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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명장’ 김영모과자점 김영모 대표
‘대한민국 명장’ 김영모과자점 김영모 대표
  • 박천국 기자
  • 승인 2014.10.17 23: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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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품 제과 기업을 일군 ‘빵 굽는 CEO’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명장인 ‘김영모과자점’의 김영모 대표는 40년 넘게 제빵·제과 업계에 종사해 온 장인 중의 장인이다. 그가 명장으로서 존경받는 이유는 빵을 만드는 실력뿐만 아니라, 인생 역경을 극복하고 업계 최고의 자리에 올랐기 때문이다. 가난과 배고픔, 고독을 스스로 이겨내고 성공 신화를 이뤄낸 그는 정직을 기반으로 김영모과자점이 오래도록 전승되는 천년 기업을 꿈꾼다.
취재 박천국 기자 | 사진 양우영 기자 | 의상 및 안경협찬 에트로, (주)이안옵틱 장소협찬 김영모제과점

Part 1. 어려운 환경을 딛고 ‘제빵 왕’을 꿈꾸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친척들의 도움을 받으며 자랐다. 대다수가 풍족하지 못했던 시절, 눈칫밥을 먹어야 했던 그는 사춘기에 이르자 자립을 결심하고 무작정 가출했다. 그는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 제과점을 문을 두드렸고, 그것이 제과·제빵 업계에 발을 담그게 된 출발점이었다.

이재만 제과·제빵 기술로 집안을 일으킨 자수성가형 경영인이신데, 제과·제빵 기술을 배우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습니까
김영모 제과·제빵에 입문한 계기는 여러 가지 가정적인 문제 때문입니다. 제가 갓 태어나자마자 부모님께서 이혼을 하셨어요. 그 이후로 아버지 밑에 살게 됐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저를 데리고 살 수 없는 형편이어서 작은아버지 댁에서 살아야 했죠. 초등학교 5학년 때 아버지가 사시는 곳에 처음 갔는데 먹을 쌀이 없을 정도로 가난했어요. 당시에 배가 너무 고파서 초등학교 앞 빵집 앞에서 빵맛을 상상하고 냄새를 맡으면서 허기를 달랬던 적도 있죠. 그러다 외갓집을 찾아가서 모처럼 안정된 생활을 하게 됐지요. 그러다 갓난 아이 때 헤어졌던 어머니와 첫 대면을 했는데, 저에게 ‘재혼을 했기 때문에 같이 살 수 없다’는 청천벽력 같은 말을 했죠. 그때까지 숱한 난관과 고통, 고난을 견뎌냈던 것은 어머니만 만나면 모든 것이 해결될 수 있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인데, 당시 어머니의 말에 모든 게 무너져 버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다음날 아침 아무 말 없이 떠나가는 어머니의 뒷모습을 먼 발치에서 지켜보며 어린 나이였지만 ‘성공해야겠다’는 꿈을 품었어요. 잘못된 가정사를 바로잡고 성공해서 어머니와 아버지를 찾고 싶다는 마음이 컸으니까요. 그런 마음을 가지고 도시에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으로 단식 시위를 벌였고, 정말 인자하셨던 외할아버지의 도움으로 이모 집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어릴 때는 괜찮았지만, 서서히 나이가 들고 사춘기가 되니 눈칫밥을 먹는 것이 너무 고통스러웠어요. 그렇게 고등학교 1학년 때 자립을 하고 싶어서 무작정 집을 나왔는데 막상 갈 곳이 없어 방황하던 중 문득 빵집 앞에서 허기를 달래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빵집에 취직하면 배고픔이 해결될 수 있을 것 같아서 수십 군데 발품을 팔아서 한 제과점에 취직을 할 수 있었죠. 그때부터 ‘빵 인생’이 시작되었던 겁니다.

이재만 명장님의 말대로라면 생계 유지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제빵사가 된 경우라고 할 수 있겠네요
김영모 많은 분들이 저에게 ‘소질이 있어서 빵을 시작했느냐’고 물어 옵니다. 그러면 저는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살기 위해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 말이죠.

이재만 주방 보조에서부터 시작해 전통적인 도제식 훈련을 통해 업계 최고의 자리에 오르셨는데, 아무래도 배우는 과정에서 힘들고 고달팠던 경험담이 많을 것 같습니다.
김영모 국내에서는 1990년 중반부터 제과·제빵 관련 학원이나 학교가 활성화되어서 그 전까지만 해도 모든 훈련 방식은 도제식이었어요. 물론 아직도 제대로 된 기술을 배우려면 도제식 교육을 받는 경우가 많지요. 정말 수많은 어려움을 견딜 수 있었던 건 오로지 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제과에 입문했을 때 선배들 역시 일본의 도제식 교육으로 배워서 후배들에게 기술을 잘 가르쳐주지 않았어요. 말 그대로 중요한 기술은 어깨너머로 살짝 배워야 했고, 그 당시에 억지로 알려고 하면 매도 많이 맞아야 했죠.
예전에는 연탄으로 물을 데우고 빵을 구웠는데, 그러다 보면 하루 종일 연탄가스를 마시면서 일을 하게 됩니다. 더구나 제가 잠을 자는 곳 역시 공장 위 다락이었는데, 그러다 보면 하루 종일 가스에 노출이 될 수밖에 없는 거죠. 하지만 그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은 명절 때였어요. 명절 때 공장 식구들은 모두 가족들을 찾아 떠났지만 저는 갈 곳이 없었어요. 추위에 떨고 굶어 가면서 3~4일을 기다려야 하는 고통, 그리고 가족을 향한 그리움이나 처절한 외로움이 명절 때면 극에 달했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이재만 그러한 시행착오와 시련을 통해 터득한 깨달음은 평생 간직해야 할 인생관 혹은 좌우명으로 남기도 하잖아요. 어떤 인생관이나 좌우명을 가지고 계신지 궁금한데요.
김영모 꿈은 가지고 있었지만, 사춘기 들어서면서 많은 방황을 했습니다. 어린 나이에 방탕하게 술을 먹고 담배도 피우다 보니 결핵을 앓고 투병 생활을 한 적이 있을 정도로요. 통제해 주는 사람도 없으니까 길거리에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시비를 거는 등 함부로 행동하는 경우도 있었죠. 그러다 군에 입대해서 터닝포인트를 찾게 되었습니다. 군에서 책을 많이 접하게 되었는데, 우연히 데일 카네기의 <행복론>이라는 책을 보게 되었어요. ‘걱정으로부터 자유’라는 대목에서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전환점을 찾게 되었고, 그때부터 공부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습관이 사회에 나와서도 이어져서 사업을 시작했을 때에도 주경야독으로 마케팅이나 경영에 관한 이론을 실전에 접목하곤 했죠. 지금도 우리 회사가 마케팅이나 경영적인 면에서 다른 업소에 비해 경쟁력이 떨어지지 않는 것은 아는 것을 실천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뭐든지 실천하자’는 것이 지금까지 제 인생의 좌우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재만 방금 말씀하신 <행복론> 중에 ‘걱정으로부터 자유’라는 대목은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인가요
김영모 한 미국인이 자살을 하려고 기차가 지나다니는 언덕 위에서 뛰어내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고 해요. 그런데 가만히 앉아서 모든 것을 체념한 상태가 되니까 오히려 마음에 평안이 찾아온 것이죠. 그러니까 최악의 상황에서 걱정과 부정적인 생각을 내려놓으면 더 나은 개선책이 떠오른다는 의미입니다. 저 역시 그동안 수많은 좌절을 경험하고 살다 보니 긍정적인 것보다는 부정적인 기질이 앞서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죠. 그 책을 통해서 긍정적인 사람으로 변화되면서 마음이 열리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길 수 있었습니다.

Part 2 ‘연매출 170억’의 제과 기업을 이루다

 
1982년 서울 서초구 서초동에 6평짜리 김영모과자점의 문을 연 김영모 대표는 프랜차이즈 기업의 공격적인 마케팅에 맞서 오직 맛과 서비스로 승부를 봤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맛과 품질, 서비스가 강남 주부들 사이에 회자되면서 서울을 대표하는 제과점이 됐다. 현재 김영모제과점은 1년에 160~170억원의 매출을 기록하고 있으며, 직원 수만 200명이 넘을 정도로 사세를 확장했다.

이재만 자신의 이름을 최고의 브랜드로 만드셨는데, 김영모과자점은 어떻게 탄생하게 되었고, 자신의 이름을 브랜드로 활용한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김영모 마지막 직장에서 모시고 있던 무교동 보리수과자점의 박천웅이라는 회장님이 있었어요. 그런데 그 당시에 사업을 시작하려고 회장님께 자문을 구한 적이 있습니다. 회장님을 찾아뵙고 ‘사업을 하고자 합니다’라고 말씀 드렸더니 가장 먼저 묻는 말씀이 ‘간판은 무엇으로 할 것이냐’는 것이었죠. 그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에 모든 상호에 외래어를 쓰는 게 유행할 때여서 ‘그것 때문에 고민하고 있습니다’라고 말씀을 드렸더니, 회장님께서 대뜸 ‘너 정도면 네 이름을 걸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하셨어요. 또 ‘그 이름을 달면 언제든지 초심을 잃지 않을 것’이라는 말도 덧붙여 해주셨고요. 그 당시 모두 외래어로 간판을 다는데 나 혼자만 이렇게 시대에 뒤떨어진 브랜드를 달아야 되나 고민했죠. 그런데 곰곰이 생각을 해보니 제 이름을 달아서 초심을 잃지 않고 명예를 지키기 위해 항상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되는 게 중요하겠다는 결심이 서게 되었습니다.

이재만 6평 정도 되는 매장을 오픈한 이후 사람들의 반응은 어땠나요? 아무래도 처음에는 입소문이 가장 중요했을 텐데요.
김영모 처음에는 바로 옆에 그 당시 유명한 프랜차이즈 매장이 있었습니다. 제가 운영하던 매장보다 2배 더 큰 매장이었죠. 그래서 어려운 점이 많았지만, 그 난관을 타개하기 위해 정말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하루에 빵을 서너 번씩 구워서 갓 나온 신선한 빵을 제공했고, 하나라도 완벽하지 않은 빵은 판매하지 않았어요. 이를테면 고객들은 잘 알지 못하는 작은 결점이라도 제 눈에 보이면 다 골라서 버릴 정도였으니까요. 시간이 지나자 고객들이 선물용 빵은 프랜차이즈 매장에서 사고, 스스로 먹을 빵은 저희 점포에서 사는 진풍경이 연출되기도 했습니다. 더 시간이 지나 브랜드 파워가 생기자 먹는 빵을 넘어 선물하는 빵이 될 수 있었죠.

이재만 선물용 빵이 되면서부터 제품 포장에도 신경을 쓰셨을 것 같아요.
김영모 모든 일이 그렇지만 제과점 운영은 혼자만 열심히 노력해서는 성공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아내의 내조가 중요했어요. 당시에는 고객의 70%는 주로 주부들이었는데 아내가 제품 판매에 책임을 지니까 한결 수월해질 수 있었죠. 특히 아내가 남편이 만든 제품을 더욱 더 돋보이게 만들기 위해 일본에서 자격증을 취득할 정도로 포장 공부를 직접 했습니다.

이재만 제과점을 운영하면서도 프랑스 르노또르 제과학교 연수, 독일 하노버대학 제과제빵과 수료, 미국 AIB Distance Learning을 졸업하는 등 자기계발에 소홀하지 않으셨던 특별한 이유가 있으셨나요
김영모 아무래도 제과·제빵이 주로 선진국에서 도입된 거잖아요. 제가 해외를 다닐 때만 해도 한국의 제과 수준이 상당히 뒤처져 있을 때였습니다. 가까운 일본 기술자들한테만 배웠기 때문에 일본식 빵과 과자밖에 없었던 시절이었죠. 제빵사로서 더 잘 만들고 더 많은 정보를 얻고, 또 새로운 소재들을 찾기 위해서는 해외에서 공부를 하지 않으면 안 됐습니다. 여유만 있으면 1년에 한두 번씩 해외 연수를 가곤 하는데, 장기 연수보다는 제가 부족한 한 가지를 정해서 한두 달 정도 단기 유학을 다녀오고 있습니다.

이재만 현재 5개 직영 매장에서 연간 약 170억원의 매출을 기록하고 있다고 하던데요. 그 비결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김영모 지금 잠실점은 오픈을 못 하고 있지만, 그것까지 합쳐야 총 매장이 5개가 됩니다. 작년 매출이 170~180억원 정도 되는데, 무엇보다 신뢰를 쌓아갔던 게 첫 번째 비결인 것 같습니다. 두 번째는 좋은 원부재료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유기농 밀을 사용하고 미네랄 성분이 다량 함유된 국내 천일염 등 좋은 재료를 쓴 것이 또 다른 비결이라고 생각합니다. 제품을 만들 때에도 얼마짜리 제품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보다는 우선 최고의 제품을 개발하고 나서 원가 계산을 한 후 제품 가격을 결정합니다. 타사 제품과 가격을 비교해서 판매가를 결정하지 않는다는 의미죠.

이재만 김영모과자점이 어느 정도 안정적인 매출을 올린 뒤에는 프랜차이즈 사업을 통해 매장을 늘려서 사세를 확장해 보고 싶다는 생각도 해보셨을 것 같은데, 어떠신지요
김영모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프랜차이즈 사업에 대한 제의를 많이 해옵니다. 프랜차이즈 사업을 하면 돈은 벌지만, 저는 그보다 더 큰 꿈이 있습니다. 일본이나 독일, 프랑스 등에 해외 연수를 가면 수백 년 된 전통 과자점들이 많아요. 그런 과자점은 구경만 해도 보이지 않는 사명감 때문인지 호흡이 달라지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일본의 경우 900년 된 전통 과자점이 있을 만큼 오래 된 과자점이 많은 편인데, 그 비결이 궁금해서 40일 동안 일본 30개 도시의 300개 제과점을 찾아다닌 적이 있어요.
그렇게 해서 알게 된 것이 지역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점과 오래된 제과점이라고 해서 변화하지 않는 과자점은 문을 닫게 된다는 사실이었죠. 결국 변화하면서도 전통을 지켜 나가는 점포들만이 수백 년을 이어왔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전통 과자에 현대적인 것을 덧입혀서 만드는 기술력, 순발력이 뒷받침되어야 ‘천년 기업’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천연기업이 되려면 장인정신으로 들여다봐야 하는데, 프랜차이즈로는 일일이 모든 점포를 점검하기가 어려운 측면도 있죠.

이재만 회사 직원이 200명 가까이 된다고 들었어요. 대한민국 명장이 생각하는 기업 운영 방식은 뭔가 특별할 것 같은데, 어떤가요
김영모 사업가로서 인건비를 줄이기 위해서는 생산 공정에서 자동화를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지만 빵을 만들 때 완전한 자동화를 이루는 것은 결국 획일적인 제품을 만들어내는 것에 불과해요. 결국 자동화를 하게 되면 대량 생산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 저희 기업은 다품종 소량 생산을 지향합니다. 물론 대량 생산이 수익적인 면에서 유리하지만, 빵의 경우 종류에 따라 서너 번씩 구워야 하기 때문에 인력이 소요될 수밖에 없죠. 전문 경영인이라면 이렇게 못할 테지만 저는 기능인이기에 이러한 소신을 굽히지 않을 수 있었던 겁니다.

이재만 대표님이 생각하는 성공의 요건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김영모 잘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빵을 잘 만들지 못했으면 성공하지 못했을 테니까요.

Part 3 시간을 초월한 ‘천년 기업’의 비전을 보다

 
대한민국 명장은 대통령령으로 그 지위를 부여받는다. 따라서 각 분야의 명장들은 그에 맞는 사회적 책임을 소홀히 하지 않아야 한다. 김영모 대표는 국내 최초로 천연 발효빵을 개발해 2007년 제과명장에 올랐다. 그 이후 청년 일자리 창출을 위한 김영모 아카데미 운영, 장애인 재단과 나눔 협약을 맺는 등 명장으로서의 사회적 책임도 잊지 않는다.

이재만 40년간 제과·제빵 현장을 지키고 계신데, 지금도 직접 빵을 굽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김영모 물론 제가 모든 빵을 다 굽는다고 말씀 드릴 수는 없지만, 요즘은 주로 인력이 교체되면서 발생하는 제품의 변화를 바로잡아 주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또 신제품을 개발하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어요. 요즘에는 제주도에서 생산된 유기농 밀과 같은 새로우면서도 건강한 재료를 찾아 제품화시키는 과정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이재만 외국의 경우 아버지의 직업을 아들이 물려받아 가업을 잇는 경우가 적지 않은데, 현재 아들이 동업에 종사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아버지이자 인생 선배로서 어떤 조언을 해주고 계신가요
김영모 제 아들뿐 아니라 제과 후배들에게 같은 조언을 많이 합니다. 하나는, 잘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것입니다. 어느 분야든지 자기 분야에서 최고가 되어야 해요. 둘째는, 한 분야의 지식에만 몰입하는 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다양한 지식을 습득하라는 것이죠. 그래야만 창의적인 제품을 만들어낼 수 있어요. 세 번째는, 인격을 갖춰야 합니다. 아무리 좋은 기술을 가져도 인간관계에 실패하면 낙오자가 될 수밖에 없어요. 이 세 가지는 꼭 지키라고 이야기합니다.

이재만 ‘제2, 제3의 김영모 명장’을 꿈꾸는 청년들을 위해 설립한 김영모 아카데미는 어떤 곳인지 소개를 부탁드릴게요.
김영모 아카데미는 일·학습 병행제라고 하는 독일식 시스템을 한국형으로 도입한 사업을 진행하고 있는 곳입니다. 직원들이 이론 교육을 받으면서 기술도 습득하고 나중에는 일한 만큼 급여도 받는 구조로 이뤄져 있어요. 근로자들은 수강료를 내지 않고 제과·제빵 기술을 배울 수 있고, 청년 실업률을 낮출 수 있어 여러 가지 면에서 필요한 사업입니다. 아쉬운 점은 국책 사업인데도 정부와 기업 사이에 괴리감이 있다는 것입니다. 현재 30명의 인원이 일·학습 병행제를 통해 취업한 상태인데, 그 인원을 끌고 가려면 연간 1억5천만원을 기업에서 부담해야 합니다. 정부와 기업이 공동 투자한다고 생각해야 되는데, 정부가 마치 돈을 넉넉하게 주는 것처럼 생각을 하고 있어서 이런 정책들이 제자리를 못 잡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대통령령에 의해 대한민국 명장이라는 지위를 부여받았기 때문에 명장으로서 사회적인 책임이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회사가 조금 투자를 하더라도 사명감으로 아카데미를 운영하고 있는 것이죠.

이재만 대한민국 명장회 명예회장을 맡고 계신데 대한민국 명장회는 어떤 곳이고, 명예회장으로서 어떤 활동을 하시는지 설명해 주세요.
김영모 대한민국 명장회의 소속 회원이 되려면 선발 과정부터 상당히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야 합니다. 96개 직종에서 1년에 12~25명 정도 탄생하는 수준이죠. 자신의 분야에서 얼마나 기능을 보유하고 있는지를 증명하려면 특허나 실용신안 등이 근거가 돼요. 또 자신이 가지고 있는 기술의 사회 공헌도를 봅니다. 따라서 사회를 위해 얼마나 재능 기부를 했는지도 판단 근거로 삼고 있죠. 현재 명장회에 소속된 인원은 작고하신 분을 빼면 570여 명 정도 됩니다. 이분들은 후진을 양성하면서 일명 ‘국보급 기술자’로서 활동하게 됩니다. 저는 명장회 명예회장으로서 명장의 처우 개선 등 정부에 애로사항을 전달하고, 반대로 정부 의견을 명장회에 전달하는 매개 역할을 하고 있어요.

이재만 앞으로 어떤 계획과 비전을 가지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김영모 큰 비전보다 김영모과자점이 대를 이어서 천년 기업이 될 수 있도록 토대를 마련하는 데 최선을 다하고 싶습니다. 우리 가족 모두 같은 일을 하고 있는데, 아내와 아이들에게 돈보다는 가치관을 심어주고 싶어요. 저희 제과점에서는 대를 이어서 찾아오는 고객들이 많습니다. 대를 잇는 천년 기업에 대를 이어 찾아오는 고객들이 많아지도록 제품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둘째로는 은퇴하고 나서 아카데미 운영에 더욱 전념하고 싶습니다. 노후에 제가 가지고 있는 지식과 노하우를 후진들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하는 게 제 생애 마지막 꿈이기도 합니다.

 
이재만 변호사 (법무법인 청파 대표)

여성가족부 정책자문위원, KBS2 사랑과전쟁2 부부클리닉 위원장, 대한체육회 법률고문, 경찰청 법률고문, 주병진·송일국·주지훈·권영찬 등 스타 사건 담당 변호사, KBS2 여성공감 ‘이재만 변호사의 드라마법정’, SBS ‘라디오로펌’등 다수 방송 프로그램 출연, 이재만 변호사는 친절하고 명쾌하며 알기 쉬운 법률 해설가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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