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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에 학교 짓는 엄홍길 대장
네팔에 학교 짓는 엄홍길 대장
  • 이시종 기자
  • 승인 2014.06.19 01: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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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새로운 최고봉을 향해

 
인간의 한계를 넘어 16좌 세계 최고봉 완등에 성공한 사나이의 미소는 산을 닮아 더없이 넓고 푸근해 보였다. 20여 년의 긴 여정이 끝난 지금, 그는 쉼 없이 새로운 도전을 감행하고 있다. 16좌 완등을 허락해준 산과 그 산을 터전으로 살아가는 네팔 사람들을 위해 오지마을을 중심으로 총 16개의 학교를 짓겠다는 것. 지난 2008년 발족한 홍길 휴먼재단의 이름으로 또 다른 인생 최고봉에 도전하고 있는 그를 만났다.

취재 황정호 | 사진 권오경

 
지난 2007년 5월 그는 네 번의 도전 끝에 히말라야 로체샤르 등정에 성공하면서 16좌 완등이라는 대업을 달성했다. 그후 평생의 숙원을 이뤘기에 이제 조금 편안한 삶을 찾지 않을까 하는 사람들의 생각과 달리 보란 듯 새로운 도전에 나서고 있다. 자신의 이름을 딴 ‘엄홍길 휴먼재단’을 발족하고 네팔에 16개 학교를 짓는다는 새로운 목표를 설정한 것. 사람이 접근하기 수월치 않은 고산지대, 장비와 물자를 나를 수단이 전무한 지역에 학교를 짓는다고 했을 때 많은 이들이 무모한 도전이라며 우려의 시선을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1년 후 그는 해발 4,060m에 자리한 마을 팡보체에 첫 학교를 완공하며 자신의 말이 허언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했다. 산에 도전했을 때의 뚝심과 신념으로 밀어붙인 결과였다. 이후 타르푸에 세운 두번째 학교에 이어 다시 세 번째 학교를 짓기 위해 네팔로 떠나는 그의 얼굴에는 또 다른 각오가 넘쳐흐르고 있었다.

새로운 도전에 몰두하는 나날

“8,000m 산에 도전하는 것만큼이나 쉽지 않더라고요(웃음). 목숨 걸고 산을 올랐지만 이 일도 그만큼의 각오가 필요하더군요. 물론 혼자 힘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하죠. 재단 식구들과 십시일반 작은 정성과 마음을 보태주는 각계각층의 회원들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에요. 그게 참… 산을 오를 때는 산만 생각하고 일대일로 붙는다는 생각이었는데, 이 일은 역시 다르더라고요(웃음). 많은 사람들을 만나 협의해야 하고 일을 진척시켜 나가려면 스트레스가 꽤 커요. 그래도 어쨌든 히말라야가 제게 베풀어준 은혜를 생각하면 살아남은 자로서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일이 생각대로 안 되고 조바심이 날 때도 있지만 어쨌든 산을 오를 때보다야 조금은 수월하죠.”
세 번째 학교 기공식 참석을 위해 출국을 며칠 앞두고 만난 그는 살짝 상기돼 있었다. 한창 세계 최고봉을 향해 도전을 감행하던 시기의 표정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 일을 시작한 지 3년째 접어드는 지금, 그가 이룩한 결과물은 짧은 기간에 비해 대단하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다. 트럭조차 쉽게 도달할 수 없는 네팔 산간 오지마을 두 곳에 헬리콥터와 경비행기로 물자를 실어나르며 학교를 세운 것. 그나마 이제 시작하는 세 번째 학교는 앞서 세운 두 학교에 비해 더 깊은 오지에 자리하고 있다. 한창 속도가 붙은 지금, 처음 학교를 짓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때를 생각하면 새삼 스스로도 대견하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그의 산악 인생에서 처음 잃었던 대원을 떠올리게 된다.
“학교라 해도 우리나라처럼 복잡하게 시설이 많지 않아요. 그저 벽돌과 나무같이 간단한 자재로 만드는 정도죠. 그래도 네팔 현지인들에게는 학교가 생긴다는 것 자체가 꿈 같은 일이에요. 처음 학교를 지은 팡보체는 지구상에서 가장 높은 지역에 위치한 마을이었죠. 그곳에 첫 학교를 지은 이유가 있어요. 제가 히말라야 등반을 처음 시작한 곳이 에베레스트였는데, 두 번의 실패 끝에 등정에 성공했죠. 두 번째 도전을 했을 때 사고로 죽은 대원이 네팔인 세르파 술딤이라는 친구였어요. 이제까지 열 명의 동료를 잃었어요. 물론 모두 다 생각하면 괴롭긴 마찬가지지만, 그 친구는 처음 잃은 대원이었거든요. 그 이후로도 계속 등반을 갈 때마다 유족을 만나 위로하고 안부를 묻다 보니 이젠 가족같이 지내고 있죠. 그 친구가 계속 생각이 나더라고요.”
16좌 완등 후 이미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그지만 학교를 지으면서 네팔 현지의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다. 열악한 생활환경에 어린 나이의 아이들조차 어쩔 수 없이 노동현장으로 투입해야 하는 현실에서 교육은 그들에게 마지막 남은 희망이었던 것. 그의 이 같은 활동은 네팔 정부에도 알려져 대통령까지 감사의 뜻을 전한 바 있다.
“태반의 아이들이 산속 골짜기에서 제대로 된 의료혜택조차 받지 못하고 자라고 있어요. 그 나이 또래의 꿈과 희망을 키울 사이도 없이 부모의 가난을 고스란히 물려받는 거죠. 20년이 넘게 히말라야 산자락을 헤매면서 오랫동안 그들의 삶과 아이들의 순수한 내면을 봐왔어요. 그 아이들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 교육이라고 생각했죠.”

 
팡보체의 학교에는 죽은 술딤의 조카들이 커서 다니고 있다. 그로서는 가슴 한 켠에 응어리처럼 자리했던 빚을 조금이나마 갚은 심정이다. 그러나 아직 끝은 아니다. 아직 14개의 학교가 남았기 때문. 네팔에 다시 학교를 짓기 위한 프로젝트를 시작하며 그의 의욕은 더욱 고조되는 듯하다.
“이번에 학교가 들어설 곳은 석가모니가 탄생한 룸비니라는 지역이에요. 사실은 앞서 두 학교를 지으면서 너무 오지지역에 짓다 보니 힘든 상황이 많이 발생해서 이번에는 수월한 쪽으로 정하자 생각했는데, 오히려 더 오지가 됐네요. 네팔의 한국국제협력단 소장님께서 제가 이런 곳에 학교를 안 지으면 지을 사람이 없다고 하는 바람에 그렇게 됐어요(웃음).”
그러나 경험이 쌓이는 만큼 노하우도 늘었다. 건축자재 구매에서부터 현지인을 고용하는 요령 등 고생이 모두 노하우로 남아 이제는 제법 수월하게 진척되고 있다.
“지금은 모든 게 딱딱 맞아떨어지고 있다”며 흡족한 미소를 짓는 그. 더구나 새로운 도전의 가시적인 성과가 하나 둘씩 늘어나면서 국내 기업들의 관심 또한 높아지고 있다. 특히 세 번째 학교 건립에는 그가 홍보이사로 몸담고 있는 아웃도어 명품 브랜드 밀레에서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했다.
“도움을 준 기업의 이름을 학교에 넣는 방식도 괜찮은 것 같아요. ‘엄홍길 휴먼재단 밀레스쿨’ 같은 명칭이 괜찮겠죠. 기업 차원에서도 이런 일에 도움을 준다는 것은 가장 좋은 환원 사업이 아닐까 생각해요.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건물을 짓는 일이니까요.”
도봉산 기슭에서 자란 어린 시절 산악인 인생에 커다란 방점을 찍었지만 그는 아직도 산이 좋아 멀리 떠나지 못하고 도봉산 자락이 눈앞에 펼쳐지는 서울 우이동에서 살고 있다. 어느덧 반백의 중년이 된 그지만 “지금도 산자락을 헤매고 있다”며 웃는 얼굴에는 아이의 천진함이 배어 나온다. 돌이켜보면 인생의 대부분을 산에서 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의 산 사랑은 지독했다. 어린 시절 의정부 원도봉산 중턱에 자리잡은 집에서 산길을 오르내리며 학교를 다녔다고 하니, 어쩌면 산악인으로서 운명은 그때부터 시작이라 할 수 있겠다.
고등학교 졸업 후 그는 설악산으로 가 희운각대피소에 머물며 2년간 물품을 지어 날라주는 일을 하기도 했다. 그때의 추억은 지금 떠올려도 이루 셀 수 없이 다양하다. 스스로 “산에 미쳐 있었던 시절”이라 할 정도로 설악산 골짜기, 능선 어디에도 그의 발길과 숨결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2∼3일에 한 번씩 30kg이 넘는 짐을 지고 날라야 했던 생활은 이후 그가 산악인으로서 대업을 달성하는 체력의 초석이 된 셈이다. 사서 고생(?)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해군 수중폭파대에 입대해 3년 동안 엄청난 양의 훈련을 소화하기도 했던 그. 고생도 팔자라는 말은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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