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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최초 바티칸 변호사 한동일 신부
동아시아 최초 바티칸 변호사 한동일 신부
  • 이윤지 기자
  • 승인 2014.08.18 12: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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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꿈꿀 권리, 희망을 말하다

 

동아시아 최초, 한국인 최초의 바티칸 대법원 로타 로마나 (ROTA ROMANA) 변호사 한동일 신부는 우리가 오늘을 '희망'으로 살아야 할 명확한 근거를 이야기했다. 어려웠던 지난날을 아직 기억하는 이만이 건넬 수 있는 따뜻한 위로였다.

취재 이윤지 기자 | 사진 맹석호

아이러니하게도 피폐하고 무기력한 날들이 계속될수록 더욱 잊혀 가는 말 '희망' 그리고 '꿈'. 우리는 여전히 이 말들을 의심한다. 꿈꾸고 실현하라고 등 떠밀린 우리의 뒷모습은 맥없이 비틀댄다. 그런데 여기, 명백하게 위태로운 삶을 지나온 한 사람이 '실패가 선물한 희망'을 이야기한다.

'최초의 한인 바티칸 대법원 변호사'

700년 역사를 자랑하는 로타 로마나는 세계 가톨릭교회의 소송과 행정소원에 관한 최종 판결을 내리는 상설법원이다. 하급 법원 결정 및 상소심을 거쳤는데도 판결되지 못한 사안을 주로 심리한다. 정교 협약에 따라 유럽과 남미를 비롯한 많은 천주교 국가에서 교회 판결과 국가 법원 판결을 동일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로타 로마나에서 제기되는 소송은 각 국가의 대법원에서 진행하는 소송과 같은 의미다. 법정 공식 언어, '라틴어'.
로타 로마나의 변호사가 되기 위해서는 오랜 역사를 가진 교회법을 깊이 있게 이해해야 할 뿐 아니라 라틴어는 물론 유럽어를 잘 구사해야 하고, 라틴어로 진행되는 사법연수원 3년 과정을 수료해야 한다. 이 모든 과정을 마쳤다 하더라도 변호사 자격시험 합격률은 5~6%에 불과하다.
2010년, 그는 동아시아 최초, 한국인 최초로 로타 로마나의 930번째 변호사가 됐다. 책 속에 파묻혀 산 시간 10년, 유학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면 20년 만의 열매였다.
이 어려운 일이, 도전이라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상황에 놓여 있었던 사람, 한동일에게 어떻게 일어나게 됐을까.

지옥 같던, 불행하고 암울했던

한동일 신부의 어린 시절은 어둠 그 자체였다.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암흑 같던 시절을 그는 이제 조금은 담담하게 되짚는다.
"사업 실패로 매일 술주정하시던 아버지와 그저 참기만 하는 어머니, 좁고 불편했던 집에서의 나날들이 정말 싫었습니다. 어머니가 시장에 나가서 힘들게 일하셨지만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고요. 공부를 하고 싶었지만 단칸방은 TV 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빚쟁이들이 행패를 부리는 것이 일쑤였어요."
10살 어린 나이에 급기야 가출을 하기도 했다. 부모님과는 대화가 단절되고 편히 앉아 무엇도 하기 힘든 환경에서 한동일 신부는 공부를 했다. '언어공부를 시작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좋지 않았던 가정환경 때문'이라고 그는 말한다.
"너무 힘든 것들, 듣고 싶지 않은 소리를 듣지 않을 방법이 영어 단어를 보고, 숙어를 외우는 것이었어요. 타국의 말들을 보고 있으면 좀 편안해졌죠. 단어를 공부하면서 어지러운 주변의 소음을 잊게 됐습니다. 단어가 주는 묘한 느낌이 있어요. 예를 들어 '이상(理想)'이라는 뜻의 영어 단어를 보면 그것을 그려보고 꿈을 꾸게 되는 거예요. 이 말이 실제가 된다면 어떨까, 그런 생각들로 머릿속이 즐거워졌어요."
신학교에 입학한 한동일 신부는 의무적으로 배워야 하는 라틴어를 만나게 된다. 그는 그때를 '행복했다'고 회상한다. 흥미를 갖고 했지만 효과적이지는 않았던 영어 공부가 라틴어 단어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줬기 때문이다.
로마 유학 시절, 매일을 피 말리는 긴장과 막막함으로 보냈던 한동일 신부는 현지 사법연수원에서의 시간을 '지옥의 언어훈련소'라고 표현했다. 한국에 돌아온 한 신부는 전례를 보기 힘든 완벽한 라틴어 문법서를 집필했고, 현재 집필 중인 라틴어 사전의 번역을 마친 상태다.
'라틴어 전문가'. 한동일 신부를 말하는 또 하나의 키워드이기도 하다. 그는 분명 절망하고 웅크렸지만 더딘 시간을 성실하게 걸어가면 원하는 것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깊이 체득했다.

"수년 동안 지켜본 사무엘 신부(한동일 신부)는 나를 비롯한 바티칸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인종과 종교에 대한 '생각의 벽'을 허물어 준 최초의 동양인이었습니다. (중략) '진짜 패자는 한 번도 위험을 무릅쓰지 않은 사람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사무엘 신부는 진정한 승자입니다."
-<그래도 꿈꿀 권리> 한나 알안 주교의 '추천의 말' 중에서

"어느 순간 '절망과 분노, 부모에 대한 원망으로 평생 살 것인가'를 스스로 묻게 됐습니다. 남을 탓하며 이렇게 살지, 아니면 내가 새로 만들어갈 것인지, 하는 질문이었어요. 약한 자만이 부모를 원망한다는 생각이 들었죠. 구분을 하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부모의 역할은 태어나도록 도와준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을 고쳐 봤어요. 앞으로의 일들은 내가 해나가야겠다고 마음먹게 됐습니다. 이겨내야 했으니까요."
순간순간 스스로를 '최고의 존재'라고 습관적으로 생각하자 마음은 이내 평온해져 갔다. 서강대에서 라틴어 강의를 하면서 만나게 된 많은 학생들에게 그는 꼭 '네가 지금 이 순간만큼은 최고의 존재'라고 생각하라고 전한다. 그 순간들이 모여 어떻게 다른 미래를 만들어낼지 한 신부는 이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꿈꿀 수 없는 사회'라 말하는 젊은 그대들에게

 

"지금 우리 현실에는 나를 비판하고 폄하하는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고 옹호해 주는 사람들보다 훨씬 많아요. 이런 세상 속에서 나 스스로라도 나를 덜 괴롭혀야 합니다."
서강대학교에서 라틴어 강의를 맡고 있는 한동일 신부는 어느 날 한 학생의 주눅 든 목소리를 듣는다.
"선생님, 저 너무 못했어요. 죄송합니다…."
충분히 빛날 가능성이 있는, 그 시절의 자신보다 훨씬 많은 것들을 가진 어린 학생의 자괴감 앞에서 한 신부는 마음이 조급해졌다.
"아무리 누군가 호통을 쳐도 나 스스로는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야 돼요. 그 친구에게는 성적이 안 나왔다고 의기소침하지 말라고 답해줬고, 다른 친구들에게도 꾸준히 '스스로를 위로하는 천사가 되어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어쩌면 모두 외톨이다. 함께 있으면서도 괜찮다고 보듬어 주거나 힘껏 위로해 주는 일이 얼마나 될까. 한 신부는 스스로 다독이고 위로하는 힘은 곧 누군가를 따뜻하게 보듬을 수 있는 힘으로 더 커져간다고 덧붙였다.
"'꿈꿀 수 없는 사회'. 강단에서 만난 학생들은 지금 사회를 이렇게 이야기해요. 누가 이 젊은 사람들을 몰아세우고 가로막았을까요. 꿈이 없이 건조한 마음 상태로, 어떤 한 곳만을 향해 울상을 한 채 겨우 가고 있을 뿐이에요. 의기소침해지고 당당하지 못한 그들에게 저는 크고 작은 제 실패담들을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2010년 2학기부터 서강대학교에서 시작한 한동일 신부의 라틴어 강의를 듣는 학생들은 24명이었다. 그런데 한 학기가 지나니 70명, 또 한 학기가 지나자 140명, 다음 학기에는 200명으로 늘었다. 수용 인원이 240명인 강의실로 옮기면서 수업을 들을 수 있는 학생 수가 제한됐다. 그는 학생들을 '친구'라고 부른다.
"저의 제자들, 친구들을 만나면서 참 많은 것을 느꼈어요. 그 나이의 저와 비교해 보면 교육 수준을 비롯해 외국어 능력, 경험의 양과 질 등 모든 것이 우수한 아이들인데 대체로 자신감이 없고 의기소침한 모습들입니다."
학생들에게 그는 '공부를 해야 하는데 하지 않고 있는 나 자신을 볼 때 가장 괴로웠다'는 사실을 털어놓기도 했다. 그 말이 끝나자 학생들은 모두 박수를 쳤다.
"거창한 삶도, 모범이 되는 사람도 아니지만 내 어려웠던 과거와 실패담을 공유하면 도움이 될 거라고 느꼈어요. 이같은 소통이 시작되고부터 1~2년이 지나 그 이야기들을 체계화해 보고자 글로 엮은 것이 이번 에세이죠."
지금의 자리에 대해 자부심을 느끼기보다는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다는 그의 말은 식상한 겸양처럼 들리지 않았다.
"제 개인적인 능력보다 좋은 선생님을 만났던 것이 더 도움이 됐기 때문이에요. 지금까지도 훌륭한 멘토인 한나 알안 선생님에 의해서 라틴어를 시작하게 됐고 몰랐던 세계에 도전하게 됐으니까요."
비유럽인이 습득하기 힘든 라틴어로 수업을 받고 시험을 볼 만큼 능숙하지 않았던 언어 실력으로 그가 로타 로마나 변호사를 꿈꾸기는 힘들었다. 자신이 공부했던 책을 건네며 숙제를 내주고 '결국 이뤄낼 것이다'라고 격려를 지속했던 그의 선생 한나 알안 주교가 아니었다면 말이다.
"선생님에 의해 새로운 세계를 접하게 되었고 그 세계를 향해 본격적으로 가게 됐죠. 당연히 너무나 어렵고 힘든 길이었는데 그때 제게 아주 특별한 격려를 해주셨어요. '처음 길을 가는 사람만의 특권이 있다. 네가 느끼는 어려움을 특권이라고 생각하라'는 말씀이었죠. 길은 더 뚜렷하게 보이기 시작했어요.

절망과 체념을 내일로 미루는 삶

 

한동일 신부가 학생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에게 자주 하는 이야기가 있다. 그는 스스로도 너무 반복해서 질릴 만도 하지만 그래도 변함없이 이 이야기를 전하고 싶다고 했다.
"우리는 일상을 보내면서 이런저런 이유로 해야 할 일들을 자꾸 뒤로 미루게 되죠. 어떤 것을 계획했고, 왜 꼭 해야 하는지 분명히 알고 있는데도 그래요. 습관적으로 내일로, 혹은 다음으로 미룹니다. 그런데 왜 절망하는 것, 포기하는 마음은 내일로 미루지 못할까요?"
한동일 신부는 '우리가 하루에 감당할 수 있는 고통과 절망은 그 양이 정해져 있다. 그것을 넘어선 나머지는 내일로 미뤄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한인 최초의 바티칸 변호사 한동일'에 대해 국제적인 무대 안에서 한국의 위상을 높여줄 것을 기대하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한동일 신부의 계획은 좀 다르다.
'가난하고 서툴렀던 청년 한동일'을 떠올리게 하는, 절망하고 있는 청년들과 만나 속내를 듣고 생각을 공유하는 시간을 더 많이 가지고 싶다고 그는 말했다. 그는 눈을 빛내며 강의를 듣는 학생들을 마주할 때, 앞으로의 사명이 더욱 선명해진다고 했다.
"젊은이들의 침체된 현재가 달라질 수 있도록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자신의 꿈이 지닌 힘을 믿고, 그 꿈이 만들 기적을 기대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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