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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허 이태준, 그의 숨결을 찾아서
상허 이태준, 그의 숨결을 찾아서
  • 김이연 기자
  • 승인 2014.10.28 17: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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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인 생가 탐방

▲ 상허 이태준 가옥. 입구에서 가옥으로 들어서는 길목의 정원
상허 이태준은 아름답게 꾸민 말보다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깔끔한 글과 구성, 무엇보다 개성 있는 인물 묘사로 정평 난 한국 단편소설의 선구자다. ‘소설만으로 전업을 못 삼는 것은 슬픈 일’이라며 사랑해 마지않던 그의 대표작들이 탄생한 곳, 성북동 고택으로 그의 숨결을 찾아가 보자.

취재 김이연 기자 | 사진 맹석호 | 도움말 서울시청 | 참고도서 나는 문학이다(나무 이야기)

조선 말기 전통 가옥의 변형체, 이태준 가옥

▲ 상허 이태준 가옥. 서울시 성북구 성북로 26길 8 (성북동 248). 서울특별시 민속자료 제11호
상허(尙虛) 이태준 가옥은 소설가 이태준이 1933년에 ‘수연산방’이란 당호를 짓고, 1933년부터 1946년까지 머물면서 <달밤>, <돌다리>, <황진이> 등의 집필에 전념한 곳이다. 서울 성북구의 대표적인 명소로 1977년 서울시 민속문화재 제11호로 지정되었다. 이 가옥은 ‘성북동 이태현 가옥’으로 지정되었던 것을 이태준 후손들의 명칭 변경 요구에 의해 1998년 7월 10일 ‘상허 이태준 고택’으로 고쳤다가 2009년 2월 5일 지금의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당시 서울 교외에 세워진 규모가 작은 별장형 가옥으로, 앞에 작은 내를 두고 뒤에 동산을 낀 터에 서남형으로 자리 잡았다. 막돌로 쌓은 화장담에 세운 일각대문에 들어서면 건물은 대지의 동북쪽에 있다. 서남쪽으로는 우리나라 농촌의 정경을 느낄 수 있는 정원이 가꾸어져 있고 감나무와 사철나무가 있다. 원래 이 가옥 서남쪽에 행랑채 ‘상심루’가 있었으나 1950년 6·25 전쟁 때 없어지고, 지금은 그 자리에 외종손녀가 운영하는 전통찻집 ‘수연산방’이 들어서 있다.

한옥을 향한 애정이 깃든 집

▲ 정면 오른쪽에 위치한 안방
▲ 상허 이태준의 가족사진. 이태준 일가가 1943년 바로 이 가옥에서 찍은 사진이다. 이태준은 갓난애인 삼녀 소현을 안고, 아내 이순옥 등과 함께 장녀 소명, 차녀 소남,장남 유백, 차남 유진 등을 앞세우고 가족사진을 찍었다.
이 가옥은 전체적으로 볼 때, 서울 경기 지방에 전형적으로 보이는 ‘ㄱ’자형 평면을 바탕으로, 그 뒤쪽 전체에 방이 추가되어 ‘工’자형에 가까운 평면으로 구성되었다. 이는 조선 말기 전통 가옥이 시대적 요구를 수용하기 위해 규모를 확정하며 변형된 예를 보여준다.
이 가옥의 전면부는 정면 2칸 대청을 중심으로 서쪽인 왼편으로는 건넌방, 오른편으로는 안방을 두었으며, 안방에서 앞으로 꺾여 나온 곳에 누마루가 조성되었다. 이 누에는 ‘聞響樓(문향루)’라 새긴 부채 모양의 나무 현판이 걸려 있다. 대청과 건넌방 앞에는 툇간이 있으며, 건넌방 앞 퇴바닥은 약 10cm 정도 높였고, ‘亞’자 난간을 둘렀다.
건물의 후면부를 보면 건넌방 뒤에는 뒷방이, 대청 뒤에는 쪽마루가, 안방 뒤에는 부엌, 찬마루, 화장실이 각각 자리 잡고 있는데, 대청 뒤의 쪽마루는 뒷방과 부엌, 화장실을 연결하는 통로 역할을 한다. 대청 전면 처마 아래 왼쪽 칸에는 ‘壽硯山房(수연산방)’, 오른쪽 칸에는 ‘竹澗書屋(죽간서옥)’ 현판이 걸려 있다.
안방 남쪽의 누마루 세 면 주위에는 ‘亞’자 문양의 난간을 두르고, 건넌방 앞에 있는 들마루에도 ‘亞’자 문양의 난간이 있다. 그 밑으로 아궁이가 설치되어 있으며, 아궁이 앞에는 널판을 조각하여 달았다.

▲ 지면이 낮은 우물
안채 앞마당에는 마당보다 지면을 낮추어 우물을 설치하였고, 석상과 팔각석주 등이 있는 정원이 꾸며졌다. 이 가옥은 이러한 시설물과 외부 공간 구성으로 전통 가옥의 분위기를 느끼게 해준다.
이 가옥은 사랑채 없이 사랑방의 기능을 대신 가진 누마루를 안채에 집약시켜 합리적이고 기능적인 평면을 해결한 점, 안채에 필요한 실(室)을 뒤로 확장시켜 ‘工’자형에 가까운 평면으로 구성한 점, 부엌을 안방 뒤로 위치시킨 점, 화장실을 안채에 부속시킨 점 등에서 조선 말기를 지나면서 전통 한옥이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 주목된다.
이태준의 수필 <무서록>과 <목수들>에는 이 집을 지은 과정과 터의 내력 등이 묘사되어 있다. 이 가옥은 그가 수필에서 한옥의 맛과 구식 목수들의 인품을 칭송하였듯, 애정과 자부심이 서려 있는 집이다.

내가 조선집을 지음은 이조 건축의 숙박하고 중후한 맛을 탐냄에 있음이라. (중략) 그들의 연장 자국은 무디나 미덥고 자연스럽다. 이들의 손에서 제작되는 우리 집은 아무리 요새 시쳇집이라도 얼마쯤 날림기는 적을 것을 은근히 기뻐하며 바란다.
- 이태준 <목수들> 중

이태준, 그의 파란만장했던 삶

▲ 상허 이태준 비석
“소설만으로 전업을 못 삼는 것은 슬픈 일이다”라고 한 상허 이태준(1904~1956)은 비운의 삶을 산 소설가다. 이태준은 강원도 철원 출생이다. 구한 말 나라를 개혁하려고 개화당에 가담했던 아버지는 개혁에 실패하자 가족을 끌고 블라디보스토크로 간다. 몇 해 뒤에 아버지와 어머니를 잃고 이태준은 일찍이 고아가 되었다. 누이 둘과 함께 철원의 친척 집에 맡겨졌지만 천덕꾸러기 신세로 전락해 친척 어른의 구박에 반발하여 가출을 한다. 고학하며 어렵게 휘문고보 등을 거쳐 스물한 살 때 일본 도쿄로 건너가 조치대 문과에 입학하지만 곧 자퇴하고 만다.
그 후 귀국하여 1925년 <시대일보>에 <오몽녀>를 발표하였다. <오몽녀>로 문단에 나오고서 <까마귀>와 같은 빼어난 단편소설을 내놓으며 탁월한 미문가로 이름을 날린다. ‘상허(尙虛)의 산문, 지용(芝溶)의 운문’이란 소리를 들을 정도로 그의 문체가 뿜어내는 아취는 당대의 일급이었다. 일제강점기에는 대표적인 문예지 <문장>을 창간하고, 1933년 이효석, 박태준 등과 구인회를 조직했다. 그러나 구인회의 모더니즘 분위기와 일정한 거리를 둔 채 변해 가는 현대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하층민들의 삶과 그 속에서 우러나는 소박한 인간애, 고향과 옛것에 대한 향수, 존재의 소멸에 대한 허무 의식 등을 주제로 한 소설을 내놓는다. 그는 “저널리즘과의 타협이 없이, 비교적 순수하게 나대로 쓰고 싶다”는 자신의 바람대로 장편보다 단편에 힘을 기울인다.
1940년대에 접어들면서 일제의 강압 정책이 극으로 치닫자 이에 굴복한 많은 문인이 일제가 수행하던 침략 전쟁에 동조하는 글을 쓰기 시작한다. 이태준도 예외가 아니어서 1940년 <문장>에 친일 색채가 짙은 <토끼 이야기>와 <지원병 훈련소의 1일>을 싣는 등 일본어로 된 많은 글을 내놓는다. 그는 ‘조선문인협회’와 ‘황군위문작가단’ 같은 친일 단체의 활동에 협력해 1942년 일제가 주는 ‘조선 예술상’을 받기도 한다.
1945년 해방 뒤 서울로 올라온 이태준은 전혀 다른 면모를 보여준다. 1946년 2월에 열린 ‘전국 문학자 대회’에 앞장설 뿐 아니라, 좌익 문학 단체인 ‘조선문학가동맹’ 중앙집행위원회의 부위원장으로 나서게 된다. 아울러 이 단체의 기관지인 <문학>에 자신의 변모 과정을 담은 <해방 전후>를 발표해 ‘조선문학가동맹’이 제정한 제1회 문학상까지 받는다.
그러나 제 행적을 내내 자책하며 자괴감을 떨쳐내지 못한 이태준은 해방 이듬해인 1948년 돌연 홍명희와 함께 월북한다. 월북 초기에는 평양조선문화협회 방문사절단 1호로 소련에 다녀오는 등 특별대우를 받는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문예총 부위원장이라는 한직으로 밀려나고 점차 극좌파에 의해 소외당하게 된다. 1956년께 그는 구인회에 가담해 다수의 우경적이고 친일적인 작품을 썼다는 죄목으로 혹독한 규탄을 받고 함흥으로 쫓겨난다. 거기서 그는 <함흥로동신문>의 교정원과 콘크리트 블록 공장의 노동자로 전락한 이후 같은 해 임화, 김남천 등과 함께 문학예술출판부 열성자 회의에서 비판을 받고 숙청된다.

일제강점기의 어두운 현실을 반영한 작품 세계

▲ 문향루, ‘향기를 듣는 누각’이란 뜻으로 추사 김정희의 글씨를 직접 집자해 팠다.
▲ 이태준의 초고 유품
골동품과 고서화 등 이태준의 옛것에 대한 취미는 1930년대 말기에 활동한 여러 문인에게서 심심치 않게 발견되는 것으로, 당시의 어두운 현실을 부정하는 심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이태준의 소설에서는 작가 특유의 세련된 문체, 치밀한 구성과 밀착되어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이태준은 자신의 소설에 순박하고 선량하며 어리석은 인물, 변화하는 현실 속에서 제 한 몸 추스르지 못하는 나약한 인물, 옛날이나 회상하며 여생을 보내는 노인 등 흔히 인생의 낙오자들을 등장시킨다. 그는 이들을 연민의 정서로 바라보는데, 관찰자 시점을 택함으로써 작중 상황을 신뢰하게 하고, 독자가 더욱 쉽게 공감하도록 이끈다.
이런 이태준의 소설에 대해 일부에서는 현실에 대응할 자세를 전혀 보이지 않는, 철저하게 패배적이며 복고적인 감상주의의 산물이라고 혹평한다. 이와 같은 한계를 최대한 극복한 것으로 볼 수 있는 작품이 1939년 2월 자신이 주재하던 <문장>에 발표한 <농군>이다.

창권의 넙적다리에선 선뜩선뜩 피가 흘렀다. 총알이 살만 뚫고 나갔다. 아내의 치마폭을 찢어 한참 동이는 때다. 무에 시커먼 것이 대가리를 휘저으며 도랑 바닥을 설설 기어오는 것이다…… 물이었다. 웃녘에서 또 소리를 질렀다. 물 내려간다는 소리였다. 물줄기는 대뜸 서까래처럼 굵어졌다. 창권이네 세 식구는 와락 눈물이 쏟아졌다. 모두 다 물줄기로 뛰어들었다…… 물은 도랑 언저리를 철버덩철버덩 떨궈 휩쓸면서 열두 자 넓이가 뿌듯하게 내려 쏠린다. 논자리마다 넘실넘실 넘친다. 아침 햇살과 함께 물은 끝없는 벌판을 번져 나간다.
- 이태준 <농군> 중

여태껏 이태준의 소설에서 볼 수 없던 현실 인식에 대한 강렬한 투지와 의욕이 불타면서도, 작가 특유의 아름답고 세련된 문체가 절대 손상되지 않고 있음이 엿보인다. 곧이어 한때 영월에서 벼슬을 지내고 3·1운동 때 옥고까지 치른 노인이 금광을 찾아 나섰다가 실패하고 패혈증으로 죽는 내용의 <영월 영감>을 발표한다. 이듬해인 1940년 5월, 이태준은 간결하고 선명한 언어와 서술적 구조가 녹아든 단편 <밤길>을 내놓는다. <밤길>은 공사판 막노동으로 하루하루 살아가는 주인공이, 가난을 견디다 못한 아내가 도망가고서 병든 갓난 딸을 안고 비바람이 몰아치는 밤길을 헤매다 결국 제 손으로 딸을 땅속에 묻게 된다는 내용의 작품으로, 언어 자체 또는 그 언어의 형식미에 강한 집착을 보인다. 즉, 그는 얘기하려는 내용보다 얘기하는 방법에 더 비중을 두고 예술적 성취를 추구한 것이다. 상허 이태준은 깔끔하고 운치 있는 문장과 짜임새 있는 구성, 그리고 무엇보다 개성 있는 인물 묘사로 문학의 진수를 보여준 작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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