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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올리니스트 클라라 주미 강 ‘Music in my life’
바이올리니스트 클라라 주미 강 ‘Music in my life’
  • 이시종 기자
  • 승인 2015.02.21 02: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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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만큼 성숙해진 연주

클라라 주미 강. 일찌감치 연주 실력과 미모로 클래식 계에서 알아주는 스타다. 서울대 음대 강병운 교수와 소프라노 한민희 씨의 딸인 그녀는 두 살 반 때 바이올린을 처음 잡았다. 네 살 때 독일 국립음대 예비학교에 입학한 이래 천재성을 바탕으로 승승장구 했다. 그러다 12세 때 손가락을 다쳐 연주를 쉬어야 하는 불운을 겪으며 노력형 천재로 다시 태어났다. 천재 소녀에게 닥친 큰 시련은 ‘훌륭한 음악가는 재능과 뼈를 깎는 노력이 병행돼야 한다’는 일종의 하늘의 계시였다.

취재_ 이시종 기자 사진_이종철 의상_ 이영주콜렉션(02-3442-4801) 헤어 메이크업_ 브랜드엠(헤어 지서원장, 메이크업 이경은원장 02-516-1116) 주얼리_ 세미성(02-558-8403) 장소협찬_ 서울컨벤션웨딩홀(02-551-0091)

“사람을 움직이고 위로해 줄 수 있는 음악가가 되고 싶다”

올해 유난히 큰 공연이 많았다. 스위스 로망드 오케스트라, 비엔나 챔버 오케스트라, 상트 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등 잇따른 강행군으로 피곤할 만도 한데, 클라라 주미 강의 목소리는 여전히 생기 넘쳤다. 많은 이들이 그녀를 보고 이렇게 말한다. ‘외모로 먼저 시선을 끌지만 연주 실력으로 관객을 더 놀라게 만드는 바이올리니스트’라고.
그녀는 2010년 세계 3대 바이올린 콩쿠르라 불리는 미국 인디애나폴리스 국제 바이올린 콩쿠르와 일본 센다이 국제 바이올린 콩쿠르에서 동시에 우승하며 전 세계를 놀라게 했다. 현재 유럽 미국 한국 일본 남미 등 전 세계에서 활발하게 활동 중이다.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난 ‘음악 신동’

“올해 큰 공연들이 많아 유난히 바쁜 한 해를 보냈어요. 이번에는 강효 선생님께서 이끄시는 세종솔로이스츠 20주년과 선생님 칠순을 축하, 기념하는 공연에 참여하게 되어 입국하게 됐어요. 연말까지 여러 공연들이 있고, 새해에는 중국 베이징에서 신년 음악회가 있어서 다녀오게 될 것 같아요.”
또래의 젊은이들 같으면 연말연시에 한껏 들뜬 가운데 보낼 것이다. 하지만 그녀에게 연말은 그저 일년 12달 중 한 달이고 오히려 가장 바쁜 날 중 하나인 듯했다. 언제나처럼 빡빡한 일정 속에 최고의 연주를 위해 차분히 연습할 뿐이다.
그녀는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서울대 음대 강병운 교수이고, 어머니는 소프라노 한민희 씨다. 이런 이유로 자연스럽게 음악을 접하며 자랐고, 음악을 한다는 것이 당연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집안에서 4녀 중 셋째로 태어났는데, 태어날 때부터 음악과 함께 자랐어요. 오빠, 언니도 다 음악전공이어서 저희 집에는 음악소리로 가득했죠. 그래서 그런지 음악 하는 것이 당연하게 느껴졌어요. 처음 활을 잡은 건 두 살 반 때였어요. 7살 많은 언니가 바이올린을 먼저 했는데, 제가 바이올린 소리를 너무 좋아해서 저도 하고 싶다고 부모님을 졸랐죠. 그러다 크리스마스 선물로 바이올린을 처음 받았어요. 산타 할아버지를 믿을 때라 산타 할아버지가 주신 선물이라고 생각했어요(웃음).”
부모님께 물려받은 음악적 재능은 놀라웠다. 그녀는 4세에 최연소 나이로 독일 만하임 국립음대 예비학교에 입학했고, 5세에는 함부르크 심포니 오케스트라 데뷔 연주, 7세에 줄리아드 전액 장학금 입학 등, 음악신동의 면모를 보이기 시작했다. 신동이라는 이야기에 그녀가 수줍어하며 이렇게 말했다.
“어려서부터 즐기듯 연주해서 연주하는 것은 전혀 떨리지는 않았어요. 부담을 느끼면서 연주를 했던 적은 없던 것 같아요. 줄리아드에 입학하니 제 주위가 다 신동이더군요. 그때부터는 신동이라는 것을 느끼지 못하고 그저 음악을 즐겼어요.”  
그녀는 세계적인 지휘자 바렌보임의 집에서 1년간 살았다. 바렌보임은 아버지와 친분이 깊었다. 음악계에서는 성격이 세다는 평을 듣는 바렌보임이지만 그녀는 “나한테 화를 내신 적이 한 번도 없다”라고 했다. 늘 음악 얘기를 했고, “연주해 볼래?”하고는 직접 피아노 반주를 해주기도 했다.
“제 연주를 들어주시고 좋아해주셨어요. 자연스럽게 인연을 맺었죠. 정말 말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 음악적으로 많이 배웠고, 제 어린 시절에서 가장 행복한 인연이고 추억으로 기억되고 있어요. 저랑 사모님, 아들 두 명. 이렇게 살았어요. 집이 굉장히 컸어요. 지붕 모양으로 된 3층이 있었는데, 저 혼자 다 썼어요. 편하게 지냈죠. 가족처럼 밥도 같이 먹고. 사모님이 너무 좋은 분이셨어요.”

 

‘타고난 천재’에서 ‘노력 형 천재’로 거듭나다

어려서부터 천재성을 보였던 그녀의 음악인생은 탄탄대로로 가는 듯했다. 그러나 어린 나이에 그녀의 음악인생을 뿌리째 흔들 만큼 큰 사고를 겪게 된다. 독일에서 천재소녀 연주자로 이름이 났던 그녀는 초등학교 시절 교내 여자농구팀을 모집한다는 게시물을 보게 된다. 지금도 큰 키지만 그때 이미 165cm였다고. 독일 여자애들보다 큰 키였다고 한다.
어쨌든 신나게 농구를 하던 클라라 주미 강은 덩치가 큰 러시아 여자애에게 떠밀려 넘어졌고, 바이올리니스트에게는 목숨과도 같은 손가락을 다치고 만다. 새끼손가락이었다. 세계적인 지휘의 거장 바렌보임과의 연주회를 한 달 남짓 남겨 둔 상황이었다. 이후 두 번의 수술을 받아야 했지만, 결국 다시는 연주할 수 없다는 가혹한 판정이 내려졌다.  
“박탈감이 심했죠. 음악 말고는 잘하는 것도 없었고 학교도 잘 안 나갔었거든요. 연주한다고 하면 학교에서도 수업을 빼주곤 했으니까요. 지금은 다시 연주를 하고 있으니 상처가 크게 남아있지는 않지만 만약 다른 길을 가야 했다면 평생 아픔으로 남았을 겁니다.”
3년 반이라는 시간은 아픔이기도 했지만 평범한 일상을 선물하기도 했다. 또 음악이 아닌 다른 학문에 자연스럽게 관심을 기울이게 되는 계기가 됐다.
“악기를 놓으면서 친구도 많이 사귀고 그동안 못 해봤던 것도 실컷 해봤어요. 음악만 생각하다가 제 의지와 상관없이 그만두게 됐을 때 심리학에 관심을 많이 가지게 됐죠. 음악 치료를 공부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당시에는 정말 힘들었지만 제 인생에서 꼭 필요한 순간이었다고 생각해요.”
2년여의 재활 기간 후 그녀가 다시 바이올린을 시작하겠다고 했을 때, 가족이 모두 나서서 말렸다. 특히 아버지의 반대가 심했다. 환상을 가졌다가 무참하게 깨어졌을 때, 딸이 감내해야 할 커다란 심적 고통을, 아버지는 떠올렸을 것이다.
부상에서 회복하고, 다시 바이올린 활을 잡았지만 처음 2년은 힘이 들었다. 다시 기초부터 잡아야 했다. 클래식의 본고장인 유럽에서 자라며 발레리 그라도프를 사사했고 미국으로 건너가 줄리아드에서 도로시 딜레이에게 배운 그녀는 역유학을 택해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입학했다. 바이올리니스트 김남윤 교수에게 배우기 위해서였다. 한예종 예술영재로 선발돼 고등학교 과정이 없이 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
“부상으로 인한 슬럼프를 겪던 때라 저를 아는 선생님 밑에서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어요. 어렸을 때 저를 본 적이 있는 김남윤 교수님께 배우기 위해 한예종을 택했죠. 중학교 졸업 후 바로 진학이 가능하니 시간도 벌 수 있고요.”
그녀는 불운을 겪으며 노력형 천재로 다시 태어났다. 천재 소녀에게 닥친 큰 시련은 ‘훌륭한 음악가는 재능과 뼈를 깎는 노력이 병행돼야 한다’는 일종의 하늘의 계시가 아니었을까. 그녀는 부상 이후부터 콩쿠르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전까지를 ‘무명 시절’이라 칭했다. 모든 것이 다 무너지는 느낌이었고 뭘 해도 안 되던 때라고 기억했다. 절치부심하던 그녀는 2010년 인디애나폴리스 바이올린 콩쿠르에서 우승하며 화려하게 재기했고, 떠오르는 신예 바이올리니스트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손가락 부상 덕분에 성격이 많이 좋아진 것 같아요. 어릴 적엔 음악을 하는 게 너무 당연한 거였죠. 나쁘게 보면, 지금처럼 소중하지 않았어요. 태어나서부터 했으니까. 가족이 다 음악을 하니까, 나도 해야 한다 … 이런 것.”

세계적인 음악가는 외롭다

‘세계적인 연주자’가 된다는 것은 ‘세계적인 고독함’을 견뎌야 한다는 얘기와도 같다. 사람들은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자신이 좋아하는 연주를 한다고 부러워하지만, 무대에 오르기 전까지는 외로움과 싸워야 한다.
“우리들이 연예인을 봐도 그 화려함만 보지 얼마나 많은 외로움이 있는지 모르잖아요. 너무나 외로울 때가 많죠. 밥도 혼자 먹는 때가 대부분이고요. 연주자는 대부분 혼자 다니잖아요. 현장에 도착하면 스태프가 도와주지만 그건 호텔에 들어가기 전까지만이죠. 방에 들어가는 순간 혼자인 거예요. 지역마다 좀 다르긴 한데, 연주자는 잘 안 건드려요. 방해될까봐 그러는 거죠.”
나름의 외로움을 극복하는 방법이 있냐고 물었더니 “그냥 혼자 컴퓨터로 영화 보고, 걸어 다니면서 아이쇼핑하고 맛있는 것 먹는다”고 했다. 그래도 연주를 할 때면 너무나 행복하다. 아무리 지치고 짜증이 나고 컨디션이 안 좋다가도 무대에 올라가 몇 음을 켜면 ‘이래서 내가 이걸 하는구나’하는 마음이 든다고.
“리허설, 무대에서 연주하는 그 순간만은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행복해요. 무대에서의 40분 때문에 우리는 참 많은 걸 희생하고 사는 거죠. 이건 제 개인적인 생각인데요. 음악가는 외로움이 필수적으로 필요한 감정인 것 같아요.”
클라라 주미 강은 대학 시절 가수 제의를 받은 일이 있다. 직접 작곡한 곡들로 데모 테이프를 만들었던 것이다. 피아노 반주에 노래를 불렀다. 화음도 넣었다. 1절은 한국어, 2절은 영어 하는 식으로 한국어, 영어, 독일어로 녹음했다.
“2006년이었나 … 콩쿠르 나가서 한창 신나게 떨어지고, 신나게 바이올린 안 풀릴 때였죠. 아빠가 ‘넌 바이올린 안 맞겠구나’ 하던 타이밍이었어요.”
이 데모 테이프를 들은 미국의 프로듀서가 “가수해 볼 생각 없냐”고 연락을 해왔다. 보통 프로듀서도 아닌, 셀렌 디온의 프로듀서였다고 한다. 혹시 그녀가 팝을 부르는 모습을 볼 수 있을까. 이런 질문에 그녀는 “팝에 관심은 있지만, 제가 팝을 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고 선을 그었다. 그녀에게 올해의 계획과 미래의 모습은 어떤 모습인지 물었다.
“사람을 움직이고 위로해 줄 수 있는 음악가가 되고 싶어요. 항상 연구하려는 자세를 잃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항상 음악가로서 매년 끝없이 발전하는 것이 목표죠. 미래 계획이요? 계획대로 사는 사람을 보면 부럽고 존경스럽고 닮고 싶어요. 제 인생도 어떤 부분은 계획적으로 살 수 있기를 바라요. 어떤 부분에서는 또 계획하는 것보다는 그냥 제가 지금 사는 방식이 더 좋은 것 같아요. 미래에 제 가족과 제 아이가 생기면 제 인생이 자연스럽게 연주생활과 계획적인 일상, 이 두 개의 밸런스를 찾게 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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