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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녀 박인숙 관장이 회고하는 아버지 박수근 화백
장녀 박인숙 관장이 회고하는 아버지 박수근 화백
  • 박천국 기자
  • 승인 2014.06.26 16: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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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생 100주년 박수근 화백의 생전 이야기

 
올해로 박수근 화백이 태어난 지 100주년이 된다. 그가 살아 있었다면 올해로 100세가 되는 해다. 박수근 화백은 이 땅에 없지만, 그가 남긴 작품을 통해 작가로서의 생명력은 계속되고 있다. 그의 유족인 장녀 박수근미술관 박인숙 관장을 만나 시대가 재조명하는 박수근 화백의 생전 이야기를 들어 봤다.

취재 박천국 기자 | 사진 양우영 기자 | 작품 사진제공 가나아트센터

미술계에서도 박수근 화백 100주년 기념전에 대한 기대 이상의 관심에 놀라는 분위기다. 기념전이 열렸던 가나아트갤러리 측은 개막 이후 한 달간 4만여 명의 관람객이 다녀갔다고 밝혔다. 이는 하루 평균 1천 명 이상의 관람객이 기념전을 찾은 셈이다.
박수근 화백을 기억하는 많은 사람들의 발길을 보면서 박인숙 관장은 아버지에 대한 자랑스러움과 관람객들에게 감사함을 느끼는 동시에, 생전 고생만 하다 세상을 떠난 아버지에 대한 미안함과 그리움으로 이내 마음이 무거워졌다. 지금은 몇 억원대를 호가하는 명작으로 팔리지만, 박수근 화백 생전에만 해도 그림을 사는 사람이 많지 않아 그의 가족은 항상 경제적 어려움에 처해야 했다.
그런 가슴 아픈 기억 때문인지 국내 경매 최고가로 그림이 팔리거나 기념전이 성황리에 진행돼도 박 관장은 아버지 생각에 마냥 웃음 지을 수 없다고 했다.
“아버지가 순수하게 가난과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정신적인 가치관을 발휘한 것이 지금에서야 살아나 싹을 틔우는 것 같아요. 아버지의 100세 생신을 맞아 많은 분들로부터 아버지의 아름다운 삶이 재조명되며 그것이 헛되지 않았음을 증명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살아계셨더라면 유가족으로서 호강시켜 드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요. 마음 한편으로는 아버지에게 잘해 드리지 못한 데 대한 아쉬움도 큽니다.”

미국인들이 먼저 알아본 아버지의 작품

문화와 예술을 향유하는 수준이 높지 않았던 시절에는 미술작품에 대한 수요가 적을 수밖에 없었다. 박인숙 관장은 아버지의 작품 역시 국내 수요가 없어 선물로 준다 해도 거추장스럽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였다고 회상했다. 그만큼 문화와 예술을 바라보는 수준이 선진국에 비해 크게 뒤처졌던 시기였다. 하지만 박수근 화백의 그림을 접한 미국인들은 한눈에 그 그림의 가치를 파악하고 박 관장이 살던 집까지 찾아와 그림을 사갔다고 했다.
“당시 시대적 상황이 문화적 눈높이가 낮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아버지의 그림이 잘 팔리지 않았어요. 대신 상당수의 미국인들이 아버지의 그림을 접하고 사갔던 기억이 나요. 심지어 우리 집까지 찾아와서 몇 장씩 구입해 간 미국인도 있었죠. 그러다 시간이 지나고 우리나라 사람들도 미적인 눈높이가 향상되면서 아버지의 그림이 한국적이면서도 독창적이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게 된 겁니다.”
박 관장은 아버지의 그림에 대해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이 열심히 끈질기게 살아가는 모습을 포근하고 정겹게 그렸다고 표현했다. 실제로 고향의 흙을 닮아 있는 그림의 질감과 인간을 향한 따스한 시선이 담긴 표현 방식은 박수근 화백 그림의 전형으로 이해된다.
“많은 분들이 아버지의 그림이나 그림이 담긴 액자나 포스터 등을 통해 아버지의 착하고 순수한 영혼이 작품 속에서 살아 숨 쉬고 있다고 느끼시는 것 같아요.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처럼 나이에 따라 명화가 새롭게 느껴지듯, 아버지의 작품도 보면 볼수록 정겹고 포근해요. 마치 어머니 젖가슴냄새나 고향의 흙내음 나는 그리움처럼 아련하고 소중한 추억들도 떠오르고요.”

아버지 타계 후 유작이 유일한 호구지책

박인숙 관장이 21세 되던 해 박수근 화백은 지병에 시달리다 51세를 일기로 소천했다. 출품작의 연이은 낙선 이후 지속된 과음으로 신장과 간이 나빠졌고, 그로 인해 백내장까지 앓아 한쪽 시력을 잃을 만큼 건강이 악화되면서 길지 않은 일생을 마감했다. 박 관장의 말에 의하면, 가장을 잃은 유가족들은 막막할 수밖에 없었다. 집안을 든든하게 버티고 있던 아버지라는 기둥이 사라지자 가세가 기우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호구지책을 걱정할 무렵, 주변 친지들이 주축이 되어 박 화백의 유작으로 전시회를 열고 그림을 판매하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유가족을 돕는다는 의미가 부각되어 너도나도 저렴한 가격에 박 화백의 그림을 사갔다.  박 관장은 “그렇게 생계를 위해 그림을 팔다 보니 결국 집에 있었던 아버지의 유작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고 기억했다.
“당시에 엄마가 취업을 할 수도 없었고 남동생은 고등학생인데다 저는 대학생이었으니까 아버지의 그림을 팔아서 생활하는 것이 유일한 수입이었어요. 그 당시에는 남은 가족들이 먹고 살아야 하는 방책이 아버지의 그림이어서 사주는 분들이 고맙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죠. 최근 들어 아버지의 그림이 수십억 원을 호가하며 팔려나가는데, 전부 유가족 소유가 아니라서 가족들에게 경제적으로는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고 있죠. 다만 그런 평가를 받으면 박수관미술관 명예관장으로서 더 열심히 일하게 되고 아버지의 이름을 빛나게 하기 위해 더 힘쓰게 되는 것 같아요.”

야단과 질책보다 행동으로 먼저 보여준 아버지

박인숙 관장은 아버지의 외양과 성격에 대해 서구적인 체격을 갖추고 있었고 말수는 적었다고 표현했다. 특히 집안에서 말을 좀처럼 하지 않았던 박수근 화백은 아침에 하는 서너 마디가 전부인 정도였다. 식사 후 그림을 그렸던 박 화백은 점심을 먹고 외출을 나가면서 아내가 빨래해 놓은 것을 친정 엄마처럼 개켜놓고 집을 나섰을 만큼 자상했다고 한다.
특히 박 관장은 행동으로 직접 깨달음을 이끌었던 아버지와의 일화를 공개하며 잠시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잔소리나 욕을 하지 않으셨어요. 한 번은 저에게 붓을 빨아가지고 오라고 시키셨는데 그 당시에는 빨래비누로 한참 빨아야 유화 물감을 제거할 수 있었죠. 근데 제가 그 당시에는 어려서 하기 싫은 마음에 몇 차례 대강 물에 빨아서 드렸는데 몇 번 저를 다시 해오라고 돌려보내시다가 ‘수고했다’라며 저를 방으로 들어가게 하셨어요. 그런데 마당에 이상한 소리가 들려서 가봤더니 아버지의 커다란 등이 보였죠. 아버지가 붓을 다시 빨고 계셨던 겁니다. 그렇게 질책이나 야단보다는 가슴 뭉클해지도록 스스로 잘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만드는 것이 아버지의 교육 방식이셨죠.”
박 관장은 시간이 지나도 아버지가 그립다고 거듭 말했다. 이제는 그림과 사진, 그리고 기억으로만 아버지의 그때 그 모습을 떠올릴 수 있지만,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화가의 길을 걷고 있는 박 관장은 그림을 그리며 아버지가 미처 걷지 못한 예술가의 길을 함께 걷는 감상에 젖곤 한다.
“아버지가 정말 그립습니다. 죽음을 앞두고도 걱정하는 가족들에게 ‘내가 죽긴 왜 죽어 걱정들 마라는 말을 남기고 돌아가셨던 분이에요. 저도 나이가 들고 보니 우리 아버지 같은 사람이 이 세상에 또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돼요. 당신은 못 먹어도 자식들을 위해 꼭 군고구마 하나라도 손에 쥐고 들어왔던 아버지, 그 어려웠던 시절에도 쑥스러워 하시며 자식들을 시켜 어머니 생일을 챙겼던 아버지. 저는 아버지의 그림을 보면 아버지가 뭔가 저에게 속삭이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그림을 보고 있으면 아버지가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1959년 창신동 집 마루에서 찍은 사진. 문화재청 청장을 지낸 명지대 유홍준 석좌교수는 이 사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고인에게 결례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로서는 창신동 집 마루에서 아내와 막내딸과 함께 찍은 사진이 가장 박수근의 인간상에 가까운 모습으로 생각하고 있다. 반소매 내의에 양말을 벗고 손가락 깍지를 끼어 양 무릎을 껴안은 채 이쪽을 바라보는 천연스런 자세와 어진 눈빛이 이 사진 배경이 된 그의 작품들에 나오는 인물들과 흔연히 어울린다. 게다가 새로 산 흰 고무신이 마루 위에 잘 모셔져 있어 이 가난한 화가의 맑은 마음씨를 보는 듯하다.”

 
박수근(朴壽根, 1914~1965)은 한국 근현대 미술사에서 가장 한국적이고 서민적이며 독자적인 특성을 지닌 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그가 주로 그렸던 것은 시장 사람들, 빨래터의 아낙네들, 절구질하는 여인 등 평범한 서민의 일상이었다. 따라서 박수근의 작품은 한 시대의 기록으로서도 훌륭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이뿐만 아니라 소박하면서도 특유의 짙은 감성이 묻어나는 작품들은 박수근이 가지고 있던 예술에 대한 생각 즉,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으로 작품을 그려야 한다’는 뜻을 진정성 있게 담고 있다.
1 빨래터 Washerwomen by the Stream, 1959, Oil on canvas, 50.5x111.5cm / 국내 미술품 경매 사상 최고가(45억2천만원)를 기록한 작품이다.
2 시장 사람들 People at the Marketplace, 1950s, Oil on canvas, 77.5x51.5cm
3 고목과 행인, An Old Tree and Women, 1960s, Oil on canvas, 53x40.5cm
4 귀로 The Way Home, 1964, Oil on hardboard, 26.8x34.3cm
5 노인과 소녀 The Old and the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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