 정 원장은 “국내에서 재능 기부와 사회활동 등을 통해 사회에 긍정적인 변화를 이끌어 온 108인을 선정해 아름다운 사회를 만들어 가는 것이 근본 취지”라고 설명했다.
“불교계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적으로 여성들의 역할이 예전에 비해 많이 늘었고 권익도 신장되었지만, 아직 부족한 부분이 많습니다. 불교여성개발원은 여성에게만 국한된 활동이 아닌 국민이 원하는 불교, 국민이 행복한 불교를 만들어 나가는데 주력해 갈 계획입니다.”
특히 정 원장은 불교여성개발원을 통해 여성들을 위한 광장을 설립할 수 있는 방안들을 모색 중이다. 기독교의 경우 YWCA나 여성회관들이 많은 반면, 불교는 종교적 특성상 여성들이 서로 협력하고 의견을 공유하는 장이 부족한 실정이다. 현재 불교여성 광장추진위원회를 발족한 상태이며, 이를 통해 불교계 여성광장이 만들어지길 정 원장은 염원했다.
“올해 불교여성개발원의 1년 목표 중 하나는 여성광장 관리기금을 활성화해서 불교여성회관을 만드는 것입니다. 불교여성 광장추진위원회라는 이름으로 여성광장이 만들어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고 싶습니다.”

어머니의 애틋한 사랑에서 비롯된 장갑 예술

정 원장은 대학교 2학년 때 결혼과 동시에 유학길에 올라 26세의 나이로 교수가 되었다. 1970년대 중반까지 유학이 흔치 않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정 원장은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하는 타지생활 속에서 빨래 등 허드렛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로부터 소포가 도착했고 그 속에는 특별할 것 없는 면장갑이 들어 있었다.
“40년 전 이야기인데 어머니의 마음으로는 딸이 허드렛일을 하면서 힘겹게 공부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셨는지 한국에서 면장갑을 보내주셨어요. 누런 소포 봉투 곁 면에 메시지도 적어 보내주셨죠. 어머니가 쓴 글에는 ‘허드렛일을 할 때 목장갑을 끼고 일을 하라’고 적혀 있었어요. 그 글을 보니까 고국에 대한 향수와 그리움으로 눈물이 쏟아지더라고요.”
당시 정 원장은 장갑을 껴 보았고, 그 순간 평소 어머니가 강조했던 ‘평등’이 머릿속에 스쳐갔다. 누구의 손이라도 장갑을 끼게 되면 똑같아질 수밖에 없다는 깨달음이었다. 면장갑과 정 원장의 인연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면장갑 하면 떠오르는 게 공사장 인부들의 모습이잖아요. 결국 장갑은 노동의 결실을 이루는 중요한 도구이기도 하고요. 면장갑을 보는 순간 고국에 대한 애정과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이 밀려왔어요. 그 순간 정말 이렇게나 많은 생각을 찰나의 순간에 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교회나 절에서 기도하는 쭈글쭈글한 할머니의 손부터 공사장에서 일하는 인부들의 손까지 수많은 이미지들이 떠올랐죠. 그런데 장갑을 끼는 순간 그 속에서는 어떤 손도 자기 색을 드러낼 수 없기 때문에 모두 똑같은 모습이 되잖아요. 그런 생각을 하니까 어머니께서 말씀하시던 평등사상이 마음으로 깊숙이 와 닿는 느낌이었죠.”
정 교수는 그렇게 화폭에 장갑을 붙여 하나의 예술적 표현 수단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이전 그 누구에게서도 볼 수 없었던 예술 양식이자 미술 장르 간의 영역을 파괴하는 혁신적인 시도였다.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깃든 첫 작품을 우연히 졸업 작품전에 출품하게 되면서 세상에 ‘장갑 작가’의 존재를 알릴 수 있었다. 이후 귀국전에서 선보인 장갑 예술은 한국 미술계에 신선한 충격을 가져다줬다.
“21세기 미술은 재료나 기법이 서로 혼합되어야만 경쟁력이 있다고 생각해요. 저 스스로도 섬유 미술을 근간으로 동양화와 서양화 그리고 판화, 조각까지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정신을 가지고 작업에 임했고, 지금도 초심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아마 유학 시절에 소재나 주제의 재구성이라든지, 조형성 있는 현대 조형 언어로 작품을 표현하기 위해 새로운 시도를 했던 부분들이 오늘의 저를 있게 한 결정적인 요인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그의 작품은 서민적이고 서정적인 향기가 난다. 가장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손을 덮는 면장갑의 의미를 떠올려 보면 작품에서 전해지는 듯한 사람 냄새는 숭고함으로, 다른 이에게 손을 뻗는 듯한 손동작은 인간애의 본질을 떠올리게 한다.


 
정경연의 데뷔는 우리 미술계에 커다란 파장을 일으킨 충격으로 장식되었다. 그의 데뷔전이 열린 198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우리 미술계에서는 순수 미술과 응용 미술이라는 영역 구획이 뚜렷한 편이었다. 회화, 조각을 순수 미술로, 공예를 응용 미술로 분류하였다.
그런데 정경연의 작품은 섬유공예 영역임에도 불구하고 작품의 내용은 도식적인 분류 개념을 타파한 순수한 작품을 지향한 것이었다. ‘전통적인 틀을 과감히 부수고 그럼으로써 우리나라
섬유예술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놓은 것(이연)’이었다. (후략)
- 실존으로서의 장갑, 미술평론가 오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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