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3-28 17:40 (목)
 실시간뉴스
'최인호의 눈물' 최인호 1주기 추모전에 가다
'최인호의 눈물' 최인호 1주기 추모전에 가다
  • 이시종 기자
  • 승인 2014.11.26 05:4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가을바람과 함께 온 해사한 문학청년의 미소

 
한 사람의 죽음은 많은 것을 말한다. 소설가 고(故) 최인호도 그렇다. ‘영원한 문학청년’으로 불렸던 그가 세상을 떠난 지 9월 25일로 1년이 됐다. 서울 평창동 영인문학관은 그가 남긴 흔적들로 가득했다. 1주기를 맞아 열린 그의 1주기 추모전. 추모전 제목은 <최인호의 눈물>이다. 그의 유고집이 <눈물>이었다. 지난해 9월 25일 그는 마지막까지 원고를 쓰다 세상을 떠났다. ‘작가로 살고, 작가로 죽은’ 그의 흔적이 영인 문학관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취재_ 이시종 기자 사진_ 양우영 기자

“내가 쓴 보잘것없는 글이 이 가난한 세상에 작은 위로의 눈발이 될 수 있도록, 그 누군가의 헐벗은 이불 속 한 점 온기가 되어 줄 수 있도록, 나는 저 눈 내린 백지 위를 걸어갈 것이다”

▲ 전시관 전경
수북이 쌓인 책더미 사이에서 미공개 원고지 200여 매가 쏟아져 나왔다. 환자가 아닌 작가로 죽고 싶다며 절절이 기도하던 고(故) 최인호 작가가 눈물과 사랑의 언어로 채운 원고.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쓴 그것은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책 혹은 세상에 보내는 마지막 편지가 될지도 모르는 글이었다.
지난해 9월 세상을 떠난 최인호 작가의 유고집 <눈물> 이야기다. 이 책은 작가의 말도, 목차도 없는 미완성 글로 엮은 책이다. 오롯이 담긴 것은 작가의 깊고 내밀한 목소리뿐이다. 작가이기에 앞서 한 인간으로서 뱉은 영적 고백, 신 앞에서 진실하게 슬퍼하고 진실하게 기뻐한 한 작가의 이야기다.
그로부터 1년, 서울 평창동 영인문학관에 그의 1주기 추모전이 열렸다. 추모전 제목은 그의 유고집의 제목에서 빌려와 <최인호의 눈물>이라고 했다. 그의 추모전은 11월 8일까지 영인문학관에서 열리고 있다. 영인문학관에서 작가의 숨결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영인문학관을 찾은 날, 늘 유쾌하게 웃던 작가처럼 하늘은 맑았고 햇살은 따스했다. 하얀 뭉게구름이 파란 하늘을 캔버스 삼아 이런저런 풍경을 수놓던 오후였다. 

작가로 죽은 ‘영원한 문학청년’의 흔적

‘인호가 세상을 떠났다. 나쁜 녀석. 영정 앞에 향불을 피우며 욕을 했다. 내 가슴에 그렇게 큰 구멍을 하나 뚫어놓고 먼저 가버리다니….’
최인호 작가가 하늘로 떠난 날, 이어령 전 문화부장관은 이런 말을 뱉었다고 한다. 최인호는 생전에 이렇게 이어령 전 장관과 각별하게 지내는 사이였다. 1주기 추모전이 열린 영인문학관은 이 전 장관의 부인 강인숙 건국대 명예교수가 관장으로 있는 곳이다. 전시장에 들어서니 실물 크기의 최인호 입간판이 웃으며 앉아 있었다. 그가 마치 살아 돌아온 것처럼.  이곳에는 생전 작가의 육필 원고, 편지, 사진, 신문기사, ‘원고지 위에서 죽고 싶다’고 쓰인 손도장 등 그를 추억할 수 있는 많은 것들이 있었다.
그 가운데 추모객의 발길을 가장 오래 붙잡은 곳은 그가 마지막까지 쓰던 서재를 재현해 놓은 곳이었다. 침샘암과 불편한 동거를 하던 죽음의 문턱, 글을 쓰던 책상에는 그가 혼자 흘린 눈물자국이 하얗게 말라붙어 있었다. 항상 밝은 웃음을 보였던 그의 모습을 떠올리면, 눈물은 생전의 그와 가장 어울리지 않았던 것이라 가슴이 먹먹해졌다.
문득 ‘작가로 죽은’ 최인호의 흔적을 볼 수 있어 참 다행이란 생각이 스쳤다. 그게 다 아내 황정숙 여사 덕분이다. 고인은 네 권의 대형 스크랩북을 남겼는데, 거기마다 ‘이 스크랩은 남편 최인호에 대한 마누라 황정숙의 애정이다. 1974년 5.1’ 등 아내를 향해 애교 넘치는 글을 남겼다. 아마 아내의 애정은 고인이 생각한 것보다 더했나 보다. 황 여사가 남편 1주기를 맞아 유품을 정리했고, 이것이 전시의 시작점이 됐다. 이번 전시는 황 여사와 여백출판사, 영인문학관이 정성을 모아 열리게 됐다.

 
▲ 항암치료를 받아 빠져 버린 손톱에 끼우고 글을 쓰던 고무 골무
이번 전시에는 처음 공개되는 희귀한 자료도 많다. 특히 마지막 작품인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를 쓰느라 촉이 비뚤어져버린 만년필, 항암 치료를 받아 빠져버린 손톱에 끼우고 글을 쓰던 고무 골무,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성모상, 그 앞에서 생애 마지막 날 기도하며 흘린 눈물로 색이 바래버린 책상 등등. 그것들이 놓여 있던 최 선생의 서재가 따로 마련한 전시실 ‘작가의 방’에 재현된다. 그의 마지막 육필 원고는 유고집에 담겼다. 그 원고 중 ‘작가의 방’에 놓인 유품과 관련한 글이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오늘 자세히 탁상을 들여다보니 최근에 흘린 두 방울의 눈물 자국이 마치 애기 발자국처럼 나란히 찍혀 있었습니다. 이상한 것은 가장자리가 별처럼 빛이 난다는 겁니다. 부끄러운 마음에 알코올 솜을 가져다 눈물 자국을 닦았습니다. 눈물로 탁상의 옻칠을 지울 만큼 저의 기도가 절실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탐스러운 포도송이 모양으로 흘러내린 탁상 겉면의 눈물 자국도 제게는 너무나 과분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알코올 솜으로 닦으면 영영 눈물 자국이 없어질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뜻밖에도 알코올이 증발해버리자 이내 눈물 자국이 다시 그대로 제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아내를 향한 가슴 뭉클한 사랑

▲ 최인호가 남긴 네 권의 대형 스크랩북
추모전이라 해서 숙연한 마음만 드는 것이 아니다. 이 전시는 날것 그대로 최인호의 일생을 펼쳐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전시장을 돌면 그가 걸어왔던 길들을 영화 보듯 돌이켜 볼 수 있다. 특히 아내에게 끊임없이 구애하던 글들을 읽고 있으면 마치 오래된 흑백 청춘영화를 보는 것 같았다. 대학생 시절 길에서 만난 여대생 황정숙(최인호의 아내)에게 ‘예쁜 양’이라는 애칭을 달아주고 끈질기게 구애한 흔적 앞에 서면 그 시절의 로맨스를 느낄 수 있다. 
‘황정숙씨. 놀라셨으리라 믿습니다’로 시작하는 편지가 눈에 띄었다. 한 자 한 자 읽어 내려가보니 너스레를 떠는 청년 최인호의 익살스러운 모습이 연상된다. 군 입대를 앞두고 있었던 그는 ‘제가 이번 10월 4일 날 자랑스레 공군에 입대하는 애국적 거사에 앞서 그동안에 제가 공연히 불안스런 봄닭처럼 괴롭힌 죄과에 대해 사과도 할 겸, 인사도 드릴 겸 한번 뵈었으면 하는 바입니다’라고 본론을 끄집어낸다. 이어 군대 간 사이 있을 변화에 대해 이렇게 썼다.
‘이쁜씨. 어쩌면 댁은 그동안에 결혼을 하셔서 남의 사모님으로 착한 부인이 되어 있을지도 모르옵고, 아니면 어느 착한 학생들이 있는 중학교 성생님으로 인기를 끌고 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저는 찬 땅바닥을 기고 있는 판에 말입니다. 핫하.’
편지 마지막엔 일방적으로 약속 장소를 정해 꼭 만나달라며 ‘안 나오시면 그만 섭섭한 나머지 상사병에 걸려서 그만 OO 할지도 모르옵니다’라며 통사정을 한다.
작가 생전에 부부의 금슬은 어떤 부부보다 좋았다고 한다. 전시장을 도는데, 전시장 관계자가 관람객 사이에 끼여 있다며 살짝 귀띔을 했다. 부인이 이곳에 올 때마다 남편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린다고 덧붙인다. 부인에게 가벼운 인터뷰를 할까 했지만, 그의 감상을 방해할 수 있다는 생각에 모른 척 돌아섰다.   
아내에게 장장 넉 장에 걸쳐 쓴 ‘사랑 편지’의 끝에 이런 글귀도 남겼다.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 최인호는 이 말에 책임을 지려 했던 것일까. 그의 소설에는 사람 냄새가 진하게 배어 있다. ‘원고지 위에서 죽고 싶다’고 했던 그가 쓰려고 했던 글은 무엇이었던가.
생전에 그는 “내가 죽음의 자리에 누워 영원히 눈을 감을 때까지 나는 이 인연을 버리지 않을 것이다. 내가 쓴 보잘것없는 글이 이 가난한 세상에 작은 위로의 눈발이 될 수 있도록, 그 누군가의 헐벗은 이불 속 한 점 온기가 되어줄 수 있도록, 나는 저 눈 내린 백지 위를 걸어갈 것이다”라고 털어놓기도 했다.

사람냄새 진하게 배어 있는 소설

▲ 작가가 육필로 쓴 <별들의 고향> 원고
1주기 추모전에 전시되는 편지 자료는 결혼 전 황 여사에게 보낸 사랑 편지 말고도 다양하다. 어머니와 자녀에게 보낸 편지, 손녀와 주고받은 편지, 생전 각별했던 이어령 전 문화부장관에게 보낸 편지, 아픈 그에게 박완서 선생이 보낸 위로의 편지도 있다. 이런 편지들이 그 특유의 회화적인 글씨로 씌어 있어 필적에서 고인을 만나는 반가운 경험도 할 수 있다.
육필 원고도 다양하게 공개된다. 데뷔작인 <견습환자>부터 <개미의 탑> <별들의 고향> <술꾼> <무서운 복수> <귀엣말하는 사람을 경계하라> <지구인> 등이다. 재미있는 것도 많다. 최 선생이 그린 그림이 여럿 있는데, 자화상도 있고 연극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의 세트장 스케치도 있다.
최인호는 고교 2학년이던 1963년 단편 <벽구멍으로>가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가작 입선한 그는 군 복무 중이던 1967년 단편 <견습환자>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하면서 정식으로 문단에 나왔다. <타인의 방> <처세술 개론> <술꾼> 등 등단 직후 그가 쏟아낸 단편들은 참신한 문장과 날카로운 세계 인식으로 호평을 받았다. 급격한 산업화와 도시화 속에서 현대인이 겪는 고독과 소외, 비인간화 같은 부작용들이 그의 붓끝에서 인상적인 표현을 얻었다. 대표작 중 하나인 <별들의 고향>은 그의 나이 스물여덟이던 1972년 <조선일보>에 연재했던 소설이다. 호스티스로 불린 유흥가 여성 경아를 주인공 삼은 이 소설은 상·하권 합쳐 100만부가 넘게 팔림은 물론 작가 자신의 각색을 거쳐 영화로도 만들어져 역시 큰 인기를 끌었다.
1987년 가톨릭에 귀의한 후 그는 근대 조선불교의 중흥조인 경허의 일대기를 소설화했다. 이 숙작을 통해 그는 물신의 소외가 없는 ‘별들의 고향’은 ‘길 없는 길’을 통해 걸어야 함을 역설했다.
침샘암이 발병한 후 2011년에 쓴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은 그의 후기 대표작으로 꼽힌다. 1971년 룸펜지식인의 심리분열을 묘사한 초기작 <타인의 방>이 연상되는 이 작품을 통해 그는 평생을 돌고 돌아 도달한 내면의 통합을 이루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는 <내 마음의 풍차> <바보들의 행진> <도시의 사냥꾼> <적도의 꽃> <깊고 푸른 밤> <겨울나그네> 등의 청춘물, 그리고 300만부의 기록적인 판매고를 올린 <상도>를 비롯해 <잃어버린 왕국> <왕도의 비밀> 등 역사물을 남겼다. 월간지 샘터에 1975년부터 쓴 <가족>은 402회를 이어간, 문학사상 가장 오랜 연작소설로 남았다.
만 50년간 그는 작품 활동에 뚜렷한 성향 변화를 보였다. 초년은 세속을 넘어 통속에 가까울 정도로 물신의 세계를 그리는 데 치열했다. 1970~80년대 독재의 억압기를 맞아 소재를 찾기 어려웠던 충무로는 작품성이 가미된 그의 소설을 영화화 하는데 몰두했다. 영화 <바보들의 행진> <병태와 영자> <별들의 고향> <고래사냥> <깊고 푸른 밤> <겨울나그네> 등의 원작이 그의 소설이다.
이 시기는 그 자신에게 부와 인기를 안겨주었으나 자신도 같이 방황하고 고뇌했던 시기였다고 후술하고 있다. ‘창작과 비평사’ 그룹이 이끈 참여 문학과 ‘자유문학사’ 그룹이 이끈 순수문학의 충돌 사이에서 그는 경계인의 길을 걸었던 것이다.
그러나 진리의 본향인 <별들의 고향>을 찾는 끈을 놓지 않았던 그는 중년 이후 보다 원숙해지면서 끈적거림이 제거된 투명한 작품을 내놓았고, 문단의 평가도 ‘한국문학의 큰별’이라는 단일평가로 수렴됐다.
그가 떠난 자리, 많은 이들이 여전히 그를 추억한다. 최인호는 갔지만 문단은, 아니 세상은 그를 기억하고 있다. 아직 그를 정녕 떠나보내기엔 너무 이른 듯하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