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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 이시종 기자
  • 승인 2014.06.24 21: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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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환 기자의 거꾸로 보는 미국

 
‘기다림’이란 물리적으로는 시간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뜻하지만 사실 그 속에는 ‘태도’의 중요성이 내포돼 있다. 부지런하고 성실하게, 그러나 조급하지 않게 결실을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인생을 ‘잘’ 살아가게 하는, 또 모든 일에 후회를 남기지 않게 하는 삶의 중대한 비법이다.

글 박영환(KBS LA특파원) | 사진 유원규

#1 인간 세상의 고뇌,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이가 가장 원수(怨讐)’

장면 A: 미국 뉴저지에 살던 20대 청년이 헤어지자는 여자 친구를 차로 치어 살해했다. 목격자들은 격렬한 말다툼이 있은 뒤 여자가 교차로를 건너가자 남자가 차를 몰고 뒤따라가 들이 받은 뒤 전진과 후진을 반복하며 쓰러진 피해자를 적어도 세 차례 짓밟고 달아났다고 증언했다. 1년 이상 사귀어 온 연인의 마지막 순간 치고는 참담하다.

장면 B: 한국의 고교생이 엄마를 살해하고 8개월을 방치했다. 엄마는 늘 새벽까지 공부를 감시했고 성적이 떨어지면 야구 방망이로 팼다. 정신력을 키운다며 굶기기도 했다. 엄마의 기대는 천장이 없었고 아들은 급기야 내신과 모의고사 성적을 조작했다. 전국 60위권 성적표를 내밀어도 1등도 할 수 있다며 매는 더욱 거세졌다.

가장 편안하고 가까운 사람들끼리 ‘원수’가 되는 비극은 인간 세상의 모순이고 고뇌다. 미국 수사기관 조사결과 지난 10년간 수만 건의 살인사건 가운데 60%가 친밀한 관계에서 싹텄다. ‘다른 사람도 아닌 네가 이럴 수 있느냐’는 흥분과 분노를 제어하지 못한 욱하는 인간의 성정 탓이다. 파멸을 부르는 조급증은 나 중심으로 가치를 판단하는 ‘편협성’과 상대의 ‘다름’을 인정하지 않아서 생긴다. 나도 별 수 없는 성질머리를 가졌다.
초등생 아들과 고교생 딸, 아내와 ‘전쟁’을 벌여 가끔은 ‘적’과 ‘원수’가 되는 처지다. 가족이니까 각별하고 특별해야 한다는 절대적 기대감이 때론 뇌관이다. 기대가 큰 만큼 실망도 크다. 사소한 실수와 의견 차이도 불같이 화가 나고 지독하게 미워진다.

#2 3년 만에 꽃 피운 동토의 씨앗에서 ‘인내’ 와 ‘기다림’을 깨닫다

시베리아 연구소가 3만 년 전, 툰드라 지대 동굴 속에 다람쥐가 먹이로 감춰놓은 씨앗을 꽃으로 피워냈다. 동물의 태반과 같은 열매 조직을 뽑아내 배양액에서 키워 땅에 옮겨 심었는데 후손을 만드는 열매까지 맺었다. 가혹한 환경에서 생명을 보존해온 식물의 DNA 메커니즘이 놀랍다. 그 기사를 보는 순간 유쾌한 흥분이 밀려왔다. 수만 년의 긴 잠을 깨운 생명 복원의 기술도 놀랍지만 암흑의 시간을 견뎌온 씨앗의 인내와 기다림, 태산 같은 관조가 기특했다. 아이들의 성적표에 일희일비하던 일, 가족들의 행동이 기대에 어긋났을 때 자초지종을 묻지도 않고, 버럭 소리를 질렀던 모습이 떠올랐다.
내 마음의 넓이가 깨알 같은 씨앗보다 더 작다는 부끄러움이 덮쳐왔다. 동토의 씨앗은 그 누구에게 대가를 바라지 않고 영광의 순간도 확신하지 못했지만 생명 보존의 생래적 목표에 묵묵했다. 그런데 부모들이란 자식이 자신 보다 더 성공해야 한다고 믿고 못 이룬 꿈을 강요하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아내는 여느 엄마와 다른 세상을 산다. 아이들이 원하면 남에게 해가 되거나 공익에 반하는 것이 아니면 무슨 일이든 다 들어준다.
나는 반대다. 복잡다단한 세상을 살면서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더 많기 때문에 욕망을 절제하는 훈련을 시키는 걸 부모의 역할로 여긴다. 가끔은 자식에게 ‘엄격한 간섭과 규제의 칼날’을 겨눌 필요가 있다는 거다. 아내는 “아이들은 태어날 때 그 기쁨만으로 충분한 행복을 줬다”며 부모의 가치관으로 스트레스를 주는 건 좋지 않다고 맞선다.
원칙적으로는 수긍이 간다. 하지만 인간이 부와 권력, 명예, 학식 등 모든 욕망을 텅 비우고 툰드라의 씨앗이나 부처나 예수 같이 ‘대자적(對自的) 삶’을 즐길 수는 없을 터이다.
이익과 효율이 최고의 가치가 돼 버린 신자유주의 시대, ‘1%와 99%’로 표현되는 양극화 시대는 더 그렇다. 어쩌면 존속살해의 비극을 겪은 어머니와 아들도 시대의 희생양이다.

 
 











우리 부부는 딸 지수와 아들 덕윤이가 세상의 욕망을 쫓으며 살기보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인 ‘기다림의 미학’을 아는, 세상을 좀 더 거시적인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는 어른으로 자라길 바란다.

#3 인생은 ‘욕망의 속도’가 아니라 ‘가치의 방향’이 중요하다

상대를 넘어뜨려야 생존하는 승리지상주의가 삶의 주인으로 행세하는 시대다. 이원규 시인은 성능이 좋은 신무기를 손에 쥐어주는 대신 ‘마음의 속도’를 줄이자고 권한다. 적은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 있다는 역설이다.
“시간에 쫓기듯이 살면 그 시간은 더욱 가속도로 빨라지고,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둘러보면 시간도 따라와 아주 오래된 동무가 됩니다. 마음먹기에 따라 시간이 고무줄처럼 늘어질 수도 있다는 것을 눈치 챈 사람이라면 그는 분명 행복한 사람이지요. 단 하루를 살아도 백 년이 부럽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무와 풀과 새들과 대화를 할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과의 차이도 결국은 마음의 속도 때문이지요.”
‘마음의 속도’를 늦추면 ‘욕망의 속도’도 더불어 느려진다는 게 시인의 혜안이다. 자동차 브레이크를 밟듯이 가끔씩 욕망을 제어하자는 충고다. 자동차 속도가 줄면 주변 경치가 눈에 선명해지듯이 욕망을 줄이면 그동안 보이질 않던 행복하고 가치 있는 삶의 방향도 또렷해질 것이다.
가족들과 함께 느리게, 천천히, 여유롭게, 한가하게, 둘러보며, 만만디로 걸으며 낮은 키로 엎드려 풀꽃에게 말을 걸고 소나무도 껴안아 보면 어떨까 싶다.
도종환 시인은 꽃으로 인간의 얕은 인내심을 질타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어디 꽃뿐이랴. 복잡한 이해관계의 그물에서 벌어지는 인간의 삶은 더 깊은 질곡과 고난을 넘어서는 일상의 연속이다. 치즈도 홍어도 김치도 숙성돼야 제 맛이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다. 처음엔 몰랐던 상대의 장점이 세월이 흐른 뒤 보이기도 하고 콩깍지에 덮여 놓친 단점을 뒤늦게 깨닫는다. 연인 간 비극적 살해사건도 결국 ‘욕망의 과속’이 부른 사고다. 연인을 새장에 가두려고 하지 말고, 자식에게 공부만 강요하지 말고, 씨 뿌리고 물주고 거름 주며 묵묵히 결실을 기다리는 농부의 삶에 푹 빠져 보는 건 어떨까.
밥 제대로 짓는데도 기다림이 필요한데 사람의 일에서는 무얼 더 말하랴.

 
3만 년 전, 툰드라 지대 동굴 속에 다람쥐가 먹이로 감춰놓은 씨앗이 시베리아 연구소에 의해 마침내 꽃이 되었다. 이는 과학자들이 살려낸 가장 오래된 생물체의 기록으로 남게 되었다.

사진출처 미국국립과학원 회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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