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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인의 숨결-경기도무형문화재 제24호 나전칠기명장 배금용
장인의 숨결-경기도무형문화재 제24호 나전칠기명장 배금용
  • 이시종 기자
  • 승인 2014.07.27 08: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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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인의 숨결
경기도무형문화재 제24호 나전칠기명장 배금용

 

“먹고살아야 하는데, 할 줄 아는 게 이것밖에 없었다.”

수많은 질문이 이 한 가지 답으로 귀결됐다. 나전칠기를 만들며 보낸 50여년 외길의 삶을 그는 결코 꾸미거나 높이지 않는다. 문화재도 명장도 다만 서류상의 이름일 뿐이라고, 자신은 그저 ‘생계형 장인’일 뿐이라며 스스로를 낮추고 또 낮춘다. 어떻게 하면 좀 더 아름다운 문양을 만들까를 고민하느라 오늘도 쉬이 잠들지 못하는, 앉은 자리는 낮춰도 열정의 온도는 나추지 않는 사람. 나전칠기 명장 배금용 선생이다.

취재 | 이시종 기자 사진 | 양우영 기자

작업실에 꼭꼭 갇혀 있어도 배금용 선생은 늘 자연의 품에 산다. 모란이며 매화며 해바라기가 계절에 상관없이 꽃망울을 터뜨리고, 학이며 나비며 개구리가 철에 관계없이 허공을 휘젓는다. 한겨울에도 꽃이 피고 새가 날아다니니, 그야말로 ‘철모르는 인생’이다. 뿐만 아니다. 가만히 앉아서도 그늘 늘 바다와 산을 느끼며 산다. 먼 바다에서 올라온 조개껍데기는 눈부신 문양으로 다시 태어나고, 높은 산에서 내려온 옻나무 수액은 그윽한 빛으로 새로이 탄생한다. 바다와 산의 향기를 코가 아닌 손으로 느끼며 살아가니, 참으로 ‘희한한 인생’이다.

새것으로 옛것을 지키는 것이 전통 장인으로서 해야 할 일

▲ 배금용 선생의 손에는 50년 세월이 상감처럼 새겨 있었다

50여 년을 해오고도 그의 작업 시간은 좀처럼 줄어들지 않는다. 자개를 오릴 때 쓰는 실톱대도, 옻칠을 할 때 쓰는 귀얄도, 그의 손과 하나된 지 이미 오래. 하지만 제아무리 능숙한 장인이라도 제작단계 곳곳에 숨은 건조 과정 앞에선 그저 기다리는 일밖에 할 수가 없다. 나전부터 옻칠까지 수십 개의 섬세한 과정을 거치는 동안 끊임없이 ‘멈춤’을 반복해야 하니, 아무리 작은 작품이라도 6개월 이상의 시간을 거치지 않고는 완성되지 않는다.
“도안이 가장 어려워요. 어떡하면 좀 더 새로운 문양을 만들 수 있을까. 잠자리에 누워서도 그걸 고민합니다. 길을 걷다가도 TV를 보다가도 신선한 그림이 어디 없나 찾아보게 돼요.”
작업 시간처럼, 그의 고민도 좀처럼 줄어들지 않는다. ‘칠쟁이’ 인생을 시작한 이래 단 한순간도 작품 생각을 안 한 적이 없다. 그건 좋은 작품을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적인 의지라기보다, 저절로 생활 속에 밴 습관 같은 것이었다. 옛것들이 새로운 것에 자리를 내주며 뒷방 신세로 물러나는 요즘. 전통을 잇는 전통공예인으로서 ‘전통을 잇는다’는 의미는 무엇일지 궁금했다. 그는 전통을 잇는 것이 ‘옛것 그대로를 지키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다.
“고려시대엔 고려시대의 기법이 있고 조선시대엔 조선시대의 기법이 있듯, 21세기엔 21세기의 기법이 필요하다고 믿어요. 옛것을 지키되 그 시대에 맞는 ‘무엇’을 창조적으로 덧붙여나가는 일이 장인이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는 전통과 현대는 등지고 걸아 갈 ‘적(敵)’이 아니라, 어깨 걷고 나란히 걸어갈 친구라고 생각한다. 그래서다. 언제부터 그는 고려시대나 조선시대의 기법 그대로를 재현한 작품 하나를 끝내면, 21세기의 아파트에도 어울릴 법한 현대적 작품을 만들곤 한다.
그는 자신의 작품이 전통과 현대를 넘나들게 된 데는 둘째 아들 광우씨의 영향이 크다고 했다. 대학에서 디자인을 전공하고 그의 뒤를 이어 나전칠기를 만드는 광우 씨는 신세대 장인답게, 나전칠기로 휴대폰 케이스나 시디 케이스, 마우스 같은 현대적 생활 소품을 즐겨 만든다.
이런 아들의 ‘새로운 시도’가 그는 참 반갑다. ‘가까이하기엔 너무 멀어진’ 나전칠기를 현대인의 삶 속으로 끌어들이려는 아들의 노력이 고맙고 기특해서, 함께 작업하며 겪는 의견 충돌쯤은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간다고 한다.
“물론 칠쟁이로서 좋은 시절도 있었죠. 머잖아 곗돈을 타게 될 사모님들이 선금을 미리 주고 반년에서 일년 씩 자개장을 기다려주던 시절 말이에요. 그 시절이 그립긴 하지만, 지금도 나쁠 건 없어요. 언젠가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나전칠기를 직접 만들어보는 민속공예교실을 열었는데, 학부모들은 말할 것도 없고 아이들이 정말 좋아하더라고요. 누구나 좋아한다는 걸 알았으니, 더 많은 사람이 나전칠기를 누리도록 하는 일이 숙제로 남았어요.”
칠쟁이가 된 것이 운명이라고 생각하는 그. 일상생활의 즐거움 또한 나전칠기를 벗어나지 않는다. 먹고 살기 위해서 배운 일이었지만, 그 일은 어느새 생활 그 자체가 됐고 즐거움이 됐다.

살면서 한 번도 ‘칠쟁이’가 아닌 적이 없었다

 

생각해보면 그의 삶은 고통과 가난으로 점철된다. 참으로 지긋지긋한 가난이었다. 여섯 살에 아버지를 여읜 뒤로, 그의 유년은 한 마디로 ‘빈곤의 뜰’과 같았다.
큰집과 외갓집을 전전하다 밥이라도 제때 먹고 싶어 들어갔던 고아원. 가족과 고향이 사무치게 그리워 그곳을 탈출했을 때 그의 나이 겨우 열 살이었다. 함께 고아원을 나온 친구와 고향 언저리까지 걸어갔지만, 그들을 반겨 줄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남의 집 대문 앞에서 멍석을 말아 잠을 자고, 깡통에 밥을 빌어먹으면서 여러 날을 보냈다.
어느 날 버스터미널에서 기적처럼 외삼촌을 만났다. 외삼촌을 따라 서울로 올라오면서, 그의 ‘나전칠기 운명’은 시작됐다. 외삼촌의 집 바로 뒤에 당시 최고의 나전칠기 장인이었던 최준식 선생의 공방이 있었다.
외삼촌의 짐을 덜어주려고 들어간 그곳에서 2년간 물지게를 졌다.
“공방 사람들이 하나 둘 떠나기 시작하더니 어느 날 저만 남더라고요. 어린 나라도 가르쳐야겠다고 생각하셨는지, 선생님이 비로소 제게 나전칠기 만드는 법을 가르쳐주셨어요. 찬물로 작업을 해서 손바닥은 늘 갈라터지고 툭하면 옻이 올라 온몸이 엉망이 되었지만, 먹고살아갈 기술을 배우는 일이라고 생각하니 참을 만하더라고요. 그 무렵 선생님을 통해 최고의 나전칠기 장인을 많이 만났어요. 그분들의 말씀 한 마디 한 마디가 오늘의 나를 만들어 줬죠. 공방에 처음 들어갔을 때부터 얼마 전까지 하루에 4시간 이상을 자 본적이 없어요.”
성인이 되어 자신의 공방을 차렸지만 경영에는 소질이 없었던 그는 수년간 폐업과 개업, 취업을 반복해야 했다. 그 사이 화공약품으로 칠한 나전칠기가 판을 치고 세련된 서양식 가구가 등장하면서, 평탄치 않던 그의 삶은 점점 더 내리막길을 걸었다. 그래도 그 길을 벗어날 순 없었다.
“사실 전통을 이어야겠다는 소명으로 시작하지는 않았어요. 지금까지 제가 이 일을 계속한 이유는 어쩌면 미련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어요. 다들 돈이 안 된다는 이유로 이 길을 떠났는데, 저는 그게 쉽지 않더라고요. 할 줄 아는 게 ‘이 짓’ 밖에 없었기 때문이죠(웃음).”
더 이상 내려갈 바닥이 없던 1980년대 후반, 지인들의 권유로 난생 처음 ‘작품’이란 걸 응모했다. 화려하고 섬세해 재현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는 고려시대 나전칠기에 꼬박 2년을 매달렸다. 문양과 문양 사이에 철선을 꼬아 상감해 넣은 나전국 당초문경함. 이 작품으로 제13회 대한민국전승공예대전에서 입선의 영예를 안았다.
“그 때 온 신문에 제 이름이 났어요. 제 이름이 신문에 난 게 정말 신기하더라고요. 어찌나 기쁘던지 자다가도 자꾸 웃음이 났어요.”
이때부터 상품이 아닌 작품에 몰두했다. 이후 대한민국전승공예대전과 동아공예대전, 전국공예품경진대회 등에서 연이어 상을 거머쥐면서, ‘상복 터진 사람’이란 별명을 얻기에 이르렀다.
1998년에는 ‘공예인의 꽃’이라 불리는 ‘경기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됐고, 2001년엔 기능인의 최고 영예인 ‘대한민국 명장’으로 선정됐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고 했던가. 뒤늦게 탄 곗돈처럼, 그에게 영광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박물관은 못 짓더라도 좋은 작품은 많이 남기겠다

“상은 참 많이 받았지만, 주로 입선이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입선처럼 고마운 상이 없는 것 같아요(웃음). 제가 처음부터 대상을 손에 쥐었더라면 그렇게 오랜 시간 작품에 매달리지 않았을 것 같아요. 딱 입선만큼의 재능을 가졌기에 더 노력할 수 있었고, 그랬으니 그나마 오늘에 이른 거라 생각해요. 박물관 소장품으로 국제공항 벽화로, 사극 영화의 소품으로, 다양한 곳에 작품이 쓰였어요.”
‘명장’반열에 올랐으니 생활도 그만큼 윤택하겠거니 생각하겠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그에겐 여전히 ‘돈’이 붙지 않는다. 간간히 나라에서 보조금이 나오기는 하지만 작품에 쓸 재료를 구하고 나면 남는 것은 하나도 없다. 하지만 그는 ‘그것도 참 다행’이라며 사람 좋은 웃음을 지어 보인다.
“나전칠기로 큰 돈을 벌었다면 모든 과정을 스스로 책임지는 ‘현역’으로 여태 살고 있진 않을 것 같아요. 원래 몸이 편해지면 게을러지는 법이잖아요. 가끔 경제적으로 조금 여유가 있었다면 좀더 작품에 투자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도 하지만, 굶어죽지 않을 만큼은 벌 수 있으니까 불만은 없어요.”
일흔이 넘은 나이. 그는 요즘도 이른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나전을 하거나 옻칠을 하며 하루를 보낸다. 습관처럼 새벽 4시에 공방을 나와 10시간이 넘도록 작업에 몰두한다. 삶의 재미는 어디서 찾느냐고 그에게 물을 필요는 없다. 그의 즐거움은 온전히 공방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는 오늘도 50년 외길 인생이 상감처럼 새겨진 손으로 옻칠작업을 되풀이한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한번쯤은 가장 중요한 게 무엇인지 되새겨보게 되잖아요. 많은 것들을 나열해보고 그 중에서 하나씩 지워나가 보니까, 남는 것이 가족과 이 일이더라고요. 전 운명이라는 것이 있다고 생각해요. 제가 칠쟁이가 된 것은 일종의 운명이란 거죠. 태어나면서 지금까지 칠쟁이가 아닌 적이 없었어요.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고요. 칠쟁이로 살 수 있어 행복하고, 이 일을 사랑하는 제가 자랑스럽습니다.”
보석처럼 영롱한 빛깔을 뽐내는 나전칠기는 보잘 것 없는 소라껍데기나 전복껍데기를 가공하여 만든 공예품이다. 바닷가에 버려진 소라껍데기가 공예품으로 거듭나기까지는 혼신을 다한 장인의 공정이 필요하다. 고아원에 버려졌던 소년은 패류가 보석이 되는 나전칠기의 공정을 통해 오늘보다 아름다운 내일의 나전칠기를 꿈꾸고 있다.

▲ 고려시대 기법으로 복원한 나전칠기
▲ 선생의 작품에서는 뭔가 모를 신비로움이 느껴졌다. 독특한 문양과 그림으로 그려진 그의 작품을 보고 있으면 저절로 빠져드는 느낌이다

“나전칠기 박물관을 만드는 게 꿈이었는데, 박물관을 만들 만큼의 돈이 모이지 않아서 일단 포기했어요. 그래서 좋은 작품을 많이 남기는 걸로 꿈을 바꿨어요. 그 꿈은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그가 소장하고 있는 작품은 어림잡아 400여점이다. 작품을 팔지 않고 고스란히 간직해왔기 때문에, 그의 작업실은 그 자체로 이미 나전칠기 박물관이다. 꿈을 이루고도, 이뤘는지 알지 못하는 사람. 세상에서 가장 미련한 사람 하나가 칠 묻은 손으로 머리를 긁적인다. 얼굴에 진  주름은 상감된 자개만큼 눈부시고, 손에 묻은 묵은 때는 옻칠의 빛처럼 그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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