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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승덕 후보 전부인, 박유아 작가 인터뷰
고승덕 후보 전부인, 박유아 작가 인터뷰
  • 박천국 기자
  • 승인 2014.06.04 19: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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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故) 박태준 회장의 차녀, 아버지 그늘 벗고 화가로 우뚝 서다

 
박유아 작가가 개인전을 위해 잠시 귀국했다는 소식을 듣고 삼청동으로 향했다. 공식적인 인터뷰를 거절한 터라 갤러리 분위기만 스케치하려고 했지만, 마침 가족과 식사를 마치고 돌아온 박 작가와 우연히 마주칠 수 있었다. 조심스럽게 사진 촬영과 짤막한 인터뷰를 요청했는데 그이는 환한 웃음을 지으며 흔쾌히 수락했다. 카메라 앞에서 멋지게 포즈를 취하며 “오늘 스타일에 좀 더 신경 쓰고 나올 걸”하고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그이를 처음 만나는 것이었지만 ‘예상과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던 건 분명 포스코 창업주의 딸이라는 타이틀이 만든 허상이나 편견이었으리라. 그이는 누군가가 만들어낸 고정관념을 깨기 위해 아티스트가 된다. 그래서 최근 그이의 작업은 도전적이고 파격적이며 현실 초월적이기까지 하다.

취재 박천국 기자 | 사진 양우영 기자 | 장소협찬 갤러리 옵시스 아트(02-735-1139)

많은 사람들에게 평생 ‘누군가의 딸’로 기억된다는 것은 마냥 명예롭지만은 일은 아니다. 2011년 작고한 포스코 창업주 박태준 회장의 둘째 딸 박유아 작가에게 해당하는 말일 게다. 박 작가는 평소 부친에게 누가 되지 않는 삶에 순응하며 살아왔다. 자신을 드러내지 못한 채 숨죽이며 살아야 했고, 부친이 별세한 지 2년이 다 되어 가지만 지금도 그이는 박유아가 아닌 ‘박 회장의 딸’로 주목을 받는다.
아버지의 그늘에서 좀처럼 벗어날 수 없는 숙명을 극복하기 위해 박 작가는 작년 9월 중순 파격적인 퍼포먼스를 선보인 적도 있다.
국내 한 화랑에서 아버지의 초상화 앞에서 생고기를 자르고 던지는 행위 예술을 통해 그이는 “내 안에 있는 갑옷을 던져버리고 싶었다”고 회상했다. 그만큼 그이를 짓누르는 사회적 시선과 편견의 조각들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의미였고, 또 그 속에서 순응하는 자기 내면을 스스로 깨우치기 위한 일종의 자극으로도 볼 수 있다.
그래서일까. 갤러리에서 만난 그이는 답답한 체증에서 벗어난 듯 상당히 여유로워 보였다. 게다가 자신의 아픈 과거사까지도 스스럼없이 털어놓는 것을 보면 분명 자신이 그토록 애타게 그리워하던 ‘박유아’를 찾은 것만 같았다.

얼굴에 가려졌던 관계의 속성을 이야기하다

박 작가는 1961년 서울에서 출생해 이화여대에서 동양화를 전공했다. 동대학원에서 석사 과정을 밟고 미국에서 유학생활을 시작했다. 미국 하버드대학과 콜롬비아대학에서 공부하였으며 전공 분야인 수묵화뿐만 아니라 세라믹, 메탈, 섬유와 같은 다양한 예술적 도구를 활용하여 조각이나 멀티미디어 설치 예술, 행위 예술까지 그 영역을 확장시켜온 작가다. 1990년 첫 개인전을 뉴욕에서 개최한 바 있으며, 이후 서울, 동경, 시카고, 모스크바 등 국제적으로 다양한 전시 공간에서 개인전을 열어왔다.
세계적인 활동을 펼치는 예술가답게 하버드대학에서 드로잉을 가르쳤을 뿐만 아니라 텍사스 달라스 소재 부룩헤븐대학에서 드로잉 워크숍을 진행한 적도 있다. 특히 미국대학 드로잉 교과서에 박 작가의 드로잉 작품이 실려 주목을 받았다.
‘오르골이 있는 풍경’은 2012년 옵시스 아트에서 ‘르쌍티망-효’라는 주제로 퍼포먼스를 펼친 이후 두 번째 개인전이자 통산 21번째 개인전이다. 전통과 현대, 동양과 서양을 넘나들며 활동해 온 그이가 이번 전시회에서는 사람들과의 관계에 주목했다.
이번 개인전에서는 전통 안료인 분채를 사용하여 전통 종이인 장지에 제작한 채색화 23점을 선보인다. 특이한 것은 모든 채색화에 얼굴이 없다는 점이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미 그린 얼굴 위에다 흰색을 덮어 놓은 것이어서 가까이서 보면 얼굴의 윤곽을 확인할 수 있다. 그이는 작년 9월, 같은 장소에서 선보인 퍼포먼스를 통해 해묵은 내면의 갈등을 극복한 이후 다시 태어난 듯한 기분으로 재차 이곳을 전시장으로 택했다. 누구보다 체면을 중요하게 생각하며 살아온 그이가 모든 작품에 얼굴을 그리지 않은 까닭이 가장 궁금했다.
“작품에 얼굴이 없는 것은 여러 가지 의미가 담겨 있어요. 먼저 드라마를 볼 때 우리가 눈물을 흘리듯이 작품에 감정을 이입해 보라는 거예요. 하얗게 덧그려진 얼굴 위에 자신의 얼굴이나 표정을 투영시켜 보는 거죠. 그러면 그 상황에 내가 들어가게 됨으로써 작품 기법이나 크기 등 작품 외적인 것에 집중하기보다는 작품을 보고 스스로 이야기를 만들면서 작품을 즐길 수 있어요. 또 얼굴이 그려져 있으면 대부분 그 대상에 집중하게 되는데, 얼굴이 없으니 전체적으로 그림을 보게 되고, 그러면 제가 의도한 관계의 의미를 되새겨 볼 수 있죠.”
작품을 멀리서 관망하면 단란한 한때를 그린 그림처럼 보이지만, 앞으로 다가가 그림을 이해하면 관계에 드리워진 명암의 대비되는 이미지나 웃음 속에 감춰진 슬픔의 느낌 등 양립할 수 없는 가치들이 떠오른다. 기존의 관념과 정서를 한 장의 사진처럼 담아낸 듯하지만, 그 안에 전통 가치를 해체하고 재구성해 보려는 작가의 의도도 엿보인다.

▲ 작가에게 익숙한 매체인 노트북 화면 크기(4호)의 작품들을 이번 전시회에서 볼 수 있다

▲ Mr. & Mrs. Koh Ι장지에 분채, 경면주사, 100×72(cm) 2013. 작가는 이 작품을 그리기 위해 이혼이라는 자신의 상처에 다시 손을 대야 했다

▲ Mr. & Mrs. Koh Ⅱ 장지에 분채, 경면주사, 100×72(cm) 2013

특히 이번 개인전은 자신의 가족은 물론, 친구와 이웃들의 사진을 작화한 작품들로 이뤄져 있다. 그이는 자신과 가장 가까운 사람들의 단상을 전면에 부각시켜 따뜻하지만 시니컬한 분위기를 연출해냈다.
“제가 하고 싶은 것을 하되,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이 원하는 것이 돼야 한다고 생각해요. 자기 안에서의 사유, 자기 표현방식에 철저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죠. 제가 저에게 가장 충실할 때 그러한 힘이 나온다고 보거든요. 내 이야기를 얼마나 진솔하게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죠.”
작품을 보면 크기 측면에서 대작이라 할 만한 것이 없다. 전 남편이었던 고승덕 변호사와 부부였을 때 찍은 사진을 작품으로 만든 ‘Mr. & Mrs. Koh Ι’이 그나마 큰 크기에 속한다. 다른 작품들은 대부분 노트북 화면만한 크기가 대부분이다. 그 이유는 단순했다. 그이가 한국 드라마를 보기 위해 자주 펼쳐 놓던 노트북 화면 크기에 익숙해 있던 것이었다.
“평소에 생각이 복잡할 때 누워서 노트북으로 한국 드라마를 보곤 해요. 미국에 있으면 모국에 대한 그리움이 있는데, 한국 드라마를 보면 어느 정도 해소가 되기도 하고요. 아마 그때 한국 드라마를 보는 노트북 화면 크기에 익숙해져서인지 작품 크기가 딱 그만하게 된 것 같아요.”
또 한 가지 주목해야 할 점은 평범한 일상을 드라마의 결정적 장면처럼 표현한 방식이다. 작가는 이를 통해 작품을 한 가지 측면이 아닌, 다양한 관점으로 볼 수 있는 상상의 나래를 펼칠 것을 유도했다.
부부가 앞뒤로 걷는 장면을 보며 앞으로 ‘임자 어여 와’를 외치는 장면을 상상해 본다거나 사무실에 나란히 앉은 부부의 모습을 보며 남편이 아내에게 건넬 만한 말을 추측해 보는 식이다.
“개인전 작품 중에 아버지가 생전 어머니와 산책하는 모습이 담긴 것이 있어요. 작품을 보면 아버지의 뒤를 따라 어머니가 조심스럽게 걸어가시는 장면을 포착한 것인데, 일상적으로 굉장히 평범한 모습일 수 있지만, 드라마를 보듯 어떤 극적인 장치로 그 장면이 사용되었다고 생각해 보면 다음 장면을 연상하는 재미가 클 것이라고 봐요. 결국 제가 개인전을 여는 것은 제 만족이 아니라 관객과 호흡하고 공감하는 과정을 중요시 여기기 때문이에요.”

부친 타계 이후 줄곧 현충원을 찾는 모친

이번 개인전의 테마는 부부다. 한 장의 그림을 통해 관계를 가장 효과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사이가 바로 부부이기 때문이다. 특히 그이는 2011년 12월 타계한 부친의 묘를 찾아 1년 반이 넘게 관계를 유지하려는 모친의 모습을 보며 이번 개인전의 테마를 결정했다.
“이번 개인전의 테마가 부부인 이유는 어머니 때문이에요. 어머니는 아버지가 타계하신 지 1년 반이 넘었는데도 매일 아침이면 현충원으로 아버지를 찾아가세요. 생전에 아버지가 좋아하셨던 달달한 ‘다방 커피’를 가져가 따라드리고 오시죠. 의도와 다르게 어머니의 행동이 다른 사람들에겐 ‘보여주기용’으로 인식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제가 ‘언제까지 하실 거냐’고 여쭤본 적이 있어요. 그러자 어머니가 ‘3년까지는 하겠다’고 답하셨어요. 그런 어머니의 모습을 보며 한 사람이 땅 밑에 있든, 바로 옆에서 살을 맞대고 자는 부부 사이든 여전히 관계는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죠.”
부부는 또 다른 관계를 낳는다. 이른바 ‘부모자식 관계’다. 그이의 작품을 보면 간혹 부부의 아이가 등장하는데 부모와 다르게 아이의 얼굴은 그려져 있다. 흰색으로 여백을 이루는 부부의 얼굴과 달리, 얼굴이 있는 아이를 통해 자식과의 관계는 또 다른 의미임을 암시하려는 것은 아니었을까.

 
1남 4녀 가운데 평소 부친과 성격이나 외모가 가장 닮은 것으로 알려진 박 작가. 그이가 떠올리는 아버지의 이야기가 듣고 싶어졌다.
“흔히들 ‘파쇼’로 생각하지만 제가 본 아버지는 굉장히 민주적인 분이셨어요. 믿기지 않겠지만 한 번도 큰 소리를 내신 적도 없고요. 오히려 눈물도 많고 정도 많으신 분이셨죠. 세간에는 직원들의 ‘조인트’를 걷어찼다는 극단적인 이야기 때문에 아버지가 그런 분으로 알려져 있는 게 안타까울 뿐이죠. 아마도 그 사람이 미웠다기보다 국민의 세금으로 힘들게, 어렵게 세워진 회사의 일을 대강하는 것에 화가 나셨던 것 같아요. 아버지의 삶은 첫째도, 둘째도 부강한 국가였으니까요.”
고위층 자제로 태어나 마냥 풍족하게 살았을 것만 같지만 사실 그이는 엄격한 가풍 속에서 자랐다. 국가를 향해 초점이 맞춰져 있는 부친은 다정다감했지만 외부 시선을 의식해 자녀 단속에 철저해야만 했고, 남편을 보필하는 모친 역시 자녀에게 빈틈을 허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부모님은 다정다감하셨지만 솔직히 어린 시절엔 힘들었어요. 평생을 ‘내가 국가다’라는 마음으로 사셨던 분이니까요. 어쩔 때는 ‘왜 하필 이런 부모 밑에서 태어났나’하는 원망도 속으로 많이 했어요. 아무리 원칙을 강조해도 어느 정도 부모님들에게 빈틈이 있어야 자식이 좀 숨을 쉬는데 어머니 또한 군기 반장 역할을 하셔서 그리 편안했던 삶은 아니었죠. 그리고 우리 가족은 재벌이 아니에요. 아버지도 창업자라고는 하지만 월급 사장이었고, 포스코 주식을 국민주로 바꿀 때도 ‘나는 한 주도 안 갖는다’는 게 그 분의 원칙이셨으니까요.”
그이는 작년 12월 부친의 1주기 추도식을 치른 바 있다. 하지만 카메라 플래시 세례에 아버지를 향한 그리움조차 쉽게 표출할 수 없었다. 그것이 ‘박 회장의 딸’로서 부친의 사후에도 감내해야 할 일었지만, 그이는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다고 회상했다.
“아버지의 1주기 추도식을 치르던 날이었어요. 아버지가 떠올라 가족들 모두가 눈물을 흘리는데 갑자기 사방에서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는 거예요. 추도식 소식을 들은 언론사 기자들이 몰려든 거죠. 그때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어요. ‘아, 우리는 마음 편히 울 수도 없구나’라고 말이죠.”
하지만 그이는 내면의 상처를 예술로 승화시키는 과정을 통해 스스로 치유해 가고 있다. 게다가 하늘의 뜻을 알게 되는 지천명의 나이가 되자 부친이 살아온 인생이 점점 이해가 된다고 했다. 세월이 약이라는 말처럼 그이는 시간에 무뎌진 아픔의 감각들을 또 한 번 세월에 의지해 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작가로서 표현할 수 있는 예술적 미학에 기대 보기도 한다.
지금까지 그이가 터득한 삶의 방식은 그러한 형태의 것이었다.
“나이가 드니까 아버지가 이해되는 부분이 점점 많아지는 것 같아요. 빈틈이 안 보일 정도로 자기 관리가 철저하신 분이셨는데 자식들에게는 관대하셨죠. 허물 많고 허우적대는 저를 항상 가슴으로 품어주신 분도 아버지셨어요. 작년에 ‘르쌍띠망-효’라는 주제로 퍼포먼스를 했는데, 그 이유는 분명했어요. 아버지란 존재가 컸기에 부담감 또한 적지 않았고, 이를 오래 담아 두면 체증이 될 것 같아 작품을 통해 소화하려 한 것이죠. 사람들이 규정하는 나를 던져버리고 새롭게 출발하고 싶은 마음이었어요. 솔직히 이제 단단한 갑옷을 벗고 새출발하는 기분이기도 하고요. 지금까지 제가 갖고 있었던 부담감이나 마음의 무게를 자양분으로 삼아 박유아의 진면목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지하의 아버지도 ‘작가 박유아의 삶’을 항상 응원해 주시리라 믿어요.” -(Queen 2013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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