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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코이아 원시림&요세미티 국립공원에서 만난 대자연의 섭리
세코이아 원시림&요세미티 국립공원에서 만난 대자연의 섭리
  • 이시종 기자
  • 승인 2014.10.08 05: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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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환의 미국 거꾸로 보기

“밉게 보면 잡초 아닌 풀이 없고, 곱게 보면 꽃이 아닌 사람 또한 없다”

 
가족들과 미국 서부 대자연을 감상하기 위해 휴가를 떠났다. 웅장하게 펼쳐진 대자연의 수려한 풍경에 감탄사를 연발하기도 잠시, 대자연 앞에서 인간은 한없이 미약한 존재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는다. 더불어 한낱 자연의 부속일 뿐인 인간이 개인의 욕심과 사리사욕을 위해 끝없이 욕망에 도전하며, 서로에게 생채기를 내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글·사진 박영환(KBS LA특파원)

#1 본디 세상의 주인은 자연인데, “조급한 새들은 왜 탓하나?”

사막지대 미국 서부 LA에 산 지 1년이 지났다. 화씨 110도의 높은 열기에도 나무 그늘만 찾으면 선선하고 땡볕에서 양복을 입어도 등이 따듯한 느낌 이외에 불쾌감이 없었는데 올해는 딴 세상처럼 느껴진다. 기후변화로 인한 눅눅한 습기 탓이다.
새들도 특이한 공격적 행동을 드러내 뒷마당 석류와 단감나무가 수난당하고 있다. 지난해는 석류가 익어 벌어지고 단감이 맛이 든 뒤에야 새들이 서리를 해갔는데 올해는 설익은 걸 손대고 있다. 새떼들이 조급해졌다.
나는 새떼를 불청객으로 여겼고, 소리를 질러대기 시작했다. 아내는 놔두라고 성화지만 나는 황금 벼를 지키는 ‘허수아비 아저씨’처럼 쉬지 않고 열심이다. 반쯤 익은 석류, 떫은맛 땡감의 절반이 부리에 찍혀 부서졌다. 내 몸에 상처가 난 듯 마음이 아프다.
어린 시절 한국에서 감을 딸 때 할아버지는 나무 꼭대기에 잘 익은 걸로 골라 10개를 남겨 두셨다. 참고 기다려준 까치에게 주는 선물이다. 자연의 일부인 새와 수확물을 나누는 까치밥은 ‘공생의 가치’를 온몸으로 보여준다. 더 이상 새를 미워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석류와 단감을 키워온 물과 햇빛, 바람, 나비와 벌이 모두 자연인데, 내가 과일의 주인이라고 새들에게 우길 근거는 박약했다.

#2 세코이아에서 만난 거목들-“한없이 작아지는 나를 발견하다”

미국 서부는 자연이 강점이다. 특히 시에라네바다 산맥 주변 세코이아와 요세미티 국립공원은 때 묻지 않은 생태와 원시 지구의 거친 근육을 간직하고 있다. 차를 몰고 가는 첫 가족 여행지로 택한 이유이기도 하다. 지리산 산골에서 태어나 산독수리 새끼를 잡아다 키우며 중고등 시절을 보낸 나에게 자연은 놀이터였고 친구이자 스승이었다.
기대감 때문인지 새벽 4시에 기상을 했다. 사막지대 특유의 메마르고 황량한 들판을 달리고 천길만길 낭떠러지를 거슬러 오르자 해발 1천800m 세코이아의 대 원시림이 나타났다. 지구상 거대 나무의 반이 뿌리를 내린 곳이다. 형언할 수 없는 깊고 짙은 나무 향기가 코를 파고들었다. 이익이냐 손해냐를 가늠하며 세파에 찌들고 위축됐던 심장은 청정 연료를 공급받아 회전 속도를 높였고 나는 슈퍼맨처럼 숲속을 훨훨 날았다.

 
비행 20여 분쯤 지나 세계에서 부피가 가장 큰 나무인 셔먼 장군(General sherman)을 만났다. 적갈색 삼나무로 2천 2백 살에 키는 84m, 둘레 31m, 무게는 2천t이다.
초등학생인 아들은 장군 나무가 존경스럽다고 했다. 씨앗이 싹을 틔우고 자라서 온갖 풍상을 다 견디며 장군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기까지 그 인내심이 대단하다는 거다. 나는 인간적 기준으로 ‘장군’이라 부르는 게 영 거북했다. 다른 거목들을 맥킨리와 링컨 같은 대통령 이름으로 부르는 것도 불편하다. 정치지도자들의 업적을 거목에 은근슬쩍 대비시키려는 불순함이 느껴져서다.
셔먼 장군 같은 거목은 하루 20t의 물을 몸 안에서 순환시켜야 생존한다. 단단한 껍질로 덮인 거목 속살의 세관과 물관에서 쉼 없이 이뤄지는 우주적 속도의 순환과 소통에 주목한다면 누가 감히 거목에 자신의 이름을 붙이겠는가.

#3 요세미티 국립공원의 새벽 별-“빛과 어둠은 마음 속 욕망의 차이다”

다시 거대 산맥의 산길을 4시간 달려 깜깜한 밤에 요세미티 국립공원에 도착했다. 가족들은 고정 천막으로 된 숙소인 ‘커리 빌리지’에 이틀간 묵었다. 밤에는 곰이 내려온다기에 음식물과 화장품 등은 숙소 앞 철제 창고에 넣어두었다. 6.6㎡(약 2평)의 숙소는 아름드리 소나무 숲 사이에 자리해 있었다. 달랑 전등불 하나와 침대 4개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화장실과 샤워장이 공용이라 불편하지만 미국서 가장 밝은 별을 볼 수 있어 1년 전 예약을 해야 자리가 난다.
문명의 상징인 인공의 불빛을 피해 자연의 빛을 만나는 건 영혼을 씻는 제례행위다. 숙소를 나와 무작정 숲길을 걸었다. 하늘에 맞닿은 소나무를 타고 쏟아져 내리는 별빛으로 수백 채의 천막은 은하수 마을 같았다.
인공 불빛에 익숙해선지 길이 막막했지만 이윽고 편해졌다. 요세미티의 숲은 어둠보다 빛이 더 많았다. LA 같은 도심이 밝다고 생각해온 것은 완전한 착각이었다. 그 순간 중학교 시절 읽고 가슴이 설레었던 알퐁스 도데의 소설 ‘별’이 떠올랐다. 나는 순진한 양치기 소년이 되었다. 밤이 깊어가고 어둠이 짙어갈수록 별빛은 더욱 강렬했다. 우주의 별뿐만 아니라 각자 가슴에 품고 있는 별도 그럴 것이다. 잡다한 이해관계와 성패의 두려움을 도드라져 보이게 하는 인공의 불빛을 꺼야만 또렷하게 보일 것이다.
세상이 어두운 것은 주변의 불빛이 약해서가 아니라 마음속 욕망의 불꽃이 너무 밝아서이다.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요세미티의 숲속 길이 대도시의 도심보다 더 밝을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4 대자연 여행- “지식과 논리의 한계, 오만의 위험을 깨우치다”

▲ 대자연으로 떠난 휴가는 아내와 아이들에게도 값진 추억이 되었다. 우리 가족은 오늘의 경험을 계기로 다시 한 번 서로에 대한 배려와 존중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여행은 일상의 눈에서 벗어나 자연의 마음으로 세상을 보는 창이다. 여행은 서서하는 독서고 독서는 앉아서 하는 여행이라는 말이 그래서 나왔나 보다. 여행과 독서는 일탈적 삶의 일부이면서 보완관계다. 끝없이 목표와 욕망에 도전하는 승리지상주의에서 벗어나 삶의 한계와 나약함, 쇠퇴를 자연을 통해 배우는 계기다.
인간의 생로병사는 길어야 90년이지만 거대한 자연의 여정은 거목 샤먼 장군이 보여주듯 2천 년을 훌쩍 넘어선다. 요세미티의 반구 돔은 500m가 넘는 수직 절벽을 거슬러 올라선 사람들로 늘 만원이다. 그런데 맞은편 몇 km 떨어진 전망대에선 육안으로 볼 수 없고 망원경을 꺼내들어야 개미의 크기로 다가온다. 이 순간 인간의 눈과 망원경이 말하는 진실은 맞선다. 인간들은 진실을 힘주어 말하고 옳고 그름을 따지길 즐긴다. 이른바 논리와 지식이 창이고 그 방패다.
그런데 사막에도 홍수가 나듯이 인과관계 규명이 어려운 복잡계의 현실은 늘어만 간다. 정파적 다툼은 물론이고 종교와 인종 간 전쟁, 동족간의 이념적 전쟁의 뿌리는 지나친 확신이 주는 ‘오만’이다. “천하는 불가사의한 그릇이어서 인위적으로 어찌할 수 없다. 잘하려고 애쓰
면 실패하고, 꽉 잡고 장악하려 하면 천하를 잃고 만다”는 노자의 말은 참으로 쓸모가 있다.

대자연으로 떠난 휴가는 아내와 아이들에게도 값진 추억이 되었다. 우리 가족은 오늘의 경험을 계기로 다시 한 번 서로에 대한 배려와 존중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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