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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예계 재벌 1위에 오른 원로배우 신영균
연예계 재벌 1위에 오른 원로배우 신영균
  • 이시종 기자
  • 승인 2014.10.10 06: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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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천억원에 가까운 재산… 500억 기부한 영화계 대부

 
연예인 출신 최고 부자는 누구일까? 최근 재벌닷컴이 연예인 출신 부자 순위를 공개했다. 1위에 오른 인물은 SM의 이수만도, YG의 양현석도 아니었다. 원로배우 출신인 신영균 제주방송 명예회장이다. 재벌닷컴에 따르면 그는 2천830억원으로 최고 부자 연예인으로 꼽혔으며, 국내 재벌 전체 순위는 155위다. 원로배우 신영균은 누구인가

취재 이시종 기자 | 사진 서울신문

연예인의 재산은 대중의 관심이 가장 높은 분야이기도 하다. 내가 좋아하는 스타는 재산이 얼마이고, 또 가장 부자인 연예인은 누굴까.
최근 이색적인 발표가 있어 대중의 관심을 끌었다. 연예인 출신 부자 순위가 공개된 것. 재벌닷컴은 최근 7월 말 기준으로 국내 연예인의 최고 부자 순위를 매겼다. 그렇다면 1위에 오른 연예인은 누굴까? 국내 대표 엔터테인먼트 기업으로 꼽히는 SM과 YG의 대주주 이수만과 양현석일까? 정답은 원로배우 출신 신영균 제주방송 명예회장이다.
신영균 회장은 재산이 2천830억에 다다른 것으로 알려졌으며, 그 뒤를 이수만 SM엔터테인먼트 회장(2천520억원), 양현석 YG엔터테인먼트 대표(2천210억원)가 이었다. 신 회장은 얼마 전 국내영화 발전을 위해 개인 재산 500억원을 기부하며 화제가 되기도 했다.

치과의사에서 배우로, <빨간 마후라>로 원조 한류스타

1928년 황해도 평산에서 태어난 신영균 회장은 치과의사 출신으로 1955년 서울대학교 치과대학을 졸업했다. 치과의사로 활동하던 1960년 영화감독 조긍하에게 발탁돼 32세의 나이에 영화 <과부>를 통해 배우로 데뷔했다. 그 후 본격적으로 영화배우 활동을 시작해 <마부> (1961), <연산군>(1962), <열녀문>(1968), <빨간 마후라>(1964) 등에 출연하면서 김진규, 최무룡, 신성일 등과 함께 당대 최고 배우로 군림했다.
사극과 문학작품을 영화화하는 작품에서 신영균은 발군의 연기력을 과시, 독특한 개성을 발휘했다. <마부>로는 한국 영화사상 최초로 베를린 영화제 은곰상을 수상하고, 1962년에는 <연산군>으로 대종상 남우주연상을 차지하며 데뷔 2년 만에 연기파 배우로 자리매김했다. 그는 대종상 남우주연상 3회, 아시아 영화제 남우주연상 2회 수상의 기록을 갖고 있다.
그의 출연작 중 단연 압권은 <빨간 마후라>이다. 이 영화로 아시아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면서 ‘원조 한류스타’라는 별명을 얻었다. 18년 동안 294편의 영화에 출연했으니 그의 영화에 대한 열정과 재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이렇게 배우로 승승장구하던 그는 1970년대 돌연 은막에서 모습을 감췄다. 1978년 <화조>를 끝으로 배우 활동을 마감했다. 유신정권 아래 영화에 대한 사전 검열이 심해지면서 영화계가 침체된 것이 큰 이유였다. 그는 얼마 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당시의 분위기를 이렇게 말했다.
“당시 군사정권이었죠. 검열도 많았습니다. 예를 들어 권총을 쏘는 장면도 ‘왜 이 각도에서 총을 쏴야 하느냐’ 등의 이유로 가위질을 많이 당했어요. 그러다 보니 영화에 대한 매력도 없어지고 편수도 줄고, 관객 또한 마찬가지로 흥미를 잃게 됐습니다.”

연예계를 대표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

그는 배우를 은퇴하고 사업가로 변신했다. 명보극장을 경영했으며, 1991년 서울방송(현 SBS)이 창립될 때 주주로 참여했다. 그가 부자라고 소문이 나기 시작한 것은 1999년 제주 남원읍에 ‘신영영화박물관’을 건립한 이후부터였다.

▲ 신영균이 1999년 제주 남원읍에 건립한 ‘신영영화박물관’
그는 어떻게 부를 일궜을까. 그는 몇 년 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내 인생의 특징은 실패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라며 “나는 부자가 되려고 무리하게 욕심을 내지도 않았고, 무리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배우 시절 영화배우라는 직업을 늘 불안하게 생각했다고 했다. 그래서 1960년대 친구와 함께 서울 금호동에 동시 상영을 하는 ‘금호극장’을 지었다. 영화는 많으나 극장이 턱없이 모자라는 현실에서 투자를 한 것이다. 이후 명보극장 바로 옆에 있는 명보제과를 인수했다.
이때 그의 아내인 김선희 씨가 팔을 걷어붙여 직접 빵을 굽고 장사도 하면서 사업을 키워 나갔다. 당시 명보제과는 뉴욕제과와 태극당, 풍년제과 등과 함께 4대 제과로 꼽힐 정도였다. 그러던 1977년 8월 명보극장을 인수하게 된다. 이후 <지옥의 묵시록>과 <빠삐용> 등의 외국 영화와 <내가 버린 여자>, <속 별들의 고향>, <미워도 다시 한번> 등의 한국 영화가 잇달아 대박을 터뜨렸다.
배우로서는 1970년 은퇴를 한 셈이지만, 영화에 관한 열정은 여전히 뜨겁다. 그가 영화박물관을 설립한 것도, 영화 발전을 위해 거금을 내놓은 것도 식지 않은 영화에 대한 애정 때문이다. 그는 2010년 500억원 규모의 재산을 영화와 문화예술 발전을 위해 기꺼이 내놓았다.
그가 선뜻 내놓은 기부 재산 중 서울의 명보극장은 스스로 재산 목록 1호로 생각하며 아껴온 부동산이다. 또 제주도의 주요 관광명소가 된 남제주군 남원리 절경지에 약 100억원을 투자한 것으로 알려진 신영영화박물관의 시설물과 1천여 점의 전시물도 기부 재산에 포함돼 있다. 15대, 16대 국회의원으로 활동할 만큼 사회에 대한 관심도 많은 그였기에 몸소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는 인물로 꼽히기도 한다.
인간 신영균을 가까이서 지켜 본 많은 사람들은 그의 매력은 재력에 있지 않고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근면검소와 겸손한 인품에 있다고 말한다. 그는 이미 오래 전부터 표시가 나지 않았을 뿐 부자로 살면서 크고 작은 선행을 쉬지 않고 해왔다.
지난 2006년 결혼 50주년을 맞아 한국국제기아대책기구, 한국복지재단 등에 총 1억원을 기부했고, 2008년 제7회 대한민국 영화대상에서 공로상을 수상한 다음에는 수상금 1천만원 전액을 불우이웃에게 써 달라며 기부했다. 또 2010년 아이티 지진 피해 주민 돕기 성금으로 굿네이버스에 10만 달러를 쾌척했다. 당시 그는 브래드 피트, 안젤리나 졸리 부부의 기부 소식을 듣고 ‘대중의 사랑으로 자라는 영화인으로서 받은 사랑을 조금이라도 돌려주고 싶다’는 뜻으로 기부에 나선 것으로 알려졌다.
연예계를 대표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했다는 평을 들은 신영균은 2013년 5월 포브스가 선정한 ‘아시아 기부 영웅 48인’(48 Heroes of Philanthropy) 명단에 오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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