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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증거’ 서진규 소장의 인생역전 스토리
‘희망의 증거’ 서진규 소장의 인생역전 스토리
  • 백준상 기자
  • 승인 2014.12.30 15: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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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발공장 직공’에서 美 하버드대 박사가 되다

 
때론 누군가의 한 마디가 성공을 향한 집념과 열정에 계기가 되어주기도 한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담임선생님의 “진규는 크면 진짜 박사가 되어라”는 한 마디가 희망연구소 서진규 소장의 가슴에 희망의 불씨가 되었고, 이후 그는 환갑이 다 된 나이에 하버드대 박사가 되었다. 비록 녹록치 않은 현실의 풍파를 헤쳐 나오느라 시간이 조금 더 걸리기는 했지만 결국 꿈을 이룬 셈이다. 이처럼 시작이 미약할지라도 그 끝은 창대할 수 있다. 조건이 있다면 단 한 가지, 절대로 희망을 놓지 않는다면 말이다.

취재 서효정 | 사진 이용관

“인생을 살아가다보면 분명 힘들고 아픈 순간이 올 때가 있지만, 그 순간에도 기회와 희망은 존재한다”

1940년대는 국민 대부분의 살림살이가 팍팍하고 어려웠던 시절이라 더 그랬을지도 모르지만 그 당시 가난하고 자식 많은 집에서 딸은 그저 밥이나 축내는 입 하나에 불과했다. 그러다보니 대학을 간다거나 공부를 많이 한다는 것은 감히 상상할 수도 없었을 터. 1948년 부산 기장군의 한 어촌마을에서 가난한 엿장수의 딸로 태어난 서진규 소장의 삶도 거기서 크게 어긋나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서 박사’라는 별명이 있을 만큼 총명하고 영특했지만 고등학교 졸업에 만족해야 했다. 그렇게 일찍이 취업 전선에 뛰어들어서 가발 공장과 식당을 전전하며 집안 살림을 보태면서 공부를 하고 싶다는 꿈은 마음 속 깊이 넣어두었다.
일찍이 사회생활을 시작하며 사랑하는 남자도 만나, 잠시나마 결혼으로 새 인생을 시작하는 꿈도 꾸었지만 좋은 집안의 자제였던 남자에게 머지않아 곧 버림받았던 기억도 있다. 그때가 그이의 나이 스물두 살. 아직은 세상으로부터 보호받아야 할 어린 나이였지만 다람쥐 쳇바퀴 돌 듯 희망 없는 삶에 사랑하는 이로부터 실연까지 당하고 나니 세상을 다 잃은 것만 같았다. 극단적으로 말해 죽음을 선택하거나 삶의 엄청난 전환점을 맞이하거나, 선택의 기로에 섰다고 할 수 있었다. 그 벼랑 끝에서 떠오른 곳이 바로 미국. 서 소장은 우연히 미국의 가정에서 식모를 구한다는 광고를 보고는 아무 계획도 없이 미국행을 결심한다.
“그 시절만 해도 미국이라고 하면 미지의 세계이면서 마치 지상낙원이라는 이미지가 있었어요. 그곳에서는 밑바닥 생활을 하는 사람도 차별받는 일이 없고, 또 열심히만 살면 누구나 잘살 수 있게 된다는…. 밑도 끝도 없는 환상에 가득 젖어 있었던 거죠.”한국에서 더 이상 희망 없이 살 바에야 전혀 새로운 곳에서 인생을 다시 한 번 시작해보자는 그이의 결심은 무모했지만 확고했다. 엄한 어머니의 강한 반대에 부딪쳤지만 어머니보다 유순했던 아버지를 설득하는데 성공했고, 결국 아버지가 꿔다 준 돈 100불을 밑천삼아 무작정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물론 두려움이 전혀 없었다면 거짓말일 터. 하지만 인생을 변화시키기 위해선 어떤 식으로든 결단이 필요했었기에 그 두려움도 기꺼이 설렘으로 받아들였다. 비로소 그이의 인생이 전환점을 맞이하는 순간이었다.

‘기회의 땅’ 미국에서의 새출발

그이의 미국 이민 초기 생활은 생각보다 성공적이었다. 애초에 하려고 했던 식모 일자리가 다른 사람으로 채워져 잠시 위기를 겪기도 했지만, 우여곡절 끝에 그는 월가에 있는 한 레스토랑에서 호스티스(미국 식당에서 손님을 자리로 안내하는 여성 안내원)으로 일을 하게 된 것이다. 실제 영어 실력은 형편없었지만 호스티스로서 안내에 필요한 문장만큼은 완벽히 외웠고, 점차 호스티스로 전문성을 인정받기 시작했다.
“당시 미국에 한국인 유학생이 드물 때라 모든 사람들이 동양인인 저를 신비하게 바라봤던 것 같아요. 낯선 타국에서 홀로 열심히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대단하게 봐주기도 했고요. 사실 한국에서는 한 번도 주목받아 본 적이 없었거든요. 그런데 그곳에서는 사람들도 좋게 봐주고, 거기다 돈도 한 달에 300불씩 버니까 완전히 부자가 된 기분이 들었죠.”
한국에서 일을 할 때는 한 달에 10불 정도를 벌었으니 근 몇 개월 만에 월급이 30배 정도로 뛴 셈이다. 뉴욕에 새로 생긴 큰 규모의 한국 식당으로 자리를 옮기고 나서는 월급이 더욱더 기하급수적으로 뛰었다. 1971년 시절에 한 달에 1000불의 월급을 받았으니, 이제는 그동안 미뤄놓을 공부도 할 수 있을 만큼의 경제적인 조건까지 충족됐다.
“미국에서 돈을 벌고 가장 먼저 한 일이 대학교에 들어가는 거였어요. 뉴욕에 위치한 퀸스 칼리지 입학해서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낮엔 학교를 다니고 밤에는 식당에서 일을 해야 했기 때문에 체력적으로는 고되기도 했지만 그래도 ‘희망’이 있어서 행복했던 시절이었어요.”
이제 정말로 불행은 끝이 난 것 같았다. 그이에게 남은 인생은 꽃길뿐이라는 자만심도 들 무렵, 전혀 예상치 못했던 곳에서 그이는 한 번 더 세상으로부터 시험을 당해야 했다.

위기는 기회를 낳는다

 
1975년, 미국생활 4년 만에 한국인 남자와 사랑에 빠져 행복을 꿈꾸며 일군 결혼생활이 그 불행의 씨앗일 줄이야. 남편의 지속적인 폭력을 견디다 못해 도망치듯이 군 입대를 할 정도로 힘든 시간이었다. 그이 스스로도 그 당시 결혼 생활은 ‘지옥’이었다는 표현을 쓰기도 했다.
“이혼을 하지 그랬냐고 묻는 분들도 있는데, 사실 부부 간에 이혼이라는 게 그렇게 쉽지가 않더라고요. 더구나 그 사람과 저 사이에는 딸아이도 있었기 때문에 더더욱 그랬어요. 그런데 또 마냥 같이 살 수도 없을 만큼 폭력에 노출되다 보니까…, 결국 8개월 된 딸아이를 지인에게 부탁하고, 군 입대를 하게 된 거죠. 그때는 그게 최선이었어요. 딸아이와 저 모두가 살 수 있는….”
군 입대는 당시 그이에게 준비되지 않았던,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그것 역시 어떤 운명적 힘이 작용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군인으로 능력을 인정받은 그이는 훗날 장교로 임관, 소령까지 진급해서 1996년 소령으로 전역했으니 말이다. 물론 처음부터 군인으로서 탄탄대로를 걸었던 것은 물론 아니다. 군 입대 동기들보다 평균 10살은 많은 나이에 군에 들어갔고, 게다가 그때는 아이를 낳은 지 얼마 되지 않은 후라 체력적으로도 뒤처질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처음에는 윗몸일으키기 하나도 제대로 못했어요. 구보도 3분 뛰니까 숨이 끊어질 것처럼 차더라고요. 그런데 군대에서 그런 개인 사정을 다 봐주지는 않죠. 호되게 벌을 받기도 하고, 한참 어린 친구들 앞에서 야단도 많이 맞고 그랬어요.”
하지만 지금껏 선택한 것에 대해 늘 최선을 다했던 그이가 아니었던가. 그이는 특유의 성실함과 끈기로 이를 악물고 훈련에 임했고, 결국 최우수 훈련병으로 졸업하게 된다. 직업군인 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어린 시절 갈망했던 학업에 대한 열정은 놓지 않았다. 군인으로 바쁜 와중에도 그이는 약 15년 동안 여섯 군데의 대학을 거쳐 1990년, 마흔 둘의 나이에 비로소 어린 시절 꿈꿨던 ‘박사’라는 목표에 한 걸음 다가선다. 하버드대 국제외교학·동아시아언어학 석사과정에 입학한 것. 2년 뒤에는 박사과정에 합격했고, 2006년 하버드 입학 16년 만에 당당히 박사학위를 받았다.
“일을 하며 공부를 병행하는 것이 물론 쉬운 일은 아니었어요. 하지만 꿈이 있고 목표가 있으면 못할 일 또한 없는 겁니다. 내 인생이 불행할 것인가, 행복할 것인가를 결정할 수 있는 것은 타인이나 어떤 상황이 아닌 바로 내 자신이에요.”
희망은 또 다른 희망을 낳는다고 했던가. 이 가운데 서 소장의 딸도 어머니와 함께 하버드대에 합격, 모녀는 미국 내에서 ‘하버드 최초의 모녀 재학생’으로 화제가 되기도 했다. 현재 그이의 딸은 서 소장과 마찬가지로 대학 졸업 후 미군 육군 소령으로 근무하고 있다. 어머니가 걸어간 길을 그대로 따라가고 있는 것. 과거 서 소장에게 폭력을 가했던 남편과는 결국 헤어졌다. 처음 직업 군인이 됐을 무렵에는 남편과도 다시 결혼생활을 이어가고 아들도 낳았지만 오래 가지 못했다. 이혼 후 아들과는 본의 아니게 떨어져 생활해야 했던 아픔도 있다. 하지만 아들 역시 딸처럼 건실한 청년으로 자라줬고, 그이는 그 모든 것이 감사할 뿐이라고 말한다.
“평생 모든 것을 완벽하게 갖추고 살아갈 수는 없어요. 인생은 늘 기쁨과 슬픔이 공존하죠. 군 전역 후 1999년에 첫 책을 출간하고, 이후에도 여러 책을 출간하며 방송출연과 강연을 하는 와중에 잠시 C형 간염으로 장기 치료를 받은 적이 있어요. 사람들이 저를 보고 ‘성공한 사람’이라는 지칭을 해주던 그 시기, 아이러니하게도 저는 그때 치료 후유증으로 인한 지독한 우울증에 시달렸습니다. 희망을 말하던 제가 오히려 절망의 나락에 다시 떨어진 거였죠. 하지만 그때 제 책을 읽고, 제 강연을 들었던 분들의 편지들이 저를 일으켜 세웠어요. 희망이란 그런 것 같아요. 돌고 도는 것. 내가 전한 희망이 다시 희망이 되어 나에게 돌아오는 그런 것 말예요.”
한쪽 문이 닫히면 다른 문이 열린다고 했던가.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다보면 분명 힘들고 아픈 순간이 올 때가 있지만, 그때에도 기회와 희망은 존재한다. “원망만 하지 말고, 주위를 둘러보라 그러면 길이 보일 것이다”는 서진규 소장의 말이 절망하고 낙담에 빠진 많은 이들에게 진실 되게 전달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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