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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법대 출신 정제천 신부의 사제가 된 사연
서울법대 출신 정제천 신부의 사제가 된 사연
  • 이시종 기자
  • 승인 2014.09.19 07: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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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황 통역으로 주목

세 번 연거푸 일어난 기적, 그는 사제의 길을 결심했다

 
교황 통역을 담당한 정제천 신부가 화제다. 정제천 신부는 8월 14일 프란치스코 교황이 성남 서울공항을 통해 방한한 뒤로 교황의 곁을 줄곧 지켰다. 그는 프란치스코 교황과 같은 예수회 소속인데다 교황의 고향인 아르헨티나의 모국어인 스페인어에 능통하다는 점 때문에 교황이 한국 땅에 발을 내딛는 순간부터 늘 함께했다.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판검사를 꿈꾸던 그가 사제의 길을 걷기로 한 사연은 무엇일까.

취재 이시종 기자 | 사진 서울신문

지난 8월 14일 프란치스코 교황이 성남 서울공항을 통해 방한할 때 교황의 곁을 줄곧 떠나지 않은 사람이 있었다. 통역을 맡은 정제천 신부다. 정 신부는 지난 6월 초 예수회 총장 아돌포 니콜라스 신부로부터 예수회 차기 한국관구장으로 임명돼 9월부터 한국관구를 이끌게 됐다.
정 신부는 한국관구장에 임명된 뒤에도 모습을 드러내기를 꺼렸다. “아직 임기가 시작되지 않았다”는 게 표면상 이유였지만 사실은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과 관련해 중책을 맡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방한 기간 내내 교황의 한국 내 수행비서 겸 통역을 겸했다. 교황청과 함께 교황의 빡빡한 일정 관리는 물론 눈과 귀, 입 역할을 도맡아 한 것이다.
정 신부는 입국장인 서울공항에서 교황이 영접 나온 박 대통령과 인사할 때도, 세월호 참사 유족을 비롯한 다른 환영객들과 얘기를 나눌 때에도 교황의 곁을 지켰다. 또 공항에서 나와 숙소인 주한교황청대사관으로 향하는 국산 소형차에도 교황 옆에 나란히 앉아 눈길을 끌었다.
정 신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그의 색다른 이력에도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됐다. 그는 국내 최고의 학부로 알려진 서울대 법대 출신의 법학도이다. 판검사를 꿈꾸던 그가 사제의 길을 걷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5·18때 아버지가 보안사 끌려가…
기도대로 이뤄져 사제의 길 선택

정 신부는 판검사를 꿈꾸던 법학도였다. 서울대 법대를 졸업한 그가 사제의 길을 걷기로 한 데는 이 땅의 고난과 무관치 않았다. 그는 광주에서 태어나 광주제일고와 서울대 법학과(77학번)에 입학해 공부했고, 1990년 예수회에 입회해 1996년 사제로 서품됐다. 지난 1994~2000년 스페인으로 건너가 영성신학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와 젊은 시절을 함께 보낸 대학 동문들과 예수회 신부들은 “정제천 신부는 한마디로 매우 진중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평했다. 대학 재학 시절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아 서울대 교내 이념서클인 농촌법학회 회원으로 활동했다.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과 심재철 새누리당 의원 등이 농촌법학회 출신이다.
그는 친구들에게 “법으로 세상을 바꾸고 싶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래서 사법시험 공부도 했다. 한 대학 동문은 “당시 정 신부는 여느 젊은이들과 다르지 않았지만 사회 현상을 고민했고 사색이 깊었다. 생각이 많은 청년이었다”며 “사범시험 준비도 했다”고 회상했다. 한국일보 기자 출신인 이백만 전 청와대 홍보수석은 자신의 SNS에 “학창시절 동아리 활동을 같이 한 그분(정제천 신부)을 잊을 수 없었다”며 “그는 사법고시(시험)에 합격해 법으로 세상을 바꿔보려 했다”고 적었다. 이어 “시간이 흐르고 스페인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그를 만나 술의 힘에 기대 왜 판검사의 길을 포기하고 사제의 길을 갔느냐고 물었다”며 “광주사태가 그를 사제로 만들었다”고 했다.
이 전 홍보수석의 말처럼 그가 사법시험을 포기하고 성직자의 길을 걷게 된 배경은 1980년 발생한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무관치 않은 것으로 전해진다. 광주 출신인 그에게 5·18은 큰 충격과 좌절로 다가왔다는 주변의 전언이다.
그가 대학 재학 중이던 1980년, 고향인 광주에서 5.18이 일어났다. 시민들은 신군부독재에 맞서 계엄령 철폐와 전두환(全斗煥) 보안사령관을 비롯한 신군부 인사들의 퇴진, 김대중(金大中) 석방 등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당시 군인들은 금남로 등 시내 중심가에서 학생으로 보이는 청년이나 여자를 마구 구타하고 짓밟으며 찌르는 등 잔인하게 시위를 진압했다. 이때 보안사 등에 끌려가면 고문으로 목숨 보전을 기약하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때 정 신부의 부친이 이유 없이 보안사에 끌려가게 됐다. 아버지에 대한 걱정으로 그는 절실한 마음으로 기도를 올렸다고 한다. 정 신부는 “아버지를 풀려나게 해주시면 제 몸을 하느님께 봉헌하겠다”고 기도했다. 그런데 우연일까, 아버지가 풀려났다. 아무 상해도 입지 않고 풀려난 것이다. 정 신부는 그때만 해도 우연이겠지, 하고 넘어갔다고 한다.
그런데 가장 친한 고향 친구도 보안사에 끌려갔다. 정 신부는 이때도 같은 기도를 했다. 그 친구도 풀려났다. 또 자신이 다니던 서울 동대문성당의 김승훈 신부가 미사 강론 중 ‘광주에서 신군부의 학살 만행’을 최초로 공개했다. 역시나 김 신부는 곧바로 보안사에 연행돼 갔다.
그러자 정 신부는 눈물을 흘리며 같은 기도를 올렸다. 다행히 김 신부가 풀려나왔다. 세 번 연거푸 일어난 기적.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반복적인 일이었다. 정 신부는 세 번이나 기도대로 된 것을 우연으로 볼 수 없다며 그 일을 계기로 사제의 길을 택하기로 했다.

빈자들의 벗으로 사는 삶

▲ 사진 오른쪽이 정제천 신부
정 신부의 한 고교·대학 동창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젊을 적 그이의 성품에 관해서 이렇게 회고했다.
“공무원이었던 아버지가 사업을 하다 실패해 어렵게 생활했어요. 자신도 어렵게 대학을 다니면서도 정 신부는 서울 대방동의 이바돔이란 야학에서 검정고시를 준비하는 학생들에게 공부를 가르치기도 했어요. 옛 기억을 더듬어 보면 정 신부는 앞에 나서지 않고 조용히 자기 할일만 하던 친구였어요.”
정 신부는 1980년대 초반 한국외방선교회에 들어가 사제의 길을 걷다가 1990년 2월 소속을 바꾸어 예수회에 입회했다. 이어 스페인 코미야스 교황청대에서 1994년부터 2000년까지 유학해 석·박사 학위를 받고, 그사이 1996년 7월 사제품을 받았다.
그는 사제가 되어서도 가난한 이들을 잊지 않았다. 한때는 지난 6월 선종한 빈민의 대부인 정일우 신부와 함께 서울 공덕동 빈민가에 기거하며 빈민들과 어울려 살았다. 또 지난해 대한문에서 쌍용차 해고 노동자를 위해 사제들이 225일간 미사를 봉헌할 때도 종종 함께했다.
교황은 예정에 없이 그가 사는 집, 즉 예수회 사제관도 방문했다. 그때 제주 강정마을에서 제주해군기지 반대운동을 펼치다가 막 올라온 김성환·이영찬 신부와 박동현 수사를 소개하자 교황은 “최고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격려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 신부는 9월부터 예수회 한국관구를 이끌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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