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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청년 작가’ 최인호의 일생
‘영원한 청년 작가’ 최인호의 일생
  • 박천국 기자
  • 승인 2014.07.19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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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문학계의 큰 별이 지다

한국 문학계의 큰 별이 지다
‘영원한 청년 작가’ 최인호의 일생

 

(퀸 2013년11월호)  2013년 9월 25일, 침샘암으로 투병하던 최인호 작가가 끝내 타계했다. 향년 68세. 1970년대 한국 문학계에 혜성처럼 등장한 그는 50여 년 동안 다양한 작품을 통해 세련된 문체와 감수성으로 문학의 영역에 국한되지 않고 영화계에서도 주목받은 작가다. 일찍이 그는 한국 문학사에서 최연소 작가로 이름을 알렸고, 그 이후 다양한 작품을 통해 천재적인 소질을 발휘하며 자신의 활동 무대를 넓혀온 인물이다. 죽는 날까지 청춘의 푸름을 잃지 않으려던 그는 많은 이들에게 ‘영원한 청년작가’로 기억되고 있다.

취재 박천국 기자 | 사진 서울신문, 여백출판사 제공

침샘암으로 투병 중이던 최인호 작가의 건강 상태는 많은 이들의 관심 대상이었다. 부고를 접하기 전만 해도 그는 작품 활동을 재개할 정도로 상당히 건강을 회복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래서 그의 죽음은 많은 이들에게 더 충격적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빈소가 마련된 다음날, 본지는 서울성모병원을 찾았다.
유가족들의 얼굴에는 슬픔이 짙게 배어 있었지만, 침착함과 차분함 속에 각계각층 인사들의 조문에 감사를 표했다. 문단과 영화계에서 활동한 작가답게 조정래 작가는 물론, 신성일, 강석우 등 문화계 유명 인사들이 유가족에게 애도를 표하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특히 한 고등학생은 교복을 입은 채 빈소를 찾아 눈길을 끌기도 했다. 국민적인 사랑을 받은 작가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었다.
9월 28일 오전 9시에는 명동성당에서 정진석 추기경의 집전으로 장례 미사가 진행됐다. 발인식에는 유족과 지인은 물론,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팬들까지 총 600여 명이 자리했다.
미사를 집전한 정진석 추기경은 강론을 통해 “최인호 작가님의 선종에 깊은 애도를 표한다”면서 “거칠고 험난한 삶 속에서도 위로와 희망을 건네시던 선생님을 이제는 더 이상 만날 수 없다는 슬픔을 감출 수가 없다”고 말했다.
고별사는 천주교 신자이자 막역한 친구 사이였던 배우 안성기가 맡아 눈길을 끌었다. 1시간 정도 진행된 미사를 마친 뒤 고인의 시신은 장지인 성남시 분당구 메모리얼파크에 안장되었으며, 영원한 안식에 든 고인에게 문화체육관광부는 은관문화훈장을 추서했다.

최연소로 등단한 이후 <별들의 고향>으로 주목받다

그는 3남3녀 중 넷째(차남)로 서울에서 출생했다. 문학적인 재능을 인정받은 것은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단편 <벽구멍으로>가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작 없는 가작으로 입선했고, 1967년 단편 <견습환자>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최연소 나이에 등단하는 기록을 남겼다.
그를 대중적인 작가 반열에 오르게 한 작품은 동명의 영화로도 유명한 <별들의 고향>이다. 1972년 조선일보에 소설 <별들의 고향>을 연재하기 시작했던 최인호는 26세의 나이에 ‘최연소 신문연재 소설가’가 될 수 있었다. 통기타와 청바지로 상징되는 1970~80년대, 암울한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고 상처받은 청춘들의 감성을 대변하며 ‘감수성의 혁명’이라는 찬사를 받을 정도로 <별들의 고향>은 한 시대의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특히 이 작품을 통해 그는 ‘영원한 청년작가’라는 전 국민적인 수식어를 얻기도 했다. 1년간의 연재를 마친 뒤 1972년 두 권의 책으로 묶여 나온 소설책은 무려 100만 부 이상이 팔렸다. 특히 그는 왕성한 창작욕을 바탕으로 다작한 작가로도 잘 알려져 있다. <미개인>, <타인의 방>, <처세술 개론>, <무서운 복수>, <돌의 초상>, <깊고 푸른 밤> 등 단편 위주의 소설을 발표하는 동시에 <도시의 사냥꾼>, <불새>, <적도의 꽃>, <고래사냥>, <겨울 나그네> 등 신문 연재소설로 독자와의 간격을 좁혔다.
또 그는 흥행과 작품성을 인정받았던 시나리오 작가이기도 했다. <고래사냥>과 <바보들의 행진>, <깊고 푸른 밤> 등이 소설의 인기를 바탕으로 영화로 제작되었으며, 영화 <깊고 푸른 밤>으로 1986년 아시아영화제 각본상과 대종상 각본상을 수상해 소설가의 외연 확대에도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1987년 가톨릭에 귀의한 후 주로 당대의 사랑과 사회상을 작화하던 작품 스타일에 변화를 주기도 했다. 가톨릭적 종교관과 세계관을 토대로 <잃어버린 왕국>과 <왕도의 비밀> 등 역사와 종교 소설 발표에 주력하며 문화적 지평을 넓혀 나갔다.
또 1994년에는 천주교 서울대교구에서 발행하는 <서울 주보>에 ‘말씀의 이삭’이라는 칼럼을 연재했는데, 작가의 종교적 고뇌와 갈등, 그리고 신앙적 체험 등을 담으며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서의 면모를 드러냈다. 특히 암 투병 중 집필 활동 외에는 외부 노출을 꺼렸던 그가 유일하게 2012년 7월부터 14주간 <서울 주보>에 암 투병기를 싣기도 했다.

암 환자가 아닌 천생 작가로 생을 마감하다

 

2008년 그는 작가가 아닌, 한 명의 인간으로서 인생 최대 위기를 맞았다. 침샘암 발병으로 수술과 항암 치료를 거치면서도 종교적 신념에 기대 생의 의지를 다졌다. 생의 욕구는 단순히 ‘살아야 한다’는 의미를 넘어선 ‘작가 인생이 단절되어서는 안 된다’는 작가정신의 발로였다. 그는 유작이 된 <최인호의 인생>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피어나지 않으면 꽃이 아니고, 노래 부르지 않으면 새가 아니듯, 글을 쓰지 않으면 나는 더 이상이 작가가 아니다.”
실제로 그는 침샘암 증세가 악화되어 병원에 입원하기 전까지 서울 한남동의 한 출판사에 마련된 작가의 방에서 창작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스케줄에 얽매이지 않아도 되는 작가이지만 그는 보통의 회사원처럼 시간을 정해놓고 집필실을 찾았다.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쯤까지 작품 구상과 집필에 몰두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렇게 암 투병 전후로 탄생한 작품이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와 <최인호의 인생> 등이다.
특히 집필실이 위치한 출판사 직원들의 전언에 의하면 다른 사람들이 그를 작가가 아닌 환자로 대하는 것을 가장 두려워했다고 한다.
누군가 그에게 ‘건강은 좀 괜찮으시냐’고 물어보면 오히려 ‘쓸데없는 것을 묻는다’며 혼을 냈다고 할 정도다. 좀처럼 아픈 내색을 하지 않아 항암치료로 손톱과 발톱이 빠지는 고통에도 골무를 낀 채 글을 써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를 펴낸 일화는 유명하다.
그가 견디기 힘든 병마를 버티며 작품 활동에 매진할 수 있었던 근원적인 힘은 신앙이었다. 작업실에 놓인 그의 성서가 누렇게 제 색을 잃어버릴 만큼 그는 성경 구절을 읽고 되새기며 마음의 안식과 삶의 지혜를 구했다. 그는 소천 직전까지도 예수의 일생을 그린 작품을 구상하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각계각층 명사들이 말하는 최인호 작가

 

최인호 작가는 50년간 작가로 활동하며 다양한 분야에 영향력을 끼친 인물이다. 문학인과 영화인들은 물론이고 정치인 등 생전 그를 지켜본 많은 이들이 ‘최인호 작가’를 떠올리며 죽음을 애도했다.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은 “문학가들이 문단 외 활동을 많이 하는데 최인호는 문단 외에 일을 하지 않았다”며 “이 시대 마지막 남은 순수한 작가가 떠났다”고 탄식했다.
소설가 출신 민주당 김한길 대표는 “문단을 위해서나 당신의 삶을 위해서나 좀더 우리와 함께했어야 할 분인데 안타깝다”며 “등단했을 때 알려지지 않은 저를 최초로 인정해 주고 중앙 문단에 소개해 주며 각별히 저를 이끌어줬던 선배”라고 기억했다.
특히 그와 각별한 사이를 유지하며 막역하게 지내온 인사들도 그에 관한 기억들을 꺼내놓았다. 1971년부터 월간지 <샘터>의 편집주간을 맡고 있는 <무진기행>의 김승옥 작가는 그와 남다른 인연을 가지고 있다. 1975년부터 2010년 2월까지 34년 6개월 동안 월간지 <샘터>에 기고해 온 최장기 연재소설 <가족> 때문이다.
김 작가는 최인호 작가로부터 매번 원고를 받은 인물이다. 김 작가는 “1975년부터 최인호에게서 쭉 원고를 받았고 1년에 한 번씩 모여서 식사를 했는데, 마지막 만남은 올해 3월이었다”며 “최인호는 진짜 좋은 사람”이라고 말했다.
특히 영화배우 안성기는 1983년 최인호 작가의 원작을 영화로 만든 <적도의 꽃>에서부터 시작해 <고래사냥>과 <깊고 푸른 밤> 등 많은 작품에서 주연을 맡았다. 그 인연으로 30년 가까이 막역지우로 지낸 것으로 알려졌다. 안성기는 장례 미사 고별사를 통해 고인에 대한 애틋한 감정을 표현했다.
“너무 서둘러 저희 곁은 떠나신 것이 조금은 원망스럽기도 하지만, 함께 살아온 날들이 참으로 행복했고 감사했습니다.”
안성기는 배창호 감독과 함께 4일 밤을 지새우며 빈소를 지킨 것으로 전해졌다. 이뿐만 아니라 조정래 작가는 “최인호는 평생 작품만 쓰다 간 가장 완벽한 전업 작가였다”고 회상했고, 정진석 추기경은 “선생님은 삶을 통찰하는 혜안과 인간을 향한 애정이 녹아 있는 글로 많은 국민에게 사랑을 받은 이 시대 최고 작가였다”고 평했다.
또 이문열 작가는 “투병 중임에도 건강해 보여 다시 최인호의 문학을 만날 수 있겠구나 기대했는데 갑작스레 비보를 듣게 되어 안타깝다”고 했고, 이해인 수녀는 “암 투병 중인 동지로서, 서로 믿고 의지하는 마음이 컸는데 믿을 수가 없다”며 아쉬워했다.

▲ ‘영원한 청년 작가’ 최인호의 청년 시절 모습

최인호 작가의 새로운 작품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됐다. 1970년과 1980년대의 청춘문화의 구심점 역할을 했고, 중년 작가가 된 이후에는 깊이 있는 식견과 혜안을 바탕으로 누군가에게 삶의 기준이 될 만한 글로 항상 ‘독자의 벗’을 자처했던 최인호.
그의 육신은 사라졌지만, 그가 남긴 작품들은 최인호의 작가정신을 떠올리게 하는 오래도록 빛나는 별이 되어 줄 것이다.(퀸 2013년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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