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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린 들꽃에서 희망을 발견하다
여린 들꽃에서 희망을 발견하다
  • 박천국 기자
  • 승인 2014.06.12 06: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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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환의 미국 거꾸로 보기

지금 이 순간에도 넓은 세상 곳곳에서 생명을 움틔우고 있을 수많은 꽃들. 때로는 경이로움의 대상으로, 때로는 위안으로, 때로는 사랑으로, 때로는 교훈으로 피어나는 꽃들은 그렇게 우리네 인생과 같은 뿌리를 공유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글 박영환(KBS LA특파원) | 사진 유원규

 
가끔씩 산책을 할 때 만나는 들꽃들은 보면 한줌의 흙과 이슬방울만으로도
이토록 강인한 생명력을 움틔우는 것이 때론 대견하게 느껴진다.

#1 꽃에서 삶을 배운다
미국 캘리포니아는 계절이 실종됐다. 겨울에도 태양이 작열하면 반팔 티셔츠가 제격이지만 비가 오거나 구름 낀 날이면 여름에도 한기를 느낀다. 단풍이 드는 나무도 있지만 극히 적고 그 변화도 찰나다. 새싹 돋고 꽃 피고 녹음 우거지고 낙엽 지고 허허로운 가지에 하얀 눈꽃이 피는 계절의 변색이 그립다. 내가 좋아하는 꽃들이 쉼없이 다투어 피는 게 그나마 위안이다. 뜨거운 태양 덕분에 꽃의 색감은 선명하고 향기는 코끝을 찌른다. 스마트폰으로 꽃을 찍어서
트위터(parknews9)에 올리는 일을 즐겼던 나에게 캘리포니아는 무릉도원이다. 계절이 뚜렷한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신기한 일도 많다. 앞마당 백장미는 겨울 넉 달을 빼고는 끊임없이 꽃 봉우리를 밀어낸다. 뒷마당 사과나무는 1년 새 세 번의 꽃을 피웠다. 첫 꽃망울은 어른 주먹 크기의 튼실한 열매를 맺었지만, 두 번째는 대추 크기나무는 열매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데, 다시 꽃을 피운다. 1년 열두 달 푸른 잎을 무겁게 매달고 있으면서 새 옷으로 갈아입을 틈도
없이 새 꽃을 피우는 모습이 안쓰럽다. 사계절은 분명 휴식이고 단절이지만 새로운 생명과 기회를 잉태한다는 점에서 진화이자 진보다. 계절이 사라진 캘리포니아의 삶이 그래서 때론 진부하다. 꽃들도 때론 자신의 삶이 지겨울지도 모르겠다.

#2 꽃이 전하는 ‘이심전심’, 어떤 말보다 강하다
영화 〈보디가드〉에 출연, 한국인에게 친숙한 휘트니 휴스턴이 절명했다. 그래미상 전야제 참석을 위해 머물던 베버리힐스 호텔 방 욕조 안에서 익사체로 발견됐다. 현장에 달려갔을 때 호텔 앞에는 촛불과 함께 장미 꽃다발이 놓여 있었다. 영혼의 울림을 가진 휴스턴의 추모 열기를 매일 밤 9시 뉴스에 전했다.
이틀째 되던 날, 누군가가 모스크바 미국 대사관 담장 위에 붉은 장미를 걸어두었다. 외신 영상을 검색하다가 차가운 눈발 속에 발하는 붉은 빛을 보고 울컥했다. 꽃이 전하는 애도가 사람이 전하는 말이나 표정 보다 더 찌릿했다. 그날 밤 9시 뉴스 리포트 원고에 이렇게 썼다. “전설로 남은 ‘팝의 여왕’을 기리는 추모 열기는 전 세계로 번졌습니다. 흰 진눈깨비 속 모스크바 미국 대사관 담장 위에서는 추모의 장미가 더욱 붉었습니다.”

 
꽃이 전달하는 애절한 느낌은 지난해 스티브 잡스 장례식 취재에서도 느꼈던 터였다. 팔로알토 자택 앞 담장에는 수백 송이의 꽃들로 즐비했다. 어느 지인은 인생이 성공했는지는 죽어서야 결판이 난다고 했다. 마치 자식이 죽은 것처럼 애통해 하며 영전 앞에 국화꽃을 바치는 사람이 다섯 명만 넘으면 대성공이라는 거다. ‘
정승집 개가 죽으면 문상객이 문정성시를 이루지만 막상 정승이 죽으면 문상객이 끊긴다’는 속담도 있고 보면 다섯 명이 그리 만만한 숫자는 아닌 것 같다.

#3 꽃으로 시작해 꽃으로 마감하는 ‘생로병사’ 인생
사람은 죽을 때까지 꽃과 함께 산다. 1999년 12월, 나는 김대중 대통령의 유럽연합 의회 방문을 취재하러 프랑스에 갔다. 출장 중 늦둥이인 덕윤이가 태어났다. 영부인을 비롯해, 여러 사람이 아내에게 축하 꽃바구니를 보냈다. 그로부터 13년이 흘렀다. 이런 꽃 저런 꽃을 보며 산책을 하는데 갑자기 아들이, “내가 태어났을 때 아빠가 곁에 없었다니 섭섭했지만 아빠를 아는 많은 분들이 꽃바구니를 보내 준 사진을 보고 나니까 기분이 나아졌어”라고 말했다. 초등학생이 꽃을 보고 아빠의 간접적인 사랑을 연상하는데 대해 놀랐다.
나도 비슷한 경험이 있다. 앞가림도 못하던 이등병 시절, 어느 봄날 막사에서 1km 떨어진 탄약고로 새벽 경계 근무를 나갔다. 동트기 전 아카시아 향기는 진하다 못해 뜨겁다. 10분 동안 총을 메고 터벅터벅 걷노라니까 아카시아 꽃으로 목걸이를 만들어 건넨, 첫 미팅의 그녀가 살짝 떠오르기도 했다. 깜깜한 밤길에 향기는 후각을 자극했고 뇌파를 가동해 추억을 연상시킨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정호승 시인은 ‘울지 말고 꽃을 보라’는 산문집을 냈다. 그는 “사랑이야말로 인생의 가장 큰 화두”라고 했는데, 그 사랑을 간절히 이어주는 은유적 매개체가 바로 꽃이다. 시인이 말하길, “아가야, 이제 너도 알 거다. 우리가 왜 겨울바람을 참고 견뎌야 했는지를. 우리 매화나무들은 살을 에는 겨울바람을 이겨내어야만 향기로운 꽃을 피울 수 있단다. 네가 만일 겨울을 견디지 못했다면 넌 향기 없는 꽃이 되고 말았을 거야. 꽃에 향기가 없다는 것은 곧 죽음과 마찬가지야.”

#4 여린 들꽃에서 인생을 느끼고 배운다
나는 특별한 일이 없으면 매일 공원을 산책한다. 50m의 폭에 길이가 3km가 넘는데 고압선이 두 줄로 지난다. 가끔 동반하는 아내는 고압선이 흐르는 소리가 난다며 걱정하지만 개의치 않는다. 고압선이 주는 위압감 탓인지 개를 운동시키거나 말을 타고 지나는 사람들만 보일 뿐 한산하다. 화려하고 잘 가꾼 꽃들이 즐비한 골목길 보다 흙이 드러난 거친 산책길이 좋다. 들꽃, 야생화를 늘 만날 수 있어서다.
요즘은 봄철 제주도의 상징, 유채꽃과 인사한다. 야생이라 서 밀집도가 떨어져 화려하지 않지만 향수병을 달래준다. 야생 해바라기도 20m 고압선 아래 태양 같은 꽃을 피웠다. 나이가 들면서 기름진 정원에서 가꾼 꽃 보다 거친 땅에서 결핍을 자양분 삼아 밀어올린 들꽃들에게 더 애정이 간다. 마음만 끌리는 게 아니라 더 아름답게 느껴진다. 저 들꽃도 인간처럼 굴곡진 삶을 견뎌내는구나,

 
동변상련의 심정도 생긴다. 단 한줌의 흙, 이슬방울만으로 충분히 살아가는 들꽃은 분명 꽃을 넘어 인생이다. 야생 유채화는 가슴 높이까지 자라기도 하지만 새끼손가락 크기도 있다. 땅의 상태에 따라 꽃 봉우리를 밀어 올리는 힘에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들꽃을 보면 사회적 화두인 ‘1%와 99%’, ‘자본의 탐욕’이 떠오른다. 그러나 들꽃은 ‘즉자적 불평’을 하지 않는다. 쥐똥나무, 벼룩나물, 개불알 풀꽃, 며느리 밥풀꽃, 할미꽃, 애기똥풀 등 예쁜 이름처럼, 당당하게 살아간다.
어쩌면 이런 들꽃의 마음이어야 세상을 바꾸고 그 싸움에서 진정으로 승리하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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