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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음하는 ‘지구의 냉장고’ 알래스카
신음하는 ‘지구의 냉장고’ 알래스카
  • 이시종 기자
  • 승인 2014.07.20 08: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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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환 기자의 거꾸로 보는 미국

박영환 기자의 거꾸로 보는 미국
신음하는 ‘지구의 냉장고’ 알래스카

 

알래스카대학 극지환경연구소장은 빙하가 녹아내리는 모습을 ‘폭주 기관차’에 비유했다. 지구촌 온난화 등의 다양한 기후변화로 알래스카의 평균 기온이 점차 상승하면서 빙하가 급속도로 녹아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일년 내내 얼어붙어 있어야 할 땅이 녹아내리면서 집이 무너지고 도로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등 생태 환경이 파괴되고 있다. 이것은 어쩌면 무분별한 환경오염으로 인한 자연 재앙의 징후이자 자연이 인간에게 보내는 마지막 경고일지도 모를 일이다.

글 박영환(KBS LA특파원) | 사진 유원규

#1 ‘공생’과 ‘상생’의 철학이 깃들어 있는 알래스카

알래스카는 출발 전부터 색다른 고민을 안겨주었다. 아내는 여름철이지만 내복까지 챙겨가라고 성화였다. 이글루에 살며 얼음낚시로 생계를 이어가는 에스키모를 상상했던 것 같다. 그러나 앵커리지에 첫발을 내딛었을 때 반팔 티셔츠가 적당했다. 높은 습도 탓인지 사막지대인 캘리포니아의 여름보다 무덥게 느껴졌다.
렌터카를 빌린 뒤 가져온 내비게이터를 켰는데 먹통이었다. 돈을 더 내고 ‘알래스카 형 내비’가 장착된 차량을 다시 빌려야만 했다. 마지막으로 미국에 합병된 하와이에서도 통하던 내비가 굴욕을 당하다니.
1959년 미국의 49번째 주가 된 알래스카는 곳곳에서 생소함이 묻어났다. 그 독특함이 이방인들을 알래스카에 중독시켜 왔는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Last Frontier(마지막 개척지)로 평가받지만 1867년 러시아로부터 720만 달러에 구입했을 때 미국인들은 ‘돈 낭비’라며 화를 냈다. 구매를 주도한 국무장관 월리엄 H. 스워드의 이름을 따서 ‘스워드의 어리석은 행위(Seward’s Folly)’로 조롱했다.
대우가 달라진 건 알래스카에서 금광과 석유가 발견되면서 부터다. 원시의 알래스카는 발전해왔다. 그러나 만물에 깃든 정령을 존중하기에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것만을 자연에서 얻어 온 알래스카 인디언들의 ‘공생’과 ‘상생’의 철학과는 다른 경로여서 아쉽다.

#2 백야의 알래스카에 웬 모기 떼?

녹아내리는 빙하를 취재하기 위해 북미 최고봉 맥킨리산이 있는 타키트나로 향했다. 빽빽한 침엽수림 도로 좌우로 크고 작은 호수가 나타나고 사라졌다. 개울과 강도 어지간히 많았다. 아기공룡 둘리가 살던 시절에는 빙하로 뒤덮였던 곳이 아니었을까, 엉뚱한 생각이 스쳐갔다. 등산인 마을에 숙소를 잡고 산책에 나섰는데 갑자기 엉덩이와 등이 따갑고 간지럽게 느껴졌다. 호텔 직원은 알래스카 모기가 환영식을 해준 거라고 웃었다. 앞으로 빙하가 더 녹으면 해충들이 더 극성을 부릴 것이다.
밤 11시가 됐는데도 백야 덕분에 대낮 같았다. 커튼을 쳤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적도의 해는 수직으로 뜨고 지지만 북극에 가까운 알래스카의 해는 수평으로 움직인다. 장엄한 일출이 없는 대신 강렬한 빛으로 만물에 강력한 에너지를 쏘아댄다. 그래서 알라스카에는 거인 채소와 식물이 많다. 20㎝ 크기의 신선초가 2m가 넘고 상추도 코끼리 얼굴 크기다.
한여름은 일조량이 20시간이 넘기 때문이다. 하루가 밤낮으로 나뉘는 땅과 1년이 밤과 낮으로 나뉘는 알래스카는 분명 다른 세상이다. 며칠 경험을 해보니 빛도 어둠도 지나치면 좋지 않고 결국 조화로움이 최고라는 생각이 들었다.

#3 맥킨리산 영웅들, “모험과 도전 없는 세상은 무의미하다”

 

때 아닌 비가 내려서 경비행기를 타고 정상의 빙하 모습을 확인하려던 일은 수포로 돌아갔다. 7년 동안 경비행기를 몰아온 조종사는 맥킨리산의 빙하가 줄고 있다고 단언했다. 저 멀리 하얀 구름 뒤로 몸을 숨긴 맥킨리산은 수백년 된 빙하로 감싼 고봉을 거느리고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맥킨리산은 북극에 가까운 탓에 빙하 절벽과 크레바스, 살인적인 강풍으로 8천m 봉우리보다 접근이 더 어려운 산이다. 돌아오는 길에 맥킨리산에서 삶을 불태운 산악인 묘지에 들렀다. 희생된 산악인은 자그마치 160명. 한국 산악계의 전설이 된 고상돈, 이일교 씨의 추모비도 비를 맞고 있었다.
산악인들은 왜 고난을 자처하는 것일까. 원시적인 질문이 고개를 들었다. 보통의 사람들은 안온함을 추구한다. 돈과 권력, 명예까지 거머쥐려고 한다. 산악인들은 그 반대다. 고통과 위험을 즐기며 정상 도전을 꿈꾼다. 단, 하나뿐인 목숨도 기꺼이 내던진다.
세속의 셈법으로는 처음부터 손해다. “모험과 도전이 없는 세상은 존재의 의미가 없다. 아무도 안간 길을, 나만의 길을 낸다는 건 멋진 일이다. 단 1% 가능성만 있어도 포기하지 않는다.”
8천m급 거봉 14개와 남극, 북극점 탐험에 성공해 세계 최초로 ‘산악그랜드슬램’을 달성한 고(故) 박영석 대장의 말이 의문을 풀어주었다.

#4 녹아내리는 빙하, ‘브레이크 고장난 폭주 기관차’

▲ 유람선을 타고 둘러본 빙하는 약 10분이 지났을 뿐인데 굉음과 함께 바다 속으로 곤두박질쳤다. 지구 온난화가 지금 속도로 가면 수십 년 안에 알래스카에서 빙하를 볼 수 없을 것이라는 과학자의 예언을 절감할 수 있는 안타까운 순간이었다

이틀 동안은 육지 빙하와 빙하 호수, 바다 빙하를 둘러보았다. 높이 약 100m, 폭 3km의 빙하가 곳곳에서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유람선이 멈춰서 있는 10분 동안 굉음과 함께 바다 속으로 곤두박질하는 빙하를 직접 볼 수 있었다.
관광객들은 탄성을 질렀지만 안타까움이 배어 있었다. 애지중지하던 물건이 부서진 느낌이랄까. 과거에는 얼음바다였다가 녹아가면서 사람 크기 남짓한 빙산에 가까스로 의지해 휴식을 취하는 해달의 모습도 안쓰러웠다. 20년간 일했다는 유람선 선장은 “과거에는 3~4시간 기다려야 빙하 붕괴를 볼 수 있었는데 이제는 그 시간이 짧아지고 횟수가 늘어난다”고 말했다.
알래스카대학 극지환경연구소장은 빙하가 녹아내리는 모습을 ‘폭주 기관차’에 비유했다. 브레이크가 고장났다는 거다. 지구학자들은 알래스카를 지구온난화의 표본실로 부른다. 세계의 평균 기온이 1도 상승했을 때 알래스카는 3도 이상 급속히 올랐기 때문이다.
과학자들은 온난화가 지금 속도로 가면 수십 년 안에 알래스카에서 빙하를 더 이상 볼 수 없다고 진단한다. 빙하 현장을 둘러보면서 그 ‘불편한 진실’이 피할 수 없는 현실로 다가오고 있음을 절감했다.

#5 “인생의 마지막 고비라고 느껴질 때 알래스카를 찾아가라”

18세 젊은 나이에 알래스카에 미쳐 알래스카의 아름다운 생태를 사진에 담아오던 호시노 미치오는 1996년 또 다른 촬영을 위해 텐트를 치고 자다가 곰에 물려 죽고 말았다. 그가 머물렀던 마을에는 그를 기억하는 목각 기둥인 ‘토템폴’이 세워졌다.
그는 <여행하는 나무>에서 “100년 전쯤 알래스카를 여행한 사람이 죽기 직전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젊은 시절에는 알래스카를 찾지 말라. 인생의 마지막 고비라고 느껴질 때 그곳을 찾아가라.’ 알래스카는 모두가 알고 있듯이 생명이 살아가기엔 최악의 조건입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 최악의 조건에서 사람은 자기 안에 숨겨진 진정한 생명력을 깨닫습니다”라고 말했다.
빌딩보다는 산이, 신호등보다는 빙하가, 사람보다 동물이 더 많은 알래스카는 그 누구든 머무는 순간만큼은 모든 사람을 철학자를 만들어주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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