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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캡틴, 고마워요 박지성
굿바이 캡틴, 고마워요 박지성
  • 이시종 기자
  • 승인 2014.05.27 21: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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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소탱크’의 전설을 남기다

 
‘영원한 캡틴’ 박지성이 25년 동안 질주해 온 정든 그라운드를 뒤로 하고 마침내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그라운드 위에서 더없이 성실하고 축구 외의 삶에도 열정적이었던 선수. 그는 특유의 성실함으로 자신의 약점과 한계를 뛰어넘어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단 한 줌의 미련도 남지 않은 듯 환한 웃음으로 마지막 작별을 고했다. 고마워요! 캡틴. 굿바이! 캡틴.

취재 이시종 기자 | 사진 매거진플러스·서울신문

“오늘은 제가 선수 생활을 마무리한다는 것을 전하게 됐습니다. 무릎 상태가 다음 시즌을 버티기 어렵다고 판단했습니다. 후회도 안타까움도 없어요. ‘부상만 없었다면’이란 아쉬움만 있을 뿐입니다. 어제(5월 13일)도, 오늘도 눈물은 안 나네요. 선수생활에 미련은 없습니다. 충분히 즐겼고, 많은 사랑을 받았으니까요.”
‘영원한 캡틴’ 박지성이 그라운드를 떠난다. 1990년 수원 세류초 4학년 때 처음 공을 찬 이후 꼭 24년 만이다. 박지성은 5월 14일 수원 박지성축구센터에서 은퇴를 공식 선언했다. 이날 기자회견장에는 박지성을 세계적인 축구 스타로 키운 아버지 박성종 씨, 어머니 장명자 씨, 오는 7월 27일 결혼할 예비신부 김민지 전 아나운서가 함께했다. 은퇴 소감을 말하는 그의 눈가에 눈물은 없었다. 환한 미소와 유쾌한 표정뿐이었다. 힘든 등반을 마치고 돌아와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표정이랄까, 박지성은 세상에서 가장 홀가분한 사람 같았다. 모두가 ‘박수칠 때’ 떠났고, 아름답게 축구인생의 1막을 마무리했다.

고질적 무릎 통증으로 예정된 이별

박지성의 은퇴는 이미 몇 년 전부터 예견됐다. 2011년 1월 카타르 아시안컵을 끝으로 태극마크를 반납한 그는 고질인 무릎 통증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에인트호번 시절 오른쪽 무릎 반월형 연골판 제거 수술을 받은 박지성은 경기가 끝날 때마다 무릎 통증으로 고생했다. 처음 자신을 유럽 무대로 인도한 네덜란드 에레디비지에의 ‘친정팀’ PSV에인트호번에 지난 시즌 임대돼 열정을 불태웠지만 더 이상은 무리였다. 원 소속팀인 잉글랜드 QPR의 구단주 토니 페르난데스 회장과 최근 만나 면담했고, 자신의 상태를 설명했다. 계약기간이 1년 더 남았지만 작별을 택했다.

박지성은 “올해 2월 은퇴를 생각했다”고 했다. 그는 “(에인트호번에서) 한 경기를 뛰면 나흘을 쉬어야 다음 경기를 준비하는 상황이 지속되면서 몸 상태에 의문이 들었다”며 “남은 선택은 은퇴였다” 고 했다. 올해 초 ‘홍명보호’에 합류해 2014브라질월드컵에 나설 수도 있을 것이란 이야기가 나올 무렵, 비록 자신의 입으로 밝히지는 못했지만 박지성은 그때부터 은퇴 계획을 세웠던 셈이다.

‘두 개의 심장, 세 개의 폐를 가진 선수’로 불리며 유럽 빅리그의 중심을 거침없이 내달린 박지성은 2002년 한일월드컵부터 10여 년간 대한민국 축구의 가장 큰 축복이며 기쁨이었다. 유럽축구연맹 (UEFA) 챔피언스리그 본선 한국선수 첫 득점, 한국인 첫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진출(이상 2005 년), 아시아 선수 첫 프리미어리그 우승(2007년), 아시아 선수 첫 UEFA 챔피언스리그 우승(2008 년), 아시아 선수 첫 월드컵 3회 연속 득점 등 화려한 발자취를 남겼다. 유럽 최고의 팀에서 보여준 활약상은 한국을 넘어 ‘변방’에 머물러 있던 아시아 축구의 자존심을 드높였다. 특유의 헌신적이고 도 영리한 플레이로 동료들과 감독, 팬들로부터 두루 신뢰를 받는 선수였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이하 맨유·잉글랜드), PSV에인트호번(네덜란드) 등 클럽과 국가대표팀에서 보여준 숱한 명장면 들은 한국 축구의 역사를 빛낸 최고의 순간으로 기억되고 있다.

‘끈기’와 ‘도전’의 아이콘

“프로 정신, 충성심 그리고 결단력에서 너만큼 신뢰할 수 있었던 선수는 없었다. 영어에 그렇게 빨 리 적응하는 걸 보면 네 의지와 열정이 축구뿐 아니라 삶 자체에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내 손자 는 가장 좋아했던 선수인 널 다른 팀으로 보낸 이후로 아직도 나에게 말을 하지 않고 있다. 지성, 난 언제까지 너를 내 선수 중 하나로 여길 것이다.”
알렉스 퍼거슨 전 맨유 감독은 박지성을 QPR로 이적시키며 박지성에게 이런 내용의 편지를 전했 다. 알렉스 퍼거슨 감독의 편지글처럼 그는 특유의 성실함으로 자신의 약점과 한계를 뛰어넘어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 박지성은 그라운드 위에서 더없이 성실하고 축구 외의 삶에도 열정적인 선수 였다.

박지성의 축구 인생은 ‘끈기’와 ‘도전’으로 요약된다. 박지성의 길이 더욱 빛났던 이유는 오롯 이 노력에 의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타고난 자질도, 체격도 특출하지 않았고 그 흔한 학연, 인맥도 없었다. 왜소한 체구에 평발의 핸디캡을 가진 그를 눈여겨보는 이는 없었다. 하지만 자신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갈고 닦았던 체력과 활동량으로 세계 최고의 무대에서 눈부시게 빛났다. 박지성은 이전 자서전에 “난 그렇게 보잘 것 없는 나의 조건을 정신력 하나로 버텼다”고 쓴 바 있다.
박지성은 초등학교 4학년 때 축구를 시작했다. 6학년 때 유망주들에게만 주어지던 ‘차범근축구대상’을 차지할 정도로 ‘될성부른 떡잎’이었다. 문제는 평발과 왜소한 체격이었다. 아버지 박성종 씨 가 개구리즙 등 각종 보약을 먹인 덕분에 1년 사이 키가 12㎝ 자라기는 했지만 여전히 왜소했던 체 격과 축구선수에게는 치명적인 평발 때문에 박지성을 눈여겨보는 지도자는 많지 않았다.

박지성을 처음 주목한 사람은 허정무 대한축구협회 부회장이다. 2000년 시드니올림픽 당시 지휘 봉을 잡았던 허 부회장은 박지성을 발탁해 태극마크를 안겨줬고, 화려하지는 않지만 헌신적인 플레이로 팬들 머릿속에 자리잡았다. 차츰 팬들 기억 속에서 잊히는 듯했던 박지성은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잠재력을 유감없이 보여줬다. 포르투갈과 벌인 조별리그 최종전에서 강력한 왼발 슛으로 한국을 16강 진출로 이끄는 등 ‘4강 신화’ 주역으로 활약한 박지성은 대회가 끝난 뒤 ‘은사’ 거스 히딩크 감독을 따라 네덜란드 PSV에인트호번에 입단했다.
누구나 꿈꾸는 유럽 무대에 발을 디딘 박지성이지만 시련은 계속됐다. 이적 초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플레이와 무릎 부상 등이 겹치면서 팬들 비난에 시달렸던 것. 야유 속에서도 박지성은 묵묵히 그라운드를 누볐고, 팀에 완벽하게 적응하며 팬들의 찬사를 한몸에 받았다.

2005년 5월 5일 AC밀란과 벌인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 4강 2차전에서는 세계를 놀라게 한 ‘한 방’으로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진출을 향한 기반을 마련했다. 당시 박지성은 전반 9분 벼락같은 슈팅으로 AC밀란 골망을 흔들었고, 관중석에서 이 경기를 지켜보던 알렉스 퍼거슨 전 맨유 감독의 마음을 사로잡아 그해 7월 ‘꿈의 구단’이라 불리는 맨유에 입단했다. 박지성은 맨유에서 7시즌을 뛰며 축구 인생 절정기를 맞았다. 쟁쟁한 선수들의 틈바구니에서 ‘두 개의 심장’이라는 별명을 얻으며 주전 경쟁에서 끝까지 살아남았다. 헌신적인 플레이는 국가대표팀에서도 계속됐다. 박지성은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대표팀 소집에 응했고, 2010년 남아프리카공화국월드컵에서는 주장을 맡아 사상 첫 원정 월드컵 16강 진출 신화를 썼다.

7월에 결혼… 축구 행정가로 축구인생 2막 설계

 
박지성의 ‘현역 고별전’은 에인트호번 멤버로서 수원 삼성(5월 22일 오후 8시ㆍ수원), 경남FC(5월 24일 오후 2시ㆍ창원)와 치르는 친선 경기가 될 전망이다. 또 7월에는 세월호 참사를 추모하는 자선 경기를 연다. 경기를 통해 마련된 성금은 희생자와 유족을 위해 쓸 예정이다.
박지성은 은퇴 기자회견장에서 “오는 7월 27일 결혼식을 올릴 예정”이라고 결혼 날짜도 발표했다. 박지성은 가장 힘든 시간, 묵묵히 곁을 지켜준 김민지 전 SBS 아나운서와 7월 27일 서울 W호텔에서 결혼식을 올린 뒤 당분간 유럽에 머물 계획이다.

축구 행정가로 제2의 축구인생을 개척하기 위해 대학원에서 제대로 공부를 하겠다는 의지도 강하다. 한편 지도자로서의 계획은 없다고 분명하게 선을 그었다.
“지도자를 할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것은 누누이 밝혀 왔습니다. 지도자 이외의 축구와 관련된 일을 하게 될 것 같습니다. 행정가를 꿈꾸고 있지만 정확한 목표는 아닙니다. 어떤 식으로든 한국 축구, 한국 스포츠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기 위해 준비하겠습니다. 또 많은 분에게 받았던 사랑을 어떻게 돌려드릴지 고민하겠습니다.”

박지성 은퇴 소식에 그의 전성기를 함께했던 맨유도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맨유는 이날 구단 공식 트위터를 통해 “미래에 행운이 함께하기를 바라고, 그가 전해준 기억들에 감사하다”고 게재했다. 국제축구연맹(FIFA)도 메인 홈페이지를 통해 “아시아에서 가장 위대한 축구선수가 떠난다”며 박지성의 은퇴를 상세하게 전했다. 또 유럽리그의 처음과 마지막 소속팀으로 남은 에인트호번은 홈페이지 첫 화면을 “Thank you, Ji-sung”이라는 문구와 박지성 사진이 담긴 헌정 화면으로 꾸몄다. ‘초롱이’ 이영표도 트위터를 통해 “내가 은퇴할 때도 들지 않았던 아쉬운 마음”이라고 밝혔다.

박지성의 은퇴 발표 기자회견장 단상 앞에는 박지성이 걸어온 길을 한눈에 둘러볼 수 있는 10개의 유니폼이 걸렸다. 세류초∼안용중∼수원공고∼명지대까지 4개의 아마추어 유니폼과 함께 교토 퍼플상가(현 교토 상가·일본)부터 2차례에 걸쳐 입단했던 에인트호번, 맨체스터 유나이티드-QPR(이상 잉글랜드) 등 5개의 프로 유니폼이었다. 나머지 하나는 특별히 간직해 온, 그래서 모든 유니폼들의 한가운데를 차지한 대한민국 국가대표 유니폼이었다.

아시아 선수 ‘최초 입단’과 ‘최초의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 출전’ 등의 타이틀이 따라다닌 맨유 시절의 임팩트도 엄청났지만 ‘태극전사’ 박지성은 더 특별했다. 특히 대표팀 막내로 겁 없이 뛰며 4강 신화를 이룩한 2002한일월드컵, 주장으로서 사상 첫 원정 16강의 위업을 달성한 2010남아공월드컵은 박지성이 한국 축구에 선물한 가장 아름다운 추억들이다. 이 모든 유니폼에는 그간의 엄청난 땀과 노력이 배어 있다. 박지성의 팬클럽 ‘수시아’가 이날 행사장에 내건 플래카드가 이를 잘 대변하는 듯했다.
‘노력은 영웅을 만들고, 영웅은 전설을 만든다!’

 
박지성이 걸어온 길
1981년 3월 전남 고흥 출생
수원 세류초 - 화성 안용중 - 수원공고 - 명지대
2000년 4월 5일 A매치 데뷔
(아시안컵 1차 예선 라오스전)
2000~2002년 교토 퍼플상가(J리그 2부)
2002년 월드컵 대표
2002~2005년 에인트호번(네덜란드)
2005~2012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잉글랜드)
2006년 독일 월드컵 대표
2010년 남아공 월드컵 대표
2012~2013 퀸스파크(잉글랜드)
2013~2014 에인트호번(임대)
2014 5월 14일 현역 은퇴 선언
프로 통산 321경기 47골, A매치 통산 100경기 13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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