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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재 정선과 단원 김홍도의 화풍 비교-미술인문학
겸재 정선과 단원 김홍도의 화풍 비교-미술인문학
  • 이시종 기자
  • 승인 2014.07.03 10: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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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vs '눈‘으로 그린 그림

 
한국 미술을 대표하는 양대 산맥이라 할 수 있는 겸재 정선과 단원 김홍도의 화풍을 알아보는 미술인문학 강의가 지난 5월 30일 겸재 정선 기념관에서 있었다. 겸재 정선에 대한 연구에서 정평이 난 명지대학교 문화예술 대학원장 이태호 교수가 강의한 겸재 정선과 단원 김홍도 화풍 분석.

글 이선용(독문학 박사, 문화칼럼니스트sunny658@hanmail.net)

“관료 출신, 감성의 화가 정선 겸재 vs. 도화서 화원 출신, 오성의 화가 단원 김홍도”

겸재 정선(1676-1759)과 단원 김홍도(1745-?)가 활동한 시기는 영,정조 시대로 조선의 르네상스 시기였다. 겸재는 자연 그대로의 진경산수(眞景山水)를 그리기보다는 자신의 마음에 느낀 대로 성리학적 이상을 표현한 감성(感性)의 화가이다. 반면, 단원은 현실을 눈에 보이는 대로 극사실적으로 묘사한 오성(悟性)의 화가로 일컫는다.
겸재는 화가이면서 고위 관료였다. 70세까지 양천 현령을 지냈고 장수를 예우받아 종2품을 하사받았으며 사후에는 한성판윤(서울시장)으로 추증되었다. 그가 그림에 몰두하여 진경 작품을 그린 시기는 1760대 후반에서 1770대 중반이다.
반면, 단원은 도화서 화원 출신으로 가문이 무관이면서 관아에 물건을 납품하여 부를 누렸다. 단원의 스승이었던 표암 강세황은 단원을 평하기를 ‘자연의 조화를 빼앗을 정도로 잘 그려 예전에는 이런 솜씨가 없었다’라고 극찬했으며, 그는 ‘신필(神筆)’로 불리기도 했다.

겸재 정선-마음을 담아 그린 진경(眞景)

겸재는 눈에 보이는 대로 그리는 중국 산수화풍이 대세이던 때, 실경보다는 마음을 담아 그림을 그렸다. 이러한 겸재의 그림은 조선 땅의 아름다움을 표현함에 있어서 관념미에서 현실미로 바뀌는 과도기적 특징으로 볼 수 있다. 겸재의 <박연폭포>는 다른 화가들의 박연폭포 그림과는 완전히 다르다.
이처럼 겸재는 실제 경치를 표현할 때 폭포의 리얼리티를 담기보다는 그림에 장쾌한 폭포 소리를 담는 방식을 추구했다. 겸재는 경치가 뛰어난 명승지를 그릴 때 그대로 옮겨 담지 않고 독창적(표현 대상을 중앙에 부각시키거나 전경을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부감법을 사용하는 등)으로 재구성했다.
겸재의 시각은 신선경의 맑은 숲과 샘의 마음인 ‘임천(林泉)의 마음’으로 대상에게 다가서야 가치가 커지고 교만과 사치의 눈으로 보면 값이 떨어진다는 곽희의 ’산수 보는 법‘과 일맥상통한다.
<박연폭포>의 장쾌한 폭포소리나 <만폭동도>의 자글거리는 개울소리, <금강전도>의 만이천봉을 감도는 바람소리가 느껴지는 원형 구도. <인왕제색도>에서 소나기 내린 이후 암벽의 모습을 실감나게 구성한 겸재의 이미지 구성력은 조선 풍경을 예술적으로 승화시킨 진경산수화의 완성자라 할 수 있다.
 
단원 김홍도-실경과 닮게 그리는 것이 선(善)

남인 실학파인 성호 이익(1681-1763)은 ‘형상을 닮지 않고 어찌 정신을 담아낼 수 있는가’라고 주장했고, 표암 강세황은 ‘산천을 초상화처럼 꼭 닮게 그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처럼 실경과 닮게 그리는 것이 선(善)이라는 주장은 단원에 이르러 찬란한 결실을 보게 된다.
단원의 진경산수화는 금강산 일대를 여행하면서 스케치한 후, 화가가 서있는 위치에서 바라본 대로의 형상을 화폭에 담았다. <총석정도>,<옥순봉도>,<소림명월도>가 그 좋은 예이다. <소림명월도>는 달밤에 사립문 밖 풍광을 마치 렌즈의 뷰파인더로 본 듯 평범한 대지의 아름다움을 표현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더욱 크다.
실제로 단원의 그림은 현장 답사한 사진과 비교해도 거의 일치하는 구도를 보여준다. 단원은 특히 먹을 사용하는 농담(濃淡) 조절에 탁월했다. 단원의 진경 화법은 대상의 실제 모습을 그만의 방식으로 인식해 정확하게 그렸다는 의미에서 근대화풍의 선구자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단원의 이러한 화풍은 계속 이어지지 못하고 문인화풍에 자리를 내주고 만다.
이후 눈에 비친 대상보다는 심상(心象)을 표현하는 추사 김정희(1786-1856)의 문인화풍이 대세를 이루어 조선 화단의 르네상스가 막을 내리고 정치권도 소용돌이치는 시기가 도래하게 된다.  
 
겸재의 <계상정거>(1746)
겸재의 그림 중 <계상정거>를 보여주면서 어디서 많이 본 그림이 아니냐는 교수님의 물음에 거의 답을 못하던 중에 어디선가 ‘천원짜리 화폐에서요’라는 답이 나왔다. 그리고 모두가 지갑에서 천원을 들고 화폐와 그림을 서로 견주면서 살펴보았다. 양천 현령을 그만둔 해에 그린 작품으로, 원래 하나의 시점에선 전경을 화면에 다 담을 수 없는데 겸재는 마음으로 그리는 특징을 발휘했다.

<강의 및 자료 제공>
이태호(명지대학교 문화예술 대학원장)
문화재청 위원 역임, 우현 고유섭학술상 수상. 주요 저서로는 <옛 화가들은 우리 얼굴을 어떻게 그렸나>, <옛 화가들은 우리 땅을 어떻게 그렸나>, <한국미술사의 라이벌> 등이 있다. 한국미술을 대표하는 화가에 대한 선호도를 조사하면 단연 겸재 정선과 단원 김홍도라고 한다.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산수풍경을 그리는 두 가지 서로 다른 방식, ‘눈’과 ‘마음’으로 그린 김홍도와 정선의 대표작들을 최고의 해설과 곁들인 미술 인문학의 향연은 그야말로 눈의 호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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