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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호 감독과 배우 오광록의 '영화 담론'
이장호 감독과 배우 오광록의 '영화 담론'
  • 박천국 기자
  • 승인 2014.06.26 17: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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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곡점에서 만난 영화계 거장과 개성파 배우

 
1970~80년대 한국 영화계를 주름 잡았던 이장호 감독이 돌아왔다. 이 감독은 주연 못지않은 존재감으로 '명품 조연', '개성파 배우'라는 수식어를 가진 배우 오광록과 함께 영화 <시선>을 완성했다. 감독과 배우로서 전혀 다른 길을 걸어왔을 것 같지만, 이번 영화를 통해 두 사람은 순수한 열정에 목말랐던 영화인으로서 서로 깊은 교감을 나눴다. 두 사람이 호흡을 맞춘 첫 작품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감독과 배우의 시선은 같은 곳을 향하고 있는 듯했다. 폭력적이고 상업적인 이야기로 채워진 영화의 홍수 속에 영혼과 신념의 문제를 다루는 영화가 세상에 빛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긴 동행이었기 때문이다.

취재 박천국 기자 | 사진 양우영 기자 장소협찬 스테이트타워남산 의상협찬 에트로 안경협찬 ㈜이안옵틱 

Part 1. 영화제에서 시작된 인연이 영화로 이어지다

이장호 감독과 오광록은 이 작품 전까지 공통분모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이전부터 두 사람은 만난 적은 없지만 서로에 대해 좋은 감정을 지니고 있었다. 이 감독은 오광록을 '호감이 가는 배우'로, 오광록은 이 감독을 '마음속의 스타'로 기억했다. 두 사람은 2010년 전주국제영화제에서의 만남을 계기로 인연을 맺었다. 하지만 첫 만남에서부터 두 사람은 영화인으로서 동질감을 느꼈고, 그 근원에는 기존 작품에서는 채우지 못했던 갈증과 같은 것이 있었다.

-이재만 두 분은 어떻게 처음 만나게 되셨고, 작품을 함께하기 전에 서로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계셨는지 궁금한데요.
-이장호 2010년 전주국제영화제 때 처음 만났어요. 그때 영화제 뒤풀이로 제 영화 이름과 비슷한 '별들의 고향'이라는 주막에 가게 되었는데 봉준호 감독, 이현승 감독, 배우 박해일 씨와 함께 있다가 우연히 10명 남짓 되는 다른 테이블에 있는 영화인들과 함께 어울리게 됐어요. 그날 오광록 씨를 처음 봤는데, 다른 분들이 조금 취한 상태여서 그런지 덜 취한 오광록 씨와 재밌는 이야기를 많이 나눌 수 있었죠. 그 전부터 영화를 며 광록 씨의 연기를 좋아하고 있었던 터라 당장 영화를 못하는 상황이었지만 무언의 암시를 줬던 것 같아요. 연기가 독특하고 좋다면서 감독으로서 간접적으로 일종의 러브콜을 보낸 셈이죠.
-오광록 감독님은 제 마음 속에서는 스타나 다름없습니다. 20대 초반 연극하던 시절에 <바보 선언>이라는 영화가 있었어요. 오래된 기억이기는 하지만, 시대에 대한 이상한 상징성을 재밌게 그려내 지금도 유쾌한 영화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실험적인 장면들이 나와서 저에게는 신선한 충격을 준 영화였던 것 같아요.

-이재만 사전 검열이 심했던 그 당시에 영화에서 실험적인 기법은 이례적인 일이었을 것 같은데요. 어떤 영화인가요 ?
-이장호 그 당시에는 국산 영화를 장려한다는 게 1년을 4·4분기로 나눠서 매 분기마다 하나의 영화를 만들어야 했죠. 억지로 영화를 만들다 보니 될수록 돈을 들이지 않고 영화를 만들어야 했죠. 한심한 게 <어둠의 자식들> 2부를 만들려고 하는데, 국가에서 그 영화를 국가에 반하는 영화로 생각하고 허락을 안 해줬어요. 이미 3부작을 찍기로 계약해 놓은 상태였는데 사전 검열이 있던 시기여서 영화를 만들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제작자는 영화를 완성하라고 완강하게 버텼죠. 제작자와 정부 사이에서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어요. 이런 영화판에 정말 있을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 그만두겠다는 각오로 영화를 만들다 보니 영화를 만드는 시선이 삐딱해지더라고요. 그래서 정상적으로 영화를 찍지 않고 시나리오도 없이 여태까지 영화를 만들어 왔던 방법과 역행하는 방식으로 만들었어요. 시나리오도 없는 상태에서 배우들에게 길거리 인파 속으로 들어가서 일종의 해프닝을 연출하고, 정상적인 속도로 하면 안 될 것 같아서 '패스팅 모션' 기법으로 찍기도 했죠.
-오광록 감독님만이 하실 수 있는 요즘 말로 표현하면 경제에선 '창조경제'이고 영화로 말하면 '창의영화'가 아닌가 싶습니다.
-이장호 그런데 영화가 완성되는 과정에서 관객들한테 일종의 변명을 해야 될 것 같아 아이디어를 낸 게 영화 시작과 동시에 감독인 제가 옥상에서 떨어져 죽는 모습이 나오는 겁니다. 감독은 이 영화에 대한 책임이 없다는 점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치였죠. 실제로 영화를 2/3 정도 촬영했을 때 그 전에는 영화를 전혀 들여다보지 않다가 편집 기술자가 한 번 만나자고 해서 봤더니 영화가 독특하다는 겁니다. 제가 편집본을 봤더니 정말 엉뚱한 영화가 되어 있더군요. 그러면 이왕 이렇게 된 거 살려보자고 해서 그냥 그동안 찍었던 장면들의 연결점을 찾기 위해 이야기를 간신히 만들어 냈습니다. 당시 제 아들이 초등학교 1학년이었는데 아들의 목소리를 통해 영화를 설명하는 내레이션 방식을 사용했죠. 그러니까 내레이션 시점인 21세기 훗날에 20세기 말을 회상하는 것처럼 구성한 겁니다. 그렇게 해서 영화 시사회를 했는데 영화 상영 15분이 지나자 뒤에서 수군대는 소리가 들리더니 영화 말미에 뒤돌아보니 텅 빈 공간에 제작자만 혼자 머리를 숙이고 고민하는 모습이 보이더군요. 그런데 저와 함께 연출부에서 일했던 후배들 중에 대학생들이 많았는데, 그 당시 후배들이 친구들에게 입소문을 내서 대학교 동아리를 통해 상영이 된 적은 있지만, 그 이후로는 1년 정도 개봉을 못하고 창고에서 썩고 있었죠. 진짜 제 뜻대로 제작자가 포기하는 상태에 이르렀는데 1년 정도 지나서 외국영화 배급에 문제가 생겨서 소위 '땜빵용'으로 제 영화가 개봉이 되었어요. 그런데 놀랍게도 대학생층 관객이 몰리면서 한 달 내내 전 회 매진 사례가 벌어졌죠. 심지어 나중에는 속편까지 준비하라고 했을 정도로 영화에 대한 반응이 뜨거웠습니다.

-이재만 이번에 처음으로 작품을 함께 하셨는데, 그 의미가 남다를 것 같아요.
-이장호 제 영화는 1995년이 마지막이었어요. 그리고 오광록 씨는 1995년 이후에 데뷔를 해서 어떻게 보면 그동안 작품을 같이 할 수 있는 여건이 지지 않았을 수도 있죠. 영화 작업을 하면서 배우에게 존경심을 갖기는 이번이 처음입니다. 그전에는 배우에게 존경한다는 말을 사용한 적은 없었거든요. 오광록 씨는 연기에 대한 자세나 연기력, 그리고 연기자로서 갖춰야 할 모든 게 존경할 만한 것으로 꽉 차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오광록 감독님한테 4년 전에 처음 섭외 제안을 받았어요. 그러고는 지난봄, 3년 만에 소식이 오고 시나리오를 건네받았을 때 감독님은 촬영 준비 때문에 캄보디아로 출국을 앞두고 계셨을 거예요. 저는 시나리오를 읽어볼 것도 없이 매우 기쁘고 가슴이 뛰어서 감독님한테 대뜸 전화를 했죠. 기꺼이 감독님과 함께하겠다고 말이죠. 제가 선택받은 것이 영예로워서 행복했습니다.

 
-이재만 영화진흥위원회와 행정 소송 문제로 3년이나 늦게 영화 촬영이 시작됐는데 그 시간을 오광록 씨가 기다려줬다고 들었습니다. 배우로서 이 작품을 기다린 이유와 오광록 씨가 흔쾌히 출연 제의를 받아들였을 때 감독님께서는 어떤 생각이 드셨나요?
-오광록 4년 전쯤 제천영화제에서 감독님을 뵀는데 그 해 12월에 영화 크랭크인이 예정돼 있다는 말씀과 함께 저를 주인공으로 캐스팅하고 싶다고 하셨어요. 그런데 그 해 가을이 오고 낙엽이 지는데도 아무런 소식이 오질 않았죠. 심지어 겨울이 깊어가고 이듬해 봄이 오고 보니 영화가 많이 늦어지는 모양이다'라는 생각을 하게 됐죠. 그러다 영화에 대해 조금 잊고 있었는데 작년 봄에 영화에 대한 소식을 접했습니다. 순간 '그때 그 영화인가 보다'라는 생각을 했죠. 감독님께서 드디어 시작한다는 것이 반가웠고 그동안 행정 소송에 대한 부분은 전혀 몰랐어요. 시간이 흐르면 어떤 배우를 생각했다가 상황에 따라 그 결정이 바뀌기도 하는데, 시간이 흘렀는데도 저를 다시 선택해 주셔서 다시 한 번 프러포즈를 받은 듯한 느낌을 받았죠.
-이장호 영화 시나리오를 중심으로 한 것이 아니라 오광록이라는 배우가 좋아서 사람을 보고 우선 같이 일하고 싶은 마음이 컸어요. 사실 처음에는 주인공 역할보다는 목사 역을 맡을 가능성이 높았는데 시나리오가 안정되고 캄보디아 촬영 현장에서 많이 의논하면서 인물 성격이나 캐릭터들을 결정했죠.

-이재만 영화감독과 배우로서 각자 오랜 기간 활동하다 보면 각자 자기만의 스타일이 있기 마련인데, 이번에 함께 촬영하면서 호흡은 잘 맞는 편이었습니까?
-이장호 호흡이 매우 잘 맞았고 무엇보다 부담이 없었어요. 전천후로 서로 요구할 수 있고 또 얻을 수 있어 좋았습니다.
-오광록 감독님과 해외에서 촬영하는 시간 동안 깊은 우정을 주셔서 감독님을 사랑하게 됐어요(웃음). 제가 하루 먼저 한국으로 돌아왔는데 스태프들과 뒤풀이할 때 감독님 볼에 뽀뽀를 두 번 정도 하고 '사랑한다'고 말하고 출국했던 기억이 납니다. 제가 관객 수가 100만 명을 넘으면 '감독님 입술을 한 번 훔치겠다'고 말한 적이 있어요. '만약 200만 명이 넘으면 어떻게 할거냐'고 누군가가 물었는데, 저는 더 짙게 입술을 훔치겠다고 농담처럼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이재만 감독님의 복귀작을 위해 많은 영화인들이 자발적으로 도움의 손길을 내민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어떤 생각이 좀 드시던가요?
-이장호 그만큼 내가 약해졌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옛날 같았으면 도와준다고 해도 정중히 사양했을 텐데, 솔직히 지금은 너무도 간절히 그들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재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많은 후배들이 곁에서 돕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요.
-이장호 사실 돕는 정도가 아니라, 강우석 감독의 경우 생존이 위협당할 정도로 저를 도와주고 있어요. 광고비나 마케팅 비용까지 강 감독이 지원해 주고 있으니, 이건 우정과 의리를 넘어섰다고 봐야 해요.
-오광록 이번 영화 <시선>은 부산영화제에 출품이 되어서 초청작으로 네 번 상영이 됐어요. 부산에서 첫 상영되었을 때 강우석 감독과 봉준호 감독이 왔죠. 제가 알기로는 이 감독님이 가장 자주 만나는 술 동무가 봉준호 감독인 것으로 알고 있거든요(웃음). 아무튼 당시 영화에 대한 반응이 뜨거웠습니다. 그 당시에 다른 아주 '핫'한 배급사에서 관심을 가질 때였는데, 그 다음 날 보니까 한 인터뷰를 통해 '직접 배급하겠다'는 의사를 먼저 밝히셨더라고요.

-이재만 강우석 감독님과는 어떤 인연이 있으신가요?
-이장호 강 감독을 데뷔 때부터 눈여겨봤는데 그런 것 때문에 저에 대해 의리를 지키는 것 같아요. 강 감독이 이번 영화를 보고 '역시 영화 좋습니다. 제가 배급을 하겠습니다'는 문자를 보내왔어요. 저는 '강 감독 너무너무 고맙다. 나 울 거야'라는 문자를 보낸 적이 있습니다.


Part 2 물질만능주의 시대에 영혼의 문제를 말하다

영화 <시선>은 표면적으로는 기독교적인 메시지를 담은 영화이지만, ??미를 확장해 보면 인간의 신념과 관련된 이야기다. 자신의 신념과 ??지를 굽혀야 하는 상황이 닥쳤을 때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지에 대?Ø 깊이 있게 생각해 볼 수 있는 메시지를 담았다. 빠르고 자극적인 메½?지가 난무한 이 시대에 영화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영혼과 내면의 ¹?제를 심도 있게 다루고 있는 것이다.

-이재만 그러면 최근 개봉한 영화 <시선>은 어떤 영화인지 소개해 주세요.
-이장호 이슬람 지역에 해외 단기 봉사를 갔던 선교팀이 무장 게릴라한테 피랍되어서 결국은 인질로서 돈하고 구속된 무장 게릴라의 반군을 석방하는 조건으로 거래 인질이 되죠. 그러다 크리스천이라는 게 발각되는데 이슬람 무장 게릴라들은 배교를 하라고 강요합니다.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순교나 배교의 갈등이 놓인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이재만 영화 촬영 과정이 굉장히 험난했다고 들었어요.
-이장호 원래 이슬람 국가에서 촬영을 하려고 했는데 스태프들이 습격당할 위험성 때문에 촬영이 어렵다는 반응이었어요. 한 프로듀서가 아이디어를 낸 것이 불교 국가에서 찍는 것이었죠. 그래서 불교 국가인 캄보디아로 가게 된 것이죠. 이슬람 분위기를 내기 위해서 이스마엘이라는 가상 국가를 설정해 미술부에서 국기를 따로 제작하고 각종 소품들이나 의상 등을 철저한 현지 조사를 바탕으로 대부분 만들어야 했죠.

-이재만 장소 섭외부터 열악한 촬영 현장까지 영화를 촬영하는데 큰 어려움을 겪었다고 들었는데, 어떤 부분이 가장 힘들었는지 말씀해 주세요.
-이장호 어려움은 일상이어서 오히려 쉬운 게 뭐 있나 찾아볼 정도였어요. 사방팔방이 사면초가였고 어려움의 연속이었죠. 풍토병으로 고인이 된 박용식 씨가 당시 저희가 겪었던 어렵고 열악했던 상황을 대표적으로 짊어지고 순교를 해서 가슴이 많이 아픕니다.

-이재만 실제로 국내 한 교회가 이슬람 국가에서 선교를 하다 피랍된 적이 있는데, 그 사건을 모티브로 하고 있는 것인지요.
-이장호 그런 사건이 제가 이번 영화를 연출하는데 피랍된 사람들의 심리 상태나 현지 원주민들과의 교감하는 부분에 있어 상당히 사실적으로 무장시킨 점은 있어요. 영화를 연출하는데 도움을 많이 받은 거죠. 실제 벌어졌던 사건과 이야기 진행은 많이 다릅니다.

-이재만 그러면 이번 영화는 실제 사건을 기반으로 한 영화는 아니라는 뜻인가요?
-이장호 네. 이번 영화에 대한 영감은 일본의 <침묵>이라는 소설에서 나왔습니다. 일본 개화기 때 신부가 천주교를 포교하는 과정에서 악덕 영주한테 붙잡혀 배교를 강요당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죠. 그 소설 마지막 부분을 보면서 영화화하고 싶은 부분이 있었는데, 그 내용을 현대화시킨 겁니다.

-이재만 영화 <시선>을 관객들이 어떤 관점으로 보면 좋을까요?
-오광록 제가 맡은 역할이 아주 낡은 고물 미니버스를 운영하면서 관광객 가이드를 해주고 해외 선교단이 오면 돈을 벌기 위해 중간에서 커미션을 챙기는 날라리 선교사입니다. 실제로 저는 기독교인이 아니지만 누구나 인생을 살아가면서 자기 믿음과 신념이 커다란 장벽을 만났을 때 어떻게 헤쳐나갈 것인지 생각해 보게 만드는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이장호 영화의 제목을 <시선>으로 정한 것은 사람의 시선과 하나님의 시선을 구별하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아까 이야기한 <침묵>이라는 소설 마지막에 신부가 배교를 하는데, 그 배교는 결국 사람을 살리기 위한 선택이었습니다. 일본인 영주가 가톨릭 신자가 된 일본 사람들을 신부 앞에서 죽였으니까요. 영주가 죽어가는 사람을 보는 게 사랑이냐며 비아냥거리면서 예수 초상의 동판을 밟고 지나가면 살려준다고 합니다. 신부가 결정을 못하고 신에게 기도를 하는데 신은 침묵하죠. 신부가 너무 괴로워서 배교할 생각을 하는데 그때 메시지가 전해집니다. '나를 밟아라. 나는 이 땅에 사람들에게 밟히기 위해서 왔다'라고. 그래서 이 사람이 울면서 동판을 밟았는데 그 행동이 교황청에 보고되어 신부는 파문을 당합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일본에 남아서 아이를 낳게 되고 자기 신념대로 계속 가톨릭을 전파하며 살아가요. 사람의 시선이 교황청에서 신부를 파문한 것이라면, 하나님의 시선은 그걸 넘어서 신부였던 사람이 결혼 후 아이를 낳고 위험을 무릎 쓰고 가톨릭을 전파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독교인들에게 제사나 형식에 치우칠 게 아니라, 알맹이가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싶었어요.

 
이재만 변호사 (법무법인 청파 대표)
서울중앙지방법원 조기조정위원, 경찰청 법률고문, 대한체육회 법률고문, 여성가족부 정책자문위원, 주병진·송일국·주지훈·권영찬 등 스타 사건 담당 변호사, KBS 여성공감 '이재만 변호사의 드라마법정', SBS '라디오로펌' 등 다수 방송 프로그램 출연. 이재만 변호사는 친절하고 명쾌하며 알기 쉬운 법률 해설가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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