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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철수 아버지 안영모 원장을만나 父傳子傳을 발견하다
안철수 아버지 안영모 원장을만나 父傳子傳을 발견하다
  • 이시종 기자
  • 승인 2014.07.23 00: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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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철수 아버지 안영모 원장을만나 父傳子傳을 발견하다

 

(Queen 2011년 12월호) 아들은 아버지를 닮는다고 했다. 최근 엄청난 가치의 ‘안철수연구소’ 주식을 사회에 환원한다고 발표한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 역시 아버지 안영모 옹의 삶의 방식을 따르고 있다. 안 원장의 사회 환원 발표를 즈음해서 본지는 누구보다 아들을 대견하게 생각할 안영모 옹을 만나기 위해 부산으로 향했다.

취재 황정호  | 사진 양우영 기자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이 지난 11월 15일 경기도 수원의 서울대 융합기술대학원에서 세상을 다시 한 번 깜짝 놀라게 했다. 자신이 창립하고 오늘날까지 일궈온 ‘안철수연구소’의 주식 중 자신의 보유 지분 절반에 해당하는 1천500억원 상당의 주식을 사회에 환원하겠다는 것.
다만 그 시기가 서울시장 고심과 불출마 선언, 후보시절 박원순 시장에 대한 지지에 연이어 한창 정치계 입문 가능성이 제기 되고 있는 상황이라는 점에서 호사가들의 뒷말이 이어지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단순히 정치를 하기 위한 입지 다지기에 쓴 비용치고는 많아도 너무 많다. 더구나 안 원장은 오래 전부터 스스로 많은 혜택을 받아왔고 받은 만큼 돌려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드러내 왔다. 결과적으로 시기적인 아쉬움이 있을 뿐 그의 진정성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는 것이 전반적인 여론이다.

쉽지 않은 결심

안철수 원장은 자신의 사회 환원 결심을 발표 이전 직원들에게 이메일을 통해 알렸다. 공개 된 이메일의 내용에는 그가 오래 전부터 항상 해왔던 나눔에 대한 생각과 말들이 고스란히 집약돼 있다.

안 원장의 이메일 전문

저는 오늘 오랫동안 마음속에 품고 있던 작은 결심 하나를 실천에 옮기려고 합니다. 그것은 나눔에 관한 것입니다.
저는 그동안 의사와 기업인, 그리고 교수의 길을 걸어오면서 우리 사회와 공동체로부터 과분한 은혜와 격려를 받아왔고, 그 결과 늘 도전의 설렘과 성취의 기쁨을 안고 살아올 수 있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저는 한 가지 생각을 잊지 않고 간직해왔습니다. 그것은 제가 이룬 것은 저만의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저는 기업을 경영하면서 나름대로 ‘영혼이 있는 기업’을 만들고자 애써왔습니다. 기업이 존재하는 것은 돈을 버는 것 이상의 숭고한 의미가 있으며, 여기에는 구성원 개개인의 자아실현은 물론 함께 살아가는 사회에 기여하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보다 큰 차원의
가치도 포함된다고 믿어왔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가치를 실천해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합니다. 전쟁의 폐허와 분단의 아픔을 딛고 유례가 없는 성장과 발전을 이룩해온 우리 사회는 최근 큰 시련을 겪고 있습니다.
건강한 중산층의 삶이 무너지고 있고 특히 꿈과 비전을 갖고 보다 밝은 미래를 꿈꿔야 할 젊은 세대들이 좌절하고 실의에 빠져 있습니다.
저는 지난 십여 년 동안 여러분들과 같은 건강하고 패기 넘치는 젊은이들과 현장에서 동료로서 함께 일했고, 학교에서 스승과 제자로도 만났습니다.
또 그 과정에서 이상과 비전을 들었고 고뇌와 눈물도 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가 겪고 있는 시련들을 국가 사회가 일거에 모두 해결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국가와 공적 영역의 고민 못지않게 우리 자신들도 각각의 자리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특히 사회에서 상대적으로 더 많은 혜택을 받은 입장에서, 앞장서서 공동체를 위해 공헌하는 이른바 ‘노블리스 오블리제’가 필요할 때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실의와 좌절에 빠진 젊은이들을 향한 진심어린 위로도 필요하고 대책을 논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공동체의 상생을 위해 작은 실천을 하는 것이야말로 지금 이 시점에서 가장 절실하게 요구되는 덕목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언젠가는 같이 없어질 동시대 사람들과 좀 더 의미 있고 건강한 가치를 지켜가면서 살아가다가 ‘별 너머의 먼지’로 돌아가는 것이 인간의 삶이라 생각한다.”
10여 년 전 제가 책에 썼던 말을 다시 떠올려 봅니다.
그래서 우선 제가 가진 안연구소 지분의 반 정도를 사회를 위해서 쓸 생각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절차를 밟는 것이 좋을지, 또 어떻게 쓰이는 것이 가장 의미 있는 것인지는 많은 분들의 의견을 겸허히 들어 결정하겠지만, 저소득층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 쓰여졌으면 하는 바람은 갖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수많은 문제의 핵심중 하나는 가치의 혼란과 자원의 편중된 배분이며, 그 근본에는 교육이 자리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선은 자신이 처한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으로 인해 기회를 보장받지 못하고, 마음껏 재능을 키워가지 못하는 저소득층 청소년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일에 쓰여지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다른 목적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오래전부터 생각해온 것을 실천한다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다만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오늘의 제 작은 생각이 마중물이 되어, 다행히 지금 저와 뜻을 같이해 주기로 한 몇 명의 친구들처럼, 많은 분들의 동참이 있었으면 하는 것입니다. 뜻 있는 다른 분들의 많은 관심과 참여를 기대해 봅니다.

남다른 철학과 삶

지난 몇 개월 동안 안 원장은 일간지 1면에 심심치 않게 등장했으며 그의 말과 행동, 고민까지도 많은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서울시장 출마를 고심하면서 솟구치기 시작한 그의 지지율은 현재 대권 가능성까지 점칠 수 있는 수준에 도달했다. 기성 정치권의 아전투구식 행태에 염증을 느낀 젊은 세대들이 새로운 대안으로서 그를 지지한 것. 이에 기성 정치권은 여야 할 것 없이 핵폭탄 급의 충격을 받은 듯했다.
애써 평가절하하려 했지만 적어도 현재 대한민국의 20대에서 40대 사이 상당수의 젊은층들은 안 원장의 생각과 철학을 지지한다는 것이 이미 각종 여론조사를 통해서도 증명되고 있는 상황이다.
그에게 쏟아지는 관심은 그의 현재는 물론 과거로 까지 이어지고 있다. 오래 전 의사로 살아가던 그가 돌연 벤처기업을 창업하고 기업가로 변신했을 때는 물론 대표직을 사임하고 유학길에 올랐던 일화는 잘 알려져 있다. 모두가 만류하는 길을 선택하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단순히 이윤 추구만이 아닌 나눔의 철학이 깃든 경영을 추구했다. 그간 그의 노력을 많은 사람들이 인정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이 현재의 성공적인 삶을 살아가기까지 사회로부터 많은 혜택을 받았다고 말한다.
그의 남다른 나눔의 철학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하는 부분이다. 하지만 누구도 타고난 것은 없는 법. 그 역시 어린시절이 있었고, 자신의 생각과 삶의 방식을 정립하던 시기가 존재했다.
그 시기에 그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이는 다름 아닌 부친 안영모 옹이었다. 48년을 오로지 부산 변두리의 범천동에서 서민들의 의사로 살아온 안영모 옹은 여든이 넘은 고령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가난한 이들을 진료하며 인술을 펼치고 있다.

아들을 생각하는 아버지의 부정

 

안 원장의 사회 환원 결심이 알려진 뒤 본지는 아들을 지켜보는 부친 안영모 옹의 심경을 듣기 위해 부산으로 길을 잡았다. 안 옹은 젊은 시절 서울대 의대를 졸업하고 군의관으로 일하다 1963년 당시 빈촌이었던 부산 범천동에 병원을 열었다.
그 후로 48년, ‘범천의원’이라 이름 붙여진 병원은 매일 아침 어김없이 서민들을 위해 문을 열었다. 그러한 범천의원을 물어물어 찾는데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하기야 반세기 가까운 시간을 한 곳에만 있었으니 부산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지나다니면서라도 봤을 것이 당연했다.
4차선 도로가에 자리한 범천의원을 둘러싼 동네의 풍경은 꽤나 한산하게 느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영세 서민들이 운영하는 소규모 공장 밀집지역인데다, 그나마도 경기를 타는지 문을 닫은 곳이 꽤 됐기 때문이다. 3층 건물의 범천의원은 그 역사를 말해주는 듯 동네의 풍경과 그리 다르지 않은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오래 전 군의관 생활을 마치고 밀양에서 부산으로 오는 기차에서 병원 하나 없는 빈촌인 범천동을 보고 그 길로 병원을 개원했다는 안 원장의 부친. 그 오랜 세월 동안 변함없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진료를 이어온 그의 삶이 안 원장이 가진 철학과 삶의 방식에 바탕이 됐을 터였다.
점심시간이 조금 지났을 무렵, 범천의원의 문을 조심스레 열어 보고는 또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개인 병원이라고 해도 문을 열자마자 진료실이라니. 한가한 병원에는 라디오 소리만이 울리고 있었다. 난데없는 방문에 어리둥절한 표정의 안영모 옹에게 인사를 건네자 대번에 “난 별로 할 말이 없는데…”라며 손사래를 친다.
그러면서도 서울에서 힘들게 왔다는 말에 박대하지는 않으며 자리를 권한다. 안 원장의 품성은 아버지를 닮은 듯했다. 기자의 질문에 난감해 하면서도 큰 아들에 대한 대견함은 감출 수 없는 것이 아버지의 마음이었다.

-어제 전화를 많이 받으셨을 것 같습니다.
-전화도 다 꺼놓고 있었어요. 나도 TV에 나오는 것을 보고 (아들의 사회 환원 발표를) 알았어. 둘째 아들이 서울에서 한의원을 하고 있는데, 전화가 와서 TV를 보라고 해서 그때 알았지 뭐….

-대견하셨겠습니다. 안 원장이 평소에 그런 이야기를 하던가요.
-원래 알고 있던 건데, 우리 가족들은 이미 예전부터 큰아이 이야기를 들어서 알고 있었어. 유한양행 창업주처럼 (사회에 환원)하고 싶다고 했는데…. 그 시기가 생각보다 빨리 온 거지. 원래 기업하면서부터 베풀려는 생각이 있었잖아. 사람들한테 컴퓨터 바이러스 백신 무료로 나눠주고, 회사 경영해서 고용을 해 실업자를 없애고 싶어했고…. 좋은 일 하려고 노력하는 걸 보면 먼데 있으면서 흐뭇하게 생각해요.

-부모에게 배운다는 말이 있잖습니까.
-아이들이 자라나는 게, 그게 어디서 배우겠어. 부모들 꼭 고대로 배우잖아요. 아이들 대학 갈 때까지 매사 조심하고 올바르게 키우려고 노력하기는 했지. 에이, 뭐 큰아이가 대학 가고 난 뒤에는 하는 거 보니까 올바르게 행동하고 살더라고.

인터뷰 중간 중간 전화벨이 울렸지만 안 옹은 “골치가 아프다”며 내내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다시금 옛 기억을 떠올리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조용한 음성으로 꺼내 놓았다. 나눔에 대한 안원장의 생각은 어린 시절 아버지의 삶을 보며 점점 커갔던 것 같다.

-안 원장은 저소득층 아이들이 공부를 할 수 있도록 돕고 싶다고 했는데요.
-진짜 좋은 말 했더라고. 내가 듣고 흐뭇했지, 어려서 병원 3층에 계속 살았거든. 내가 병원에서 오는 환자를 대하는 걸 보고 자라니까 아무래도 어려운 사람을 많이 봤겠지. 지금 대한민국이 이렇게 발전했다고 해도 서울이나 부산이나 상위 몇 프로만 잘 살지 다 형편없잖아. 중간층이 좀 있다고 해도 사회의 절반 이상이 어려우니까. 아이들을 가르치고 싶은 마음은 있어도 경제적으로 안 따라 주니 고통스럽겠지. 대학등록금도 이제는 옛날하고 틀려서 워낙 비싸니 부모들이 얼마나 힘들겠어. 이런 때에 아이들을 돕겠다고 하니 아버지로서 보기 좋지.

-안 원장이 전화를 자주 하세요.
-가끔 큰아이가 한 번씩 하긴 하지, 우리는 일부러 안 해. 워낙 바빠서 정신이 없을 거 아니야. 큰아이도 쉬는 시간 없이 할 일이 많고 나도 내 책을 보고 하니까. 시간 조금이라도 빼앗으면 안 되잖아. 대학에서 강의하고 대학원장으로 행정도 봐야하고…. 또 다른 사장 임명하고 인사권도 넘겼다지만, 자기 회사니 신경 안 쓸 수 있겠어.

-이번 사회 환원 발표를 두고 정치 입문 의도 아니냐는 이야기도 있는데요.
-자기가 알아서 하는 거지, 나는 일체 정치에 대해서는 관여 안 합니다. 이번에도 (큰아들이) 정치관계에 대해서는 일절 말이 없잖아. 정치를 하면 오염된다고들 많이 이야기하잖아요. 지금 하고 있는 이 정도가 좋은 것 같아. 그저 가르치고 사람들 존경 받으면서 할 일도 많으니…. 아버지 마음으로는 정치에 관여 안 했으면 좋겠네. 내 마음은 그래요. 이런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은데….

더 묻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병원 문이 열리며 환자가 찾아들었다.
여느 병원과 다른 풍경은 또 한 번 연출됐다. 접수를 하고 대기하고 있다가 진료 차트를 본 의사가 부르면 진료실에 가는 것이 아니었다. 다짜고짜 자리에 앉은 환자는 걸쭉한 부산 사투리로 “여게 요래 허리 쪽이 계속 아파요”라고 했고, 안 옹은 “함 누워보소”라고 응수했다.  불시에 인터뷰를 하러 들이닥친 입장에서 진료까지 방해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더 할 말은 없으니 이제 그만 가보라”는 안 옹의 말에 인사를 하니 노인은 온화한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배웅을 대신했다.
부전자전이랄까, 그 모습에 왠지 안철수 원장이 겹쳐 보였다. 아버지를 닮은 아들, 의사로서 사명감으로 가난한 이들을 위해 헌신했던 아버지의 삶은 아들에게로 이어지고 있었다.(Queen 2011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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