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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식 음주 문화에 반기를 든 산골 맥주도시 ‘벤드’
미국식 음주 문화에 반기를 든 산골 맥주도시 ‘벤드’
  • 이시종 기자
  • 승인 2014.08.12 22: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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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환의 미국 거꾸로 보기

미국식 음주 문화에 반기를 든 산골 맥주도시 ‘벤드’

 

술을 ‘알코올’로만 생각하면 결코 건강에 유익한 식품이 아님에는 틀림이 없다. 하지만 여러 사람이 어울려 술을 마실 때는 단순히 알코올을 섭취하는 것 이상으로 서로의 인생살이를 나누고 또 교감하는, 참다운 우정을 나눌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도 한다. 술이라는 것은 적당히 마실 때는 생활의 활력이 되고, 과하게 마실 때는 독이 된다는 말이 와 닿는 이유다.

글·사진 박영환(KBS LA특파원)

#1 ‘인생’과 ‘철학’이 녹아 있는 동양적 ‘술판’

나는 중국 시인 가운데 이백을 좋아한다. 그는 늘 꿈을 꾸었고 그 꿈에 시의 날개를 달아 무지개처럼 펼쳐 보였다. 어려움과 고난이 닥쳐와도 꿈의 농도는 묽어지거나 상하지 않았다. 세속을 벗어나 대붕처럼 하늘을 날아다니는 정열적 낭만주의자였지만 우주를 통으로 담아낼 정도로 철학적 내공을 지닌 시를 썼다.
<권주가>만 봐도 그렇다. “하늘에서 떨어진 황하 물이 바다로 흘러들면 다시 돌아오지 못한다. 인생은 뜻대로 될 때 마냥 즐겨야 하니, 황금 술잔을 달 아래 놀려두지 말라”며 “모여서 한 번 마신다면 3백 잔은 들어야 한다”고 노래했다. ‘3백 잔’의 비유에 화들짝 놀라는 사람도 있지만 이백은 ‘술주정뱅이’가 아니라 ‘애주가’였을 것이다. 한 잔 한 잔 그 속에 회피하지 않고 관통했던 삶의 진정성이 녹아든 때문이다.
조선시대 정철은 술판을 색감이 찐한 그림으로 그려냈다. “한 잔 먹세 그려 한 잔 먹세 그려 꽃 꺾어 잔 수 세며 한 없이 먹세 그려” 어느 봄날 술잔을 들고 마주 앉은 친구 사이에는 핑크색 진달래가 수북이 쌓였을 것이다.
달빛 아래 대작 장면은 상상만 해도 가슴이 뛴다. 그래서 김춘경 시인은 “취하고 싶은 건 몸이 아니라 마음입니다. 술 한 잔은 어리숙한 고독, 비워도 채워지는 상념, 술 한 잔은 지독한 외로움, 가져도 텅 빈 시간, 그래도 함께 술 한 잔 하시겠습니까” 이렇게 노래했나 보다.

#2 ‘절제’ 앞세운 미국식 음주 문화, ‘부작용’도 많다

미국에 온 지 1년이 넘었지만 “술 한 잔 하시겠습니까” 하는 ‘한국식 권유’를 거의 받지 못했다. 술은 저녁식사 자리에서 보조 수단에 불과하다. 와인 한 잔, 맥주 한 병이 고작이다. 어느 때 부터인가 집에 와서 홀로 술잔을 들었다. 보드카에 맥주를 타서 먹기도 하고 때로는 막걸리를 사발에 부어 들이켜기도 했다. 의사들은 혼자서 술을 즐겨 먹는 사람은 알코올 중독 증세가 있다고 본다. 난 중독자가 아니었던지 자작에 별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자작이 드물어졌고, 거의 술을 끊게 됐다.
지금은 맥주 한 병만 마셔도 핑하고 돈다. ‘술은 몸이 마시는 게 아니라 마음이 마시는 거다. 혼자 마시는 건 술이 아니라 알코올 섭취일 뿐이다’ 하는 단상이 스쳐갔다.
미국에서는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사람을 찾아보기 어렵다. 늦은 밤 뒷골목에서, 택시 정류장에서, 심지어 전동차 안에서 만취한 사람들을 자주 만난 한국에서의 기억은 딴 세상의 화석이다. 술 가게가 마을마다 있고 와인과 맥주, 칵테일 전문 바가 성업 중이지만 현실이 그렇다. 불과 100년 전 20년 동안 금주령이 존재한 때문일까. 만 21세 까지는 술을 사거나 마실 수 없다.
얼굴이 앳된 후배가 식당서 맥주를 주문했다가 신분증을 보여 달라는 요구에 당황하는 경우도 봤다. 탈출구로 청소년들은 친구끼리 모여 손 세정제를 마시는 일이 잦다. 공업용 알코올이 다량 들어 있는 세정제를 마시고 응급실에 실려 가는 사례가 일 년에 수천 건에 이르고 숨지는 사례도 많다. 마리화나나 신종 마약이 청소년층에 급속히 번지는 이유를 지나친 음주 규제에서 찾는 전문가들도 있다. 미국의 절제된 음주문화를 칭찬하는 사람들에게 내가 흔쾌히 동의할 수 없는 이유들이다.

#3 미국식 음주 문화에 반기를 든 산골 맥주 도시 ‘벤드’

 

금욕적인 미국의 음주문화에 정면으로 반기를 들고 나선 오리건 주 산골 도시가 있다. 포틀랜드에서 340km 떨어진 인구 8만의 소도시 벤드다. 공항에서 차를 빌려 만년설이 쌓여 있는 산맥을 넘고 그랜드캐니언 같은 협곡을 돌고 돌아 4시간 만에 도착했을 때 맥주 호프의 찐한 향이 코를 찔러왔다.
시내 중심부에는 현지에서 생산된 크래프트 비어, 즉 장인맥주를 맛보기 위해 찾아온 관광객들로 인산인해였다. 광장마다 한 손에 맥주를 들고 악대의 연주에 맞춰 친구끼리 가족끼리 연인끼리 춤을 추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시내에 있는 14개의 브루어리마다 맥주 광들로 넘쳐났다.
승객 12명이 페달을 밟아서 맥주 집을 도는 이른바 ‘사이클 펍’과 맥주 집을 오가는 빨간색 소형 버스도 인기였다. 벤드 시는 14곳을 다 들러 맥주를 마시고 스탬프를 받아 오는 사람에게 실리콘으로 만든 맥주 컵을 선물로 주는 프로그램도 운영한다. 혹시 만취한 주정뱅이들로 도시가 엉망이지 않을까 걱정하는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다.
사흘간 머물면서 관찰했는데 맥주 도시 벤드가 준 첫인상, ‘흥겨움과 충만함, 직설적 소통’의 긍정적 모습은 변하지 않았다. 공공장소에서 절대 술을 허용하지 않는 미국이지만 벤드만은 해방구였다. 술을 맘껏 마실 수 있는 자유가 주어졌지만 다양의 종류의 고급 맥주를 음미하는데 몰두한 때문인지 방종은 없었다.
퇴락해 가던 임업 도시 벤드에 장인맥주 공장이 들어선 건 15년 전이다. 사계절 높은 산맥에서 녹아내리는 빙하수의 맛이 좋아서 맥주를 만들기 시작했는데 입소문이 나면서 이제는 미국의 대표적인 장인맥주 도시로 발전했다.
그 덕에 2만여 개의 미국 도시 중 불경기 한파를 빗겨간 유일한 도시로 주목받고 있다. 맛있는 맥주도 즐기고 돈도 벌고 일자리도 늘어나니 부러울 뿐이다.

#4 술에 취해 토하는 친구의 등을 두드려준 적이 있는가

술 얘기를 쓰다 보니 서울대 경제학부 이준구 교수가 신입생에게 한 강의 대목이 떠오른다. 그는 “책벌레 친구들은 술에 취한 친구의 등을 두드려 주는 법도 잘 모른다. 교류하고 협조하는 방법을 배우고 참다운 우정이 무엇인지 깨닫는 것도 중요하다.
또 궁극적인 목적을 위해 주변 사람들과 함께 가는 법을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는 남을 가슴으로 느끼고 생각할 줄 아는 사회적인 삶의 태도를 강조한 게 아닌가 싶다.
처음부터 술을 나쁘게만 생각하거나 두려워해 멀리한 사람은 술에 취해 고통스러워하는 친구나 가족의 속마음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을 터이다. 지나친 음주의 부작용 때문에 인류의 삶을 풍성하게 만든 술의 역할이 가벼워질 수는 없다.
“인생은 나에게 술 한 잔 사주지 않았다”며 격정을 드러낸 정호승 시인은 뒤늦게 원하는 대로 이뤄지지 않는 게 인생이라는 걸 깨달았다고 한다. ‘고진감래’라는 말처럼 쓴맛을 느낀 후에야 인생의 단맛은 더 강해지고 단단해진다. 술은 각박한 현실과 달콤한 꿈의 경계를 나비처럼 넘나드는 매개체다. 마시는 사람의 마음먹기 따라서는 불가능한 일도, 못 이룰 일도 없다.
“술 한 잔 앞에 두고 그대를 생각할 땐 나와 그대 사이 어느새 꽃이 핍니다.”

<사진 설명>
맥주 도시 벤드에서는 현지에서 생산된 ‘크래프트 비어’, 즉 장인맥주를 맛볼 수 있다. 승객 12명이 페달을 밟아서 맥주집을 도는 ‘사이클 펍’이나 한손에 맥주를 들고 악대의 연주에 맞춰 흥겹게 춤을 추는 광경도 눈에 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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