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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묵산수전 연 김지하 시인 - 종이에 붓으로 시(詩)를 그리다
수묵산수전 연 김지하 시인 - 종이에 붓으로 시(詩)를 그리다
  • 이시종 기자
  • 승인 2015.01.29 21: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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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시인. 1970~1980년대 군부독재 시절, 그는 저항의 상징이었다. 매섭고 날카로운 필체는 시를 읽는 이의 가슴에 강한 울림을 줬다. 청년들은 그의 글귀를 읽으며 절대 권력에 반하는 자유의지를 불태웠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사람들이 그가 변했다고 했다. 등을 돌린 이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말한다. “내 소신은 흔들림이 없다”고. 최근 그는 펜 대신 붓으로 들고 사람들을 맞았다. 그는 그림으로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걸까.

사진_ 양우영 기자, 매거진플러스DB

“텅 빈 종이에 서린 큰 그늘을 생각하며 산을 그리게 됐습니다”

▲ 작품 백운산

진한 먹물로 뱀처럼 굽은 길을 천천히 강약을 조절하며 그려낸다. 붓이 지나간 길에서 힘찬 기운이 느껴진다. 그 길 저 뒤로는 백운산이 엷게 펼쳐진다. 강원도 원주시 흥업면 무수막길이다. 먹으로 빚어낸 농담(濃淡)의 차이가 조화를 이룬다.
얼마 전 서울 인사동에는 김지하 시인의 수묵산수전이 열렸다. 시인이 여는 그림 전시회라…. 그의 시에는 익숙했지만, 그가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최근에야 알았다. 소문을 듣고 찾아간 전시장에서 처음 기자를 맞은 것은 입구에 걸린 포스터다. 그 포스터에 걸린 문구가 무척이나 인상적이다. ‘아가리가 딱 벌어진다. 그림 향한 한 풀었기에’.

펜 대신 ‘붓’으로 말하다

김지하의 원래 꿈은 화가였다고 한다. 그는 서울대 미학과 출신이다. 미학은 예술의 본질을 찾는 학문이다. 그가 그림에 남다른 관심이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래도 그를 처음 만나게 된 것이 시(詩)를 통해서였고, ‘김지하’란 인물은 머릿속에 시인으로 각인 돼서인지 이 모습이 낯설게 느껴졌다. 그가 이번에 연 전시 제목은 ‘김지하의 빈산’이다. 장모인 소설가 박경리 선생이 별세한 이후 눌러앉은 강원도 원주를 비롯해 철원, 영월, 제천, 충주, 여주, 이천 등 전국을 돌아다니며 사생한 수묵 산수 100여 점을 내보인 것이다. 전시회를 앞두고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소회를 밝혔다.
“원주가 제2의 고향입니다. 중1 때 아버지를 따라 처음 원주에 왔어요. 전쟁 직후라 쑥대밭이었죠. 2008년 장모(소설가 박경리)께서 돌아가시고, 아내가 원주 토지문학관장을 맡게 되면서 저도 함께 내려왔죠. 그리고 영월, 제천, 충주, 여주, 이천, 용인, 철원 등을 돌아다녔어요. 택시 값도 꽤 들었죠. 주변 산하를 순례하며 우리 땅과 사람을 다시 보게 됐습니다. 전남 목포가 고향이라 바다를 무척 좋아했는데, 나이가 들면서 바다의 시작은 산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텅 빈 종이에 서린 큰 그늘을 생각하며 산을 그리게 됐습니다.” 
그림에는 실체에 몰입해 들어가려는 그의 의지가 담겨 있는 듯했다. 때 묻지 않은 자연의 울림이 그만의 감수성과 어우러져 화폭에 녹아 있다. 붓이 지나간 자리에는 난과 매화가 있고 활짝 핀 모란도 보인다. 후드득 소리를 내며 떠는 나뭇가지와 꽃들이 손 밑에서 자라난 것처럼 생생하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이야기했다.
“그림 그리는 게 이렇게 행복한 줄 몰랐습니다. 4~5세 때부터 그림을 그리는 것을 좋아했지요. 외가의 뒤뜰에 있는 모란이 제일 그리고 싶었어요. 그러나 어린 시절 제 어머니는 ‘그림을 그리면 배고프다’며 어린 제 두 손을 꽁꽁 묶어 놨죠. 그럴 때마다 저는 발가락에 숯을 끼워가며 꽃과 새를 그렸습니다.”
비록 어머니의 반대 때문에 그림을 포기했지만, 그림에 대한 그리움과 열망은 식지 않았다. 미학과에 진학하게 된 것도 온전히 그림 때문이었다. 그가 입학할 당시만 해도 서울대 미학과는 문리대가 아닌 미술대에 속해 있었다. 동?서양화는 물론 사군자, 데생을 한꺼번에 배울 수 있다는 선배의 꼬드김에 입학하게 된 것이다.   
다시 본격적으로 붓을 잡게 된 것은 1980년대부터다. 7년여의 투옥 끝에 석방된 뒤 난초를 치기 시작했다. 옥고로 약해진 심신을 추스르고, 정치권?운동권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수양법이었다. ‘먹참선’이라고 했다. 바람과 난초를 동시에 포착한 ‘표연란(飄然蘭)’이 일품이었다. 빼어난 기량으로 문인화의 전통을 잇는다는 평도 들었다.
그는 이후 달마도를 비튼 ‘코믹 달마’ 연작과 눈보라 속에 피어나는 한매(寒梅)로 그림의 주제를 넓혀갔다. 2001년 회갑기념전 등 크고 작은 전시를 열어왔다.
이번 전시는 그에게 어느 보다 특별하다. 역대 전시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클 뿐더러 그가 산수와 모란을 처음 시도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이번 작품에는 ‘지하’라는 필명 대신 시인의 본명인 ‘영일’을 남겼다.
그는 “서울대 학생 때 시화전을 하면서 ‘지하’라는 필명을 지었는데, 나중에 성명학자가 ‘매일 감옥에나 가겠군’이라 했다”며 “새 시대가 와서 나도 감옥에 안 가고 잘 살려고 지하대신 영일이라고 썼다”고 말했다.  
그에게 산수화를 그리는 과정은 우주의 본질에 접근하는 것이고, 몸과 마음을 닦는 수신이기도 하다. 예술의 본질에 접근하려는 신념에 찬 필치가 토해내는 그의 산수화는 기운생동(氣韻生動)의 실체로서 시각적인 해방감을 맛보게 한다.
그림마다 시인은 ‘모심’이란 낙관을 찍었다. 모시는 마음으로 살겠다는 뜻이다. 그의 도록에 쓰여 진 글귀에는 그림에 대한 그의 태도가 고스란히 적혀 있다.
“수묵산수는 우주의 본체에 대한 접근입니다. 서양화의 사실주의와 다르죠. 산(어두움)과 물(밝음), 농경과 유목문화의 대비 등을 담채와 진채로 드러냈습니다. 원주 부근은 백두대간의 중심입니다. 저는 중조선이라고 부릅니다. 우리의 숱한 갈등을 풀어가는 해법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저항에서 벗어나 생명으로 꽃을 피우다

 

사실 요 몇 년 사이의 그의 행적에 호불호가 많이 갈리는 것이 사실이다. 그는 한 때 저항과 민족문학의 상징이었다. 1970년~1980년대 내내 유신독재에 대한 저항운동의 중심으로서 도피와 유랑, 투옥과 고문 등 형극의 길을 걸어온 반체제 저항시인으로 알려졌다. 1970년 <사상계>에 권력 상층부의 부정과 부패상을 판소리 가락으로 담아낸 담시 <오적>을 발표하면서 군사독재시대의 ‘뜨거운 상징’이 됐다. 또 1982년에 발표된 그의 대표시인 <타는 목마름으로>는 운동권에서 가장 많이 애송된 시 중 하나였다.
하지만 사람들은 언젠가부터 그가 변했다고 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로부터 등을 돌렸다. 그에게 ‘변절자’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늘어갔다. 일련의 일들은 그에게도 큰 상처가 된 듯하다. 그는 내적 충격으로 정신병원에 수차례 입원하게 된다. 여전히 그를 불편하게 바라보는 시선이 존재한다. 이런 시선을 그는 어떻게 느끼고 있을까. 최근 한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민주화와 산업화를 뛰어넘는 새로운 국가 모델을 만들어야 해요. 저를 반동분자?변절자라고 하는데, 반동은 공산주의자나 쓰는 말입니다. 저는 원래부터 조직이나 붕당(朋黨)을 피해 왔습니다. 자본주의?공산주의 다 부차적인 겁니다. 판소리?동학?화엄불교 등 민족 전통을 끌어올리는 문화력이 바로 원만이요, 통일로 가는 길이죠. 해방 직후 김구 선생의 첫마디도 문화이지 않았습니까. 우리 모두 안에 하느님이 있다는, 즉 내가 나에게 절을 하는 동학의 ‘향아설위(向我設位)’가 대답입니다. 제게 그림은 그런 인간에, 세상에, 우주에 대한 모심입니다.”
오랜 병고 끝에 그는 ‘저항’을 내려놓고 ‘생명운동’이라는 화두를 세상에 던졌다. 그는 수감 중일 때 감옥에서 꽃과 풀을 보며 생명사상을 깨쳤다고 했다. 수감 당시 그는 정신적으로 병을 앓게 됐는데, 민들레 씨가 감옥 창살 사이로 막 날아드는 것을 보고 생명의 위대함을 느꼈다고 했다.
“순간 이런 깨달음이 왔어요. 저런 미물도 생명이다. 그런데 ‘무소부재(無所不在)’라! 못 가는 곳 없고 없는 데가 없으며 봄이 되어서는 자라고 꽃까지 피우는데, 하물며 고등 생명인 인간이 벽돌담과 시멘트 벽 하나의 안팎을 초월 못해서 쪼잔하게 발만 동동 구른대서야 말이 되는가. 생명의 이치를 깨닫고 몸에 익힌다면 감옥 속이 곧 감옥 바깥이요. 여기가 바로 친구들과 가족이 있는 저기가 아니던가!”
그 후 그는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했다. 생태학, 환경학, 불교에 이어 테이야르 드 샤르뎅의 고생물학 책을 읽었다. 그 책을 보다 그 원리가 동학에 있다는 것을 알게 돼 ‘사상의 본거지’를 동학으로 옮겼다. 그의 증조부와 조부는 모두 동학운동을 하다 생을 마감했다. 그에게 동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곧 집안의 신앙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생명운동의 시작이었다. 이후 그의 철학의 근본은 동학이 됐다. 동학사상에 매진한 그가 이른 곳은 ‘율려(律呂)’였다. 율려는 원래 음악 용어이지만, 음양오행의 동양철학에 기초하고 있고, 고대 신화에서 천지창조의 주인공으로 일컬어지는 등 철학, 신화학 등에서도 다양하게 사용되는 용어다. 음계에서 율(律)은 양(陽)이고 려(呂)는 음(陰)이다.
그가 말하는 율려는 음양의 조화를 말한다. 우리 전통 우주와인간의 관계를 가리키는 개념이기도 하다. 대립되는 것을 끌어안는 조화. 그는 이 혼돈의 사회에 온전하게 세워질 수 있는 중심으로 율려를 말했다.

신작으로 새로운 비전 제시

최근 있었던 그의 생애 첫 출판기념회에도 그는 동학사상을 이야기했다. 남과 북의 대립을 극복하고 통일로 나아가려면 동학사상에서 길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최제우 선생은 칠언절구 시 ‘남신원만북하회(南辰圓滿北河回)’에서 통일 이야기를 했습니다. ‘남신원만북하회’는 남쪽에서 통일, 혁명, 개벽의 샛별이 떠도 중조선의 원만을 획득해야 북쪽의 강물 방향, 즉 문면의 방향을 바꾸게 된다는 얘기입니다. 이 시를 갖고 통일을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북한의 극좌, 남쪽의 극우, 극좌와 극우 사이에 이 민족이 끼여 있다”면서 “극좌와 극우가 극복되지 않으면 대한민국이 일어설 수 없다”고 역설했다. 극좌와 극우, 남과 북의 대립은 최제우 선생이 말한 ‘원만’을 획득해야 해소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번 전시에서의 그림과 최근에 그가 발표한 신작 <수왕사>, <초미>, <아우라지 미학의 길> 역시 이런 철학을 토대로 태어난 것들이다.
그는 “<초미>는 우리 민족 고대 경전인 천부경을 다룬 책으로 여성권력의 모자란 측면과 남성 권력의 보조적 역할을 문제로 삼은 것”이며, “<아우라지 미학의 길>은 우리 민족이 창조해야 할 전 인류 미래문화 출발점으로서의 ‘한국 네오르네상스’를 다뤘다”고 설명했다.
문학과 철학, 예술과 현대과학을 마음대로 넘나드는 그의 풍부한 지적편력은 이따금 우리에게 현기증을 일으키게 하며, 때로는 지적인 열등의식을 자극하기도 한다.
그래서 천재는 외롭다고 하는 것일까. 그의 대한 평가는 입장에 따라 갈릴 수도 있다. 하지만 그가 타고난 문장가이며 혁명가이자 실천가임은 부정할 수는 없다. 평탄치 않은 삶을 살아온 그이지만 여생만큼은 자신이 그려 놓은 그림처럼 평온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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