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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만드는 미디어 아티스트 정연두
꿈을 만드는 미디어 아티스트 정연두
  • 이시종 기자
  • 승인 2014.06.24 16: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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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거운 성찰로 가볍게 바라보다

 
미디어아티스트 정연두. 혹자는 그를 두고 '꿈의 작가'라고 했다. 그의 작품은 꿈처럼 한편으로는 기발하고, 한편으로는 당황스럽다. 하지만 그를 꿈의 작가라고 부르는 진짜 이유는 다른데 있다. 그의 작품의 중요한 테마가 보통 사람들이 이루고자 하는 '꿈'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최근에 선보인 <무겁거나, 혹은 가볍거나> 전시에도 보통 사람들의 꿈의 냄새가 그대로 묻어났다.

취재 이시종 기자 | 사진 삼성문화재단 제공

'탈경계(borderless)'는 최근 미술계의 가장 큰 화두 중 하나다. 탈경계란 말 그대로 경계를 넘나드는 것이다. 장르를 넘고 표현해낼 도구나 매체도 뛰어 넘는다. 예술과 기술, 예술과 대중문화, 시간예술과 공간예술을 자유자재로 넘나든다고 할 수 있다. 이 혁신적 예술혁명을 시도하는 예술가들은 새로운 시도를 주저하지 않게 했으며, 기존에는 개념조차 없어 정의할 수 없었던 그 '무엇'들을 창조해내고 있다. 삼성미술관 플라토에서 전시되고 있는 정연두 작가의 <무겁거나, 혹은 가볍거나(Spectacle in Perspective)>전(展)은 그런 면에서 다분히 혁신적인 전시다. 이 전시는 대중문화를 예술의 소재로 활용한 기존에 보지 못했던, 그래서 한편으로는 생경하기까지 하다.

▲ '크레용팝 스페셜' 팝저씨라는 문화 현상을 다룬 작품이다.
크레용팝이 예술작품의 소재라고?

정연두 작가는 미술계에서 '제2의 백남준'이라고 불린다. 서울대 조소과와 영국 런던대학을 나온 정연두 작가는 줄곧 도전적인 작품 활동을 하며 미술계에서 가장 각광받는 작가 중 하나다. 2007년 국립현대미술관 최연소 '올해의 작가'로 선정됐고, 2008년 문화체육관광부 '올해의 젊은 예술가상', 2012년 미국 아트앤옥션 선정 '가장 소장가치 있는 50인의 작가'로 꼽혔다. 특유의 온기와 유머, 감동과 재미가 있는 작품을 전개해 온 작가는 뉴욕 현대미술관, 베니스 비엔날레, 상하이 비엔날레 등 국제무대에서도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정연두 작가의 전시 <무겁거나, 혹은 가볍거나(Spectacle in Perspective)>는 국내에서 6년 만에 선보이는 개인전이다. 이번 전시에는 국내에 소개될 기회가 적었던 초기 대표작과 더불어 뉴미디어와 퍼포먼스로 확장된 2점의 신작을 소개한다.
이번 전시에서 가장 눈에 띄는 작품은 '크레용팝 스페셜'이다. 정연두 작가는 걸그룹 '크레용팝'을 작품의 소재로 삼았다. 처음 그가 크레용팝을 작품 소재로 들고 나왔을 때는 전시를 주최한 삼성미술관 플라토 측도 당황했다. 로댕의 역작 '지옥의 문'이 상설 설치돼 있는 품격 있는 전시장에 소위 'B급 감성'을 지닌 크레용팝의 무대와 영상을 설치하는 건 상상치 못한 일이었다. 미술관 측은 "왜 하필 '크레용팝'이냐"며 만류했다.
주최 측 관계자는 "작가가 크레용팝에 대한 작품을 만들겠다고 했을 때 많이 말렸다. 특정 유명 인사나 연예인을 주제로 전시를 기획한 사례가 많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작업에 대한 작가의 열정에 압도돼 결국은 승낙할 수밖에 없었다는 전언이다. 작가는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크레용팝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를 이렇게 말했다.
"크레용팝이 막 데뷔할 즈음 알게 됐어요. 다른 걸그룹과 달리 예뻐 보이기를 포기한 채 헬멧을 쓰고 땀 흘리는 모습이 신선했어요. 다른 아저씨 팬처럼 저도 그들에게 빠져들었고 나중에는 충남 당진에서 열린 응원모임까지 내 발로 찾아가게 됐어요. 춤추는 장면을 찍은 적이 있어요. 동작의 정점을 잡아내기가 쉽지 않았죠. 그래서 춤을 배웠고 박자를 깨우치니 정점이 보이더라고요. 마찬가지로 '팝저씨(크레용팝의 팬클럽 아저씨들을 일컫는 말)'를 따라다니면서 크레용팝을 이해했고 팝저씨들의 팬이 됐어요."
'크레용팝 스페셜'은 팝저씨라는 문화 현상을 다룬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작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꿈을 실현해 주던 키다리 아저씨의 모습을 팝저씨들을 통해 재발견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엄밀히 말하면 크레용팝이 아니라 '팝저씨'라고 할 수 있다.
"팝저씨들의 우렁찬 응원을 접하고 제 선택에 확신이 생겼어요. 30~40대는 사회의 쓴맛과 성공이 쉽지 않다는 것을 충분히 경험한 세대입니다. 이들은 섹시하고 키 크고 예쁘고 노래 잘하는 가수가 아니라 'B급'의 평범하고 여동생 같은 키 작은 가수(크레용팝)를 적극적으로 지지합니다. 이들이 유명해지는 것을 마치 자신들이 유명해지는 것으로 동일시하며 만족감을 느끼는 거죠."
혹자들은 이런 게 무슨 예술이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팝저씨들의 모습을 영상으로 담고, 그들이 만든 추리닝을 벽에 걸어놓고, 크레용팝이 공연할 수 있는 무대를 만드는 것은 그동안 생각해 왔던 '예술'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낯선 경험을 통해 스스로 제한해버린 예술의 범위를 다시금 생각해 보는 것도 흥미로울 듯하다.

▲ '베르길리우스의 통로', 로댕의 '지옥의 문'을 배경으로 발가벗은 인간군상의 파노라마를 3D로 표현했다
3D로 재해석한 로댕의 '지옥의 문'

'크레용팝 스페셜'이 유쾌한 파격이라면 또 다른 전시 '베르길리우스의 통로'는 장엄하고 웅대하다. 바로 로댕의 '지옥의 문'을 배경으로 제작한 첨단 3D 영상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오랜 공을 들여 '지옥의 문'의 인간군상 조각들을 실제 모델들의 포즈로 재현했다. 246개에 이르는 조각을 하나에 수십 장씩 일일이 카메라로 촬영한 후 다시 3D 영상으로 합성했다. 맨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지옥의 문' 앞에 설치된 오큘러스리프트라는 특수 영상기기를 착용하면 발가벗은 인간군상의 파노라마가 펼쳐진다. 작가는 한 인터뷰에서 이 작품을 구상하게 된 계기를 이렇게 설명했다.
"일본에서 만난 한 시각장애인 안마사가 보이지도 않는 자신의 일상을 카메라로 기록하는 모습에서 영감을 얻었어요. 수개월 동안 사진 찍고 포즈를 연구했죠. 로댕의 작가적 깊이와 넓이에 새삼 감동받았습니다. 그의 작품에 비해 내 작품은 가볍고 초라하지만 예술가적 도전이라 생각했어요."
아이디어와 작가적 세공력이 대단하다. 실존하지 않는 가상의 작품을 경험하게 함으로써, '보는 것'의 진정한 의미를 자문하게 한다. 작가는 촬영과 함성에 긴 시간을 요하는 수공작업인 3D 이미지 실사를 통해 37년 동안 고뇌하며 19세기 파리인의 생생한 초상을 통해 시대를 초월한 인간상을 담아낸 로댕의 작업을 오마주하는 한편, 첨단 장비가 보여주는 가상 조각을 통해 스마트폰 등 일상의 범람하는 이미지에 갇혀 현실을 외면하는 우리의 현실을 새롭게 인식하도록 촉구한다.
"전시를 준비하면서 이번만큼 신나고 또 마음이 무거웠던 적은 없었어요. '크레용팝 스페셜'이 외형적으로 가득 차 있지만 뭔가 비어 있는 것이라면 '베르길리우스의 통로'는 반대로 외형적으로는 미미하나 그 안에 인간군상이 핵심이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다."

▲ '상록타워'. 서울 동부에 위치한 임대아파트 상록타워 주민 32가구의 가장 이상적이고 화목한 가정의 모습을 보여주는 가족사진들로 구성됐다
보통 사람들의 삶과 꿈을 작품에 담다

이번 전시에선 정 작가의 초기 작품도 같이 선보인다. 작가의 초기 사진작업들은 '꿈'과 '소망'이라는 주제로 다양한 사회계층의 사람들과의 만남을 시도하고 있다. '영웅'은 현실을 잊고 영화 속의 한 장면처럼 자유롭게 질주하는 동네 자장면 배달부의 모습을 담으며 작가가 다른 이들의 꿈에 관심을 갖게 된 첫 사진 작품이다. 이후 작가는 사람들이 소망하는 미래의 꿈들을 작품으로 실현시키는 '내사랑 지니', 아이들의 상상으로 그린 드로잉들을 현실로 재현하는 '원더랜드'를 통해 다양한 사회계층의 사람들과 만남을 시도했다.
또한 작가는 모두 같으면서도 서로 다른, 서로 다르면서 모두 같은 삶을 살아가는 우리 사회에 대한 관심을 드러낸다. '상록타워'는 서울 동부에 위치한 임대아파트 상록타워 주민 32가구의 가장 이상적이고 화목한 가정의 모습을 보여주는 가족사진들로 구성된 연작이다. 스스로가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이고 화목한 가정의 모습을 연출하는 이 사진들은 아파트의 이름처럼 '항상 푸른(常綠)' 삶을 꿈꾸는 이들의 공통된 소망을 드러낸다.
▲ 도쿄의 번화가 긴자의 명품 브랜드숍 점원들을 촬영한 10점의 사진 연작 '도쿄 브랜드 시티'
도쿄의 번화가 긴자의 명품 브랜드숍 점원들을 촬영한 10점의 사진 연작 '도쿄 브랜드 시티'는 브랜드의 이미지에 맞춰 연출된 점원들의 모습을 통해 사람들의 표면과 내면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을 포착하고, 한 개인으로서 각 인물들의 모습에 주목한다.
비교적 최근작인 '식스 포인츠'는 작가가 디지털 편집기술을 처음으로 시도하며 사진과 영상의 경계를 탐색한 작품이다. 대도시의 삶의 고독과 애환을 주제로 다룬 이 작품은 다양한 민족별 소수자들이 거주하는 뉴욕의 6구역을 배경으로 혼잡한 대도시의 일상을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낯선 풍경으로 연출한다.
밝은 스포트라이트 조명으로 비춘 거리의 모습을 미세한 간격으로 촬영한 수백 장의 사진들을 합성해 완성된 장면과 화면 밖으로 나지막이 들리는 익명의 목소리들은 고국에 대한 회상과 타지에서 살아가는 이민자들의 애환을 들려준다. 보통 사람들의 꿈과 희망을 담는 그를 두고 혹자는 그를 '꿈의 작가'라고 했다.
 
한 인터뷰에서 정 작가는 "보통 사람들을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자세가 아니라 같은 위치에서 눈맞춤하며 사람들에게 말을 걸고 싶다"고 했다. 이 말은 자신의 예술관이 그대로 투영된 것처럼 들린다.
"사람들은 예술가에게 너그러워요. 모르는 사람이 가족사진 찍는다고 하면 아파트 문을 절대 열어주지 않아요. 하지만 예술가가 한다면 열어주죠. 모르는 사람이 꿈 이야기를 해보라고 하면 하겠어요? 그렇지만 예술이라고 하면 이해를 해줘요. 제가 뭐 대단한 사람이라 접근을 하는 건 아닙니다. 제가 별 볼일 없는 예술가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제게 마음을 열고 소통하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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