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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오페라단 이건용 단장의 40년 음악 일기장
서울시오페라단 이건용 단장의 40년 음악 일기장
  • 박천국 기자
  • 승인 2014.06.25 14: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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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곡가 인생 전반에 흐르는 진한 ‘가곡 사랑’

 
40년간 작곡가로 활동해 온 서울시오페라단 이건용 단장에게 음악 인생에 대한 회고는 그 때 그 시절의 기억을 더듬어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나를 하나의 연결선상에서 바라보는 과정이었다. 오래전부터 이어져 온 일관된 음악적 흐름을 통찰하고 자신을 재발견하는 음악인으로서의 사유는 음악 인생 40년을 축하받는 것보다 더욱 즐겁고 가치 있는 일이었다. 그의 음악 인생을 관통하는 가곡을 향한 애정은 시간이 흘러도 잊히지 않는 순수한 첫사랑과 닮아 있었다.

취재 박천국 기자 | 사진 양우영 기자

‘물이 되어 흐르는 아름다운 인연, 좋은 음악.’

이는 그동안 작곡해 온 가곡을 모아 첫 단독 발표회를 열었던 이건용 단장이 인사말 제목으로 쓴 문구다. 음악을 통해 단절되고 파편화된 관계에서 벗어나 유유히 흐르는 물처럼 너와 나를 잇고 우리를 바라보자는 의미를 담고 있다.
40년에 걸친 그의 음악 이력이 담긴 음악회이자 음악적 교감을 나눈 소중한 동료들과의 공연은 그에게는 더없이 소중한 경험이 됐다. 그는 몇 차례나 이번 발표회의 의미에 대해 회고보다는 기록에, 마침표(끝)보다는 느낌표(깨달음)에 가깝다고 강조했다.
1979년 효성여자대학교 음악대학 교수를 시작으로 1983년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교수, 1992년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교수, 2002년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을 역임했던 ‘음악가들의 스승’이 조심스레 음악 일기장을 꺼내 놓았다.

작곡은 음악의 실제와 악보로 완성된다

그는 자신의 가곡을 멋지게 완창해 줄 성악가를 찾기 위해 고심해 왔다. 베토벤의 음악이 수많은 오케스트라의 연주로 계승되어 남아 있는 것처럼 가곡 역시 악보로만 전해지기보다 성악가들에 의해 자꾸 불려야 작곡가가 의도한 곡의 본질에 가까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그는 바리톤 장철을 4년 전 알게 되었고, 그의 노래인 <우리가 물이 되어>, <11월>을 부르는 모습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당시 그는 장철이라는 성악가를 통해 가곡집 음반 제작에 대한 목표를 세울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음악은 악보로 남아 있어서는 불충분합니다. 서양 악보가 뛰어나게 잘 만들어졌지만 악보만으로는 음악을 100% 표현할 수 없거든요. 그 나머지는 연주자가 채워주는 것이지요. 음악의 실제와 악보가 같이 가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든 음악을 소화해서 녹음 형태로 갖고 있는 게 필요하죠. 그런 의미에서 바리톤 장철을 알게 된 것은 이번 발표회를 열게 된 계기라고 할 수 있어요. 제 노래를 부르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한국말을 굉장히 잘 발음하고 시의 내용을 아주 편안하게 전달한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렇게 부르는 것이 분명히 쉽지 않은 일인데 말이죠. 그래서 언젠가 발표회의 기초가 된 노래집 음반을 한 번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그의 대표작 <우리가 물이 되어>처럼 가곡집 음반에 대한 희망을 품자 또 다른 인연을 흐르는 물같이 만나게 됐다. 기타리스트이자 CD 녹음 기술자인 이성우 씨를 알게 된 것이다. 가곡집 완성을 위한 최상의 조합으로 음반 제작 작업은 순조롭게 진행되기 시작했다.
그가 작곡한 35편의 노래 중 남성 성악가가 소화할 수 있는 남성 시인들의 시를 13편 골라 녹음했고 마침내 그의 음악 인생 40년이 담긴 노래집이 완성될 수 있었다.
“노래집이 완성되고 보니 1973년에 제가 처음 작곡한 노래부터 2011년에 만든 곡까지 무려 40년의 음악 이력이 하나의 일기장처럼 정리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음반을 들은 분들이 저에게 ‘마치 나의 청년 시절부터 회고하는 느낌이었다’고 말해 줬어요.
솔직히 음반을 통해 음악 인생을 회고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는데, 다른 사람들의 관점으로 회고의 의미가 부각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번 발표회의 이야기가 나온 건 음반이 나오고 음반 출판 기념회를 구상하던 시기였죠.”
하지만 그는 한동안 발표회를 두고 숙고를 거듭했다. 오랜 기간 교직에 몸담다 35년 만에 정년퇴임을 했던 시기도 문제였지만 다른 작곡가들과 그룹을 이뤄 함께한 음악회에는 수차례 참여했으나 처음으로 갖는 단독 음악회이기 때문에 그 의미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
그러던 중 도움의 손길을 내민 곳은 ‘음악이 있는 마을’이라는 합창단이었다. 그의 합창 작품을 여러 번 초연한 경험이 있는 이 합창단을 통해 그의 음악 발표회가 기획될 수 있었다.
“작년에 정년퇴임했어요. 그 해 1월에 음반이 나왔고 3월 퇴임하면서 음악회를 꾸미려고 하다 보니 뭔가 ‘칠순 잔치’ 비슷한 느낌이 들어서 진짜 회고전이 될 것 같다는 생각에 마음이 내키지 않아 미뤄 두고 있었죠. 그런데 제가 음악 감독으로 활동하면서 두터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합창단에서 선뜻 기획해 보겠다고 나서게 되면서 극장(세종문화회관 체임버홀)을 잡게 됐고 2월 25일에 발표회를 열 수 있었습니다.”

 
나를 향하는 음악은 변하지 않았다

그는 2월에 발표회를 여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자신의 음악 인생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다. 1973년 첫 작품 <고독>이라는 노래와 2004년에 쓴 <눈은 나리네>라는 곡의 흐름이 매우 유사하다는 느낌을 받은 것이 그 출발점이었다.
그는 변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지 고민해야만 했다. 어쩌면 작곡가로서 성장하지 못했다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깊이 있는 음악적 성찰을 통해 소중한 답을 찾을 수 있었다.
“노래집을 녹음하다 보니 1973년에 제가 처음 작곡한 노래와 2004년 쓴 <고독>이라는 곡이 매우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나는 변하지 않았다거나 통 발전하지 않았다, 혹은 그만큼 나에게 독특한 음악 세계가 일관되게 흐른다는 식의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겠죠. 하지만 저는 이렇게 정리했어요. 창작자에게는 ‘나’라는 존재를 드러내기 위한 작품들이 있을 텐데 저 역시 외부로 향한 음악들은 많이 변했어요. 현대 음악이나 민속적인 음악도 시도했고, 종교 음악뿐 아니라 다소 정치적인 색의 음악도 했죠. 그러니까 외부의 관심을 표현하는 메시지를 담은 곡들은 시기별로 다분히 변해왔지만, 그것이 아닌 내 안의 생각과 이야기가 담긴 나를 향한 음악은 변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변하지 않았다는 건 크게 잘못된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음악적으로 고요한 흐름이 있다는 의미에서 기분 좋은 일이었죠.”

그에게는 초연 이후 성악가에 의해 한 번도 가창되지 않은 4곡이 있다.
2월의 발표회에 대해 기록과 정리의 의미를 부여한 것은 그가 만들었던 곡들을 정리하고, 소멸될지도 모르는 곡들을 기록하고자 했던 의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작곡가로서 노래를 만들고 발표하는 수준을 넘어, 곡을 녹음해 전승하는 기록자와 전달자의 역할까지 고려하고 있었던 것이다.
“솔직히 이번 발표회를 하면서 목적을 가지고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한 것보다는 창작 활동을 할 수 없는 나이가 되기 전까지 작곡해 놓은 곡들을 잘 간수해놓는 게 작곡하는 사람의 책임일 것 같아서 ‘챙겨놓는다’는 의미가 큽니다. 그러니까 정리의 의미라고도 볼 수 있죠. 그동안 어떤 노래들은 초연 이후 한 번도 불리지 않았는데 그 곡들을 생산한 제 입장에서는 최선을 다해서 만들었기 때문에 음악적인 생명력이 소멸하기 전에 기록으로 남기는 작업이 필요했던 것이죠. 그런 점에서 볼 때 이번 음악회는 저에게 큰 의미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오페라 공연 늘려 시민들과 더 가까이 호흡하고파

그는 서울시오페라단의 과제가 크게 두 가지라고 했다. 시민들에게 예술적 양식이 되는 영양가 있는 오페라 작품을 많이 선보이는 것과 사립 오페라단이 할 수 없는 공립 오페라단의 역할 강화다. 어쩌면 두 가지가 서울시오페라단의 위상 정립이라는 문제와 맥을 같이하지만, 전자는 문화·예술적인 성격의 강화라면 후자는 공공성 확대와 연관되는 부분이어서 다른 성격을 가진다. 그는 현실적인 재원 부족 문제 등을 지적하며 솔직한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다.
“최근 기획한 오페라 공연 중에 ‘오페라 마티네’라는 것이 있습니다. 해설을 가미해 하이라이트 장면 위주로 공연되는데 오전 11시라는 이른 시간대에 시작해 마티네로 불리죠. 이와 같이 시민들에게 안정적으로 영양가 있는 오페라 작품을 늘 제공해야 하는 것이 서울시오페라단의 중요한 역할입니다. 특히 사립오페라단이 잘 하지 못하는 부분을 해야 하는데, 새로운 작품을 개발한다거나 창작 오페라를 만들어내야 합니다. 고전이나 창작 등을 포함해 오페라 작품이 연간 최소 10편 이상, 최대 20편까지 무대에 올려야 하는 것이죠. 물론 외국에 비해 적은 숫자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 정도라면 오페라단에 대한 평가나 위상도 달라질 것이고, 시민들도 ‘오페라단에는 항상 공연이 열리고 있구나’라고 생각할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하려면 예산과 인력이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이 필요한데, 그 점이 조금 아쉽긴 하죠.”
그는 서울시오페라단을 필두로 공연이 더욱 활성화된다면, 풍부한 인적 자원의 활용도가 높아져 오페라 우수한 예술 인력이 선순환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오페라 무대가 많아져 세계 일류 수준의 성악가들이 국내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게 된다면 오페라 수준의 향상으로 이어져 수요가 창출되고, 문화산업으로서의 오페라 규모 확대가 결과적으로 인재 육성으로도 이어질 수 있다는 전망이다.
“오페라 공연을 늘리는 것은 시민들에게도 필요한 일이지만, 세계 일류 수준에 속하는 성악가들을 위해서도 굉장히 중요한 일입니다. 국내에 있는 굉장히 많은 성악가들에게 무대를 만들어줘야 하는데 그들을 무대에 세워주지 않으면 소중한 인적 자원이 사라지게 될 거예요. 그런 자원을 잘 사용하는 것도 우리의 역할이자 책임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가깝게는 내년이 한일 수교 50주년이 되는 해인데 민간 문화 외교 차원에서 오페라 교류를 기획 중에 있습니다. 또 내후년 정도에는 잠재적인 우리의 인적 자원들인 어린이와 청소년들을 위한 오페라 교육 프로그램이나 공연들을 선보이고 싶습니다. 결국 그들이 오페라 보는 데 익숙해지는 것이 우리 오페라의 미래를 밝게 하는 것이니까요.”

 
이건용 단장은
1974년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작곡과를 졸업하고 1976년 서울대학교 대학원 작곡과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대학 시절 문학과 연극에 심취해 당시 교수들에게 평판은 좋지 않았지만, 이후 그러한 과외 활동이 오페라 가곡을 쓰는 작곡가에게 필요한 섬세함과 성악곡 특유의 감수성을 키우는 밑거름이 될 수 있었고, 극 전개에 따른 음악적 흐름과 강약 조절 등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한다. 2012년부터 세종문화회관 서양음악총괄감독 겸 서울시오페라단 단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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