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4 22:25 (수)
 실시간뉴스
지휘자 서희태와 우면산길을 걷다
지휘자 서희태와 우면산길을 걷다
  • 이시종 기자
  • 승인 2014.12.25 19:0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클래식과 창조의 하모니를 지휘하는 마에스트로, 서희태 감독

 
모든 소리는 그의 손짓에 반응했다. 손동작에 따라 음악은 성난 파도처럼 몰아치기도 하고, 겨울 들녘처럼 고요해지기도 한다. (사)밀레니엄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이자 MBC 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의 예술감독으로 활동한 지휘자 서희태. 겨울 스산하게 부는 산 바람소리도 그를 지나니 음악처럼 들렸다.

취재 이시종 기자 | 사진 양우영 기자

소음에 무척 예민해져서 조그만 이상한 소리가 들려와도 신경이 이내 곤두설 때가 있다. 마감 때가 그렇다. 일을 하면서 얻은 직업병일 수도 있겠고, 성마른 체질 탓이기도 할 것이다. 휴대전화 벨 소리도 귀에 거슬려 늘 진동을 해놓으며 통화도 가능한 짧게 한다. 본격적인 마감이 시작되기 전 산을 자주 찾게 된 이유도 그것 때문이었다. 도시의 소음으로부터의 회피. 말하자면 마감을 위한 준비태세다.
최근에 클래식을 듣기 시작한 것도 ‘소리 노이로제’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였다. 혼자 방 안에 앉아 아름다운 선율에 취해 있노라면 어느덧 산속의 호수처럼 고요해지는 듯한 느낌이 든다.
지휘자 서희태와의 동반 산행은 일종의 ‘치유 산행’이었다. 막힌 콧속을 시원하게 관통하는 듯한 차가운 바람은 물론 부드러운 그의 음성은 산속에서 클래식 음악을 듣는 것과 같았다.
우면산. 서울 강남 한가운데에 이렇게 자연을 느낄 산이 있다는 것이 천만다행이다. 등산객이 너무 많지는 않을까 오르기 전에는 걱정도 많았지만, 예상보다 등산객이 훨씬 적었다. 높지 않은 산을 오르며 그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눴다.

마음의 속 소리를 일깨워준 그 이름, 베토벤

 
모든 것이 베토벤 때문이다. 의사를 꿈꾸던 소년이 대학입시를 코앞에 두고 음대에 들어가고, 무작정 오스트리아 빈으로 유학을 떠나게 된 것도 말이다. 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로 유명세도 탔으니, 이제 베토벤은 그에게 떼려야 뗄 수 없는 이름이 됐다.
“제가 처음 들었던 오케스트라 음악이 베토벤이었어요. 인생의 반 이상을 귀가 안 들리는 채로 살았던 베토벤, 그 유명한 〈합창〉 교향곡을 작곡했을 때 그의 나이 53세였죠. 저는 베토벤이 과연 어떤 사람일까 내내 궁금했어요. 베토벤이 독일에서 태어나긴 했어도 빈에서 음악생활을 했기에 빈에 가고 싶었어요.”
베토벤을 만나러 가겠다는 소박한 꿈을 위해 공사장 아르바이트, 학습지 영업사원 등을 하며 유학 비용을 모았다. 평일엔 바이올린 연주를 하고 주말엔 공사장에서 지게를 지며 시멘트를 나르던 나날. 음악을 할 수만 있다면, 베토벤을 만날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마다하지 않았던 청년의 순수한 열정은 지휘자 서희태의 인생에 기적을 만들었다.
“어려서부터 음악을 자연스럽게 접하기는 했지만, 음악가가 되겠다는 생각은 없었어요. 의사가 되고 싶었어요. 꿈이 흉부외과 의사일 정도로 구체적인 목표도 있었죠. 제가 나고 자란 곳이 병원 부근이었고, 아버지께서도 의과대학에서 교직원으로 일하셨거든요. 제가 다니던 교회에 많은 분들이 의사였어요. 특히 제가 큰아버지처럼 따르던 분이 그 대학병원의 원장이셨어요.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나도 의사가 돼야 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 같아요.”
의사와 음악은 어느 연관이 있기에, 의사를 꿈꾸던 소년은 갑자기 음악가가 되겠다고 진로를 바꾸게 됐을까. 그는 진로를 바꾸게 된 결정적 사건이 있었다고 했다.
“원장님께는 세 명의 자제가 있었어요. 그 중의 큰 형님이 아버지의 가업을 잇기 위해 삼수인지 사수인지를 해서 어렵게 의과대학에 들어갔어요. 그리고 작은 형님은 같은 해에 음대에 갔죠. 큰 형님이 그렇게 어렵게 대학을 붙고 나서 친척들에게 인사를 하러 다녔어요. 그러다가 수원의 한 친척 집에서 연탄가스에 중독돼서 그만 돌아가시고 말았죠. 그 사고가 있은 후 작은 형님은 음대 진학을 포기하고, 다시 공부해서 의과대학을 갔어요. 그러면서 그 형님이 저한테 그러시더라고요. ‘희태야 너라도 음대에 가면 좋겠다’. 지금 생각해도 왜 제게 그런 말을 하셨던 것인지는 모르겠어요. 그런데 그 말을 들으니까 내 안에 뭔가 꿈틀대는 것을 느꼈어요.”
음악을 좋아하시는 아버지 덕분에 그의 형제들은 어려서부터 악기 하나씩을 배웠다. 누나는 피아노, 동생은 첼로, 그는 바이올린을 배웠다. 그런데 막상 그가 음악을 전공하려 하자 아버지는 반대를 했다.
“결국 초등학생 때만 바이올린을 배우고 이후엔 독학을 했어요. 그때가 고3 때였는데, 그제 와서 다시 바이올린을 해서 대학에 들어간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죠. 그래서 차선책으로 택한 게 성악이었어요.”
입시를 불과 몇 달 남기지 않고, 그는 성악으로 입시를 준비했다. 레슨 한 번 받아보지 않았던 그는 고등학교 음악교과서에 나와 있는 곡으로 시험을 치렀다. 어떤 곡이 이탈리아 가곡인지, 대입 시험에선 어떤 곡을 불러야 하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합격한 것이다.
음악에 대한 그의 열정이 만들어낸 첫 번째 기적이었고, 그의 인생 행로를 바꾼 결정적 계기였다. 음대생이 된 그는 우연처럼 ‘오케스트라’와 마주쳤다.
“학교 오케스트라 연습실을 지나는데, 그 자리에서 멈춰 섰어요. 그 전까지 오케스트라 음악을 제대로 들은 적이 없었거든요. 마치 누군가 ‘얼음!’을 외친 것처럼 음악이 끝날 때까지 꼼짝할 수 없었어요. 그때 들은 게 베토벤의 음악이었고 음악이 끝나자마자 도서관에 달려가 베토벤에 대한 책을 다 읽었어요.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이 ‘오케스트라 지휘자’라는 걸 깨달은 순간이었죠.”
인생을 바꾸는 ‘우연’이라면 그건 ‘운명’이다. 대부분의 성악 전공자들이 부전공으로 ‘합창’을 택하지만 바이올린이 좋았던 그는 ‘바이올린’을 부전공으로 택했다. 서희태는 음대 오케스트라에서, 악기 전공자만 있던 그곳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유일한 부전공 학생이었다. 그리고 ‘지휘자’라는 꿈을 품고 성악공부는 물론 틈틈이 지휘를 배우고 작곡을 익히고 바이올린을 연습했다.
행운은 그 운으로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사람을 알아보는 법이다. 10년간의 유학생활을 끝낸 후 귀국한 그는 한국에서 오케스트라 지휘자가 되기까지 7년간 성악가로 활동했다. 그리고 마침내 오케스트라 지휘자가 되자, 몸에 딱 맞는 옷을 입은 것처럼 상쾌했다. 혹시 지휘자로 전향한 것에 대해 일말의 후회는 없는지 물었다.
“전혀 없어요. 성악 공부도 최고연주자 과정까지 했으니까 마지막까지 한 거죠. 그런데 노래하는 것 자체를 즐기지는 못했어요. 아내는 무대에 올라가는 것이 그렇게 즐겁고, 행복하다고 하던데 저는 그러지 못했어요. 노래에 대한 스트레스가 많았던 것 같아요.”

소프라노 고진영, 유학시절 만난 평생의 반려자

그의 아내는 소프라노 고진영이다. 아내와는 오스트리아 유학 당시 처음 만났다. 아내는 빈에 도착한 다음날 처음 만난 한국인이자 여성이었다.
“오스트리아 음악대학에 입학하기 위해서는 제가 배우고 싶은 교수를 선택해 실기시험을 치러야 했어요. 한 소프라노 선생님이 괜찮을 듯싶어 청강을 요청했죠. 강의실에 갔을 때 어떤 여성이 노래를 하고 있더라고요. 목소리가 참 좋더라고요. 바로 아내였죠. 선생님은 제가 한국에서 왔다는 것을 알고, 노래하던 여성이 한국인이니 도움을 받으라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눴는데 정말 그날로 반할 수밖에 없었어요. 공부하러 간 바로 다음날 엉뚱한 데 마음을 빼앗긴 거죠(웃음).”
첫눈에 반한 아내를 다시 만나기 위해 그는 아내가 가지고 있던 악보를 빌려 달라고 했다. 그리고 다음날 악보를 돌려준다는 핑계로 약속을 잡았다.
“사실 그 악보, 저도 가지고 있었어요(웃음). 나중에 들은 이야긴데, 그날 아내가 몸이 몹시 안 좋았대요. 그런데도 그 자리에 나온 걸 보면 아내 역시 저를 마음에 두고 있었던 것 같아요(웃음).”
이후 두 사람은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매일 만났다. 만나면 만날수록 아내에게 운명 같은 끌림을 느낀 그는 만난 지 10여 일 만에 덜컥 청혼을 했다. 재미있는 것은 아내의 수락 역시 주저함이 없었다는 것이다. 당시 그의 나이 스물네 살, 아내는 스물세 살이었다.
“집안 어른들은 난리가 났죠(웃음). 얼마나 기가 막혔겠어요. 나이도 어린데다 유학 간 지 얼마나 됐다고 결혼한다고 하니까요. 초반에는 반대가 심했지만, 양가 어른들이 만나면서 일이 잘 풀렸어요. 결국 다음 해 8월에 결혼할 수 있었죠.”
이후 부부는 10년간 오스트리아에서 유학생활을 하며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절을 보냈다. 경제적인 문제로 고민이 없지 않았지만 그래도 사랑하는 이와 함께하는 행복한 나날이었다. 그는 그 시절을 사랑과 열정으로 뜨거웠던 시절로 기억한다. 그리고 20여 년이 흐른 지금도 두 사람은 인생의 동반자이자, 예술적 동료로 두터운 사랑과 신뢰를 쌓아가고 있다.
“어떤 이들은 부부가 같은 일을 하는 것이 불편하지 않느냐고 하는데, 저는 한 번도 그렇게 느껴본 적이 없어요. 오히려 너무 좋아요. 제가 자선음악회를 해야 한다 할 경우에, 자선음악회라는 것은 말 그대로 개런티도 없고, 거기서 나오는 모든 수익금을 가지고 필요한 사람들에게 주기 위한 음악회인데, 그럴 경우에 가장 친분이 강한 연주자에게 부탁을 하게 돼 있거든요. 그래서 제가 지휘자로 전향한 이후에는 제 아내와 연주하는 것에 대해 지휘자로서 일단 스트레스가 없기 때문에 저는 너무나 편해요. 또 내가 원하는 것들이 무엇인지 말 안 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을 잘 받쳐줘서 정말 좋은 파트너라고 생각해요.”

클래식 대중화에 앞장 선 ‘클래식 전도사’

‘클래식 전도사’. 그를 수식하는 대표적인 수사다. 이런 닉네임이 붙게 된 결정적 계기는 MBC 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의 예술감독을 맡으면서다. 당시 드라마 주인공인 ‘강마에’를 연기했던 김명민의 말투와 헤어스타일이 엄청나게 유행할 만큼 드라마의 인기는 대단했다.
“제 헤어스타일과 말투, 지휘하는 모습, 취향을 롤 모델로 ‘강마에’라는 캐릭터가 만들어졌어요. 물론 성격은 빼고요(웃음). 그건 작가가 부여한 캐릭터상의 성격이죠. 드라마의 예술감독직을 맡아 배우들과 8개월 정도 같이 생활하며 지휘와 악기를 가르쳤습니다. 음악을 선곡하고, 선곡한 음악을 녹음하고 편집까지 하는 빡빡한 생활이었죠.”
아마도 <베토벤 바이러스>는 대한민국 드라마 사상 오케스트라 연주 장면을 가장 길게 보여준 드라마가 아닐까 싶다. 그 드라마를 통해 시청자들은 어렵게만 여겼던 클래식을 한층 더 친근하게 느끼게 됐다. 그가 바라던 것도 바로 그것이었다.
“물론 음악가로서 웅장한 교향곡을 연주하고 싶죠. 하지만 일단 관객들에게 ‘음악은 재밌다’고 느끼게 해서 즐길 수 있게 해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어려우면 지루해지고 지루하면 즐길 수 없잖아요.”
이를 알리기 위해 그의 노력은 지금도 각양각색으로 계속되고 있다. 김연아의 아이스쇼 쇼트프로그램에서 오케스트라를 지휘한 것도 그것 때문이고, ‘콘서트 오페라’를 준비하는 것도 이의 연장선이다.
그에게는 지휘자로서 이루고 싶은 또 다른 꿈이 있다. 이른바 클래식과 경영과의 합주. 이제까지의 도전 중 음악가로서 가장 의미 있는 목표 중 하나가 될 듯하다.

“오케스트라가 연주 그 자체만으로 티켓을 판매해 유지되고 발전하는 선순환 모델을 만들고 싶어요. 후원이나 시의 재정으로 운영되는 오케스트라가 아닌 제대로 된 경영을 오케스트라에 접목해 상품가치가 있는 공연을 만들고 싶어요. 그러려면 ‘서희태’라는 브랜드의 가치를 더욱 높여야겠죠.”
그와 대화를 나누며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 마음이 편안해 질 수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을 지긋하게 누르는 바리톤 음성과 스스로 결을 만들며 공간을 채우는 깊이감이 느껴졌다. 그와 함께한 시간만큼은 ‘소음 노이로제’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