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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자녀 칭화대, 베이징대 합격시킨 이채경 엄마의 중국 유학 로드맵
두 자녀 칭화대, 베이징대 합격시킨 이채경 엄마의 중국 유학 로드맵
  • 서효정 기자
  • 승인 2015.02.22 00: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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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아이비리그 합격 수기는 그동안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 유학 패러다임의 중심은 미국이 아니다. 대세는 중국, 중국이 기침을 하면 세계가 몸살을 앓는 시대가 왔다.

취재 서효정 | 사진 맹석호 | 자료제공 ‘왜 리더들은 자녀를 중국으로 보낼까’(다산에듀)

삼성,SK 등 국내 굴지의 기업가들은 일찌감치 자녀를 중국에서 교육시키고 있다. 삼성전자 이재용 부회장의 아들은 중국 상하이로 유학을 떠났고, SK그룹 최태원 회장 역시 두 딸을 일찍이 중국에서 공부시켰다. 최근 한국에서 해군 장교로 입대해 화제가 됐던 최 회장의 둘째 딸은 베이징대 광화관리학원(국내 대학으로 치면 경영학과에 해당한다)을 졸업한 재원이다.
비단 국내뿐만이 아니다.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은 어린 두 딸에게 중국어를 가르치고 있다고 알려졌고, 투자가로 잘 알려진 짐 로저스 회장은 공개적인 자리에서 “내가 줄 수 있는 최고의 조언이 있다면 자식에게 중국어를 가르치라는 것이다”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이는 미국의 정재계인사들도 중국의 가능성을 높이 점치고 있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만큼 중국의 잠재력은 무궁무진하고, 앞으로는 세계 경제에 중국이 미치는 영향력이 더욱 더 어마어마해지리라는 분석은 짐작이 되는 터. 이러한 중국의 가능성을 미리 알아보고, 일찌감치 두 자녀를 중국에서 공부시켜 중국 최고 명문대로 꼽히는 칭화대, 베이징대에 합격시킨 엄마 이채경 씨를 만났다. 그이가 말하는 성공적인 중국 유학 생활의 모든 것.

미래의 비전은 중국에 있다

이채경 씨는 대학에서 중어중문학을 전공했다. 사실 그이가 대학에 들어갔을 당시만 해도 중국은 땅만 넓을 뿐, 가난한 사회주의 국가라는 인식이 강했다. 비전은커녕 학생들이 기피하는 전공에 가까웠다. 그이 역시 처음에는 중국이라는 나라 자체에 큰 관심이 없었으나 당시 IT사업을 하고 있던 큰 오빠의 적극적인 추천에 따라 중어중문학과에 진학하게 됐다. 평소 중국의 가능성에 대해 자주 언급하던 그이의 큰 오빠였다.
그런데 머지않아 그 조언은 곧 현실이 됐다. 1992년, 거짓말처럼 한중수교가 이뤄진 것이다. 이후부터 중국은 빠르게 성장했고, 2004년에는 WTO에 가입, 연 8%의 경제 성장률을 보이며 세계 소비시장의 중심에 서면서 미국을 위협하는 패권국가가 되었다. 예상보다 훨씬 빠른 기간 안에 이뤄진 일이었다.
“나폴레옹이 이런 말을 했잖아요. 중국이 잠에서 깨어나면 세계를 흔들어 놓을 것이라고. 적중했어요. 지금 이 순간도 중국은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어요.”
운명이었을까. 그이가 중국에 대해 더 관심을 가지게 될 무렵, 2004년 즈음 남편의 직장 문제로 갑작스레 홍콩으로 떠나게 된다. 딸 현지 양이 열여섯 살, 아들 동인 군이 열네 살 때였다. 그렇게 운명 같은 우연으로 중국과 가까운 홍콩에서 3년을 지내게 되며, 그이는 틈틈이 아이들을 데리고 중국을 여행하곤 했다.
“그 시기 중국은 우리나라의 1970년대와 2000년대가 공존하는 모습이었죠. 도로 위에 다 낡은 오토바이들이 그득한 가운데 간간히 보이는 외제차들이라던가, 땅을 갈아엎어 거대한 무언가를 새로이 짓고 있던 많은 공사현장들까지 중국의 변화과정을 직접 목격했던 것도 의미 있는 경험이었어요.”
물론 아이들은 처음에 중국을 무섭다고까지 할 정도로 중국여행을 반기지 않았다. 두 아이 모두 홍콩에서 국제학교를 다니고 있을 때였는데, 홍콩이랑은 너무 다른 사람들과 그 분위기가 낯설고 두려웠던 것이다. 하지만 그이는 내심 아이들이 홍콩이 아닌 중국에서 공부하길 바랐단다.
“오늘날 많은 전문가들은 중국의 경제가 지금처럼 매해 연평균 8% 전후로 성장한다면 중국어가 영어를 제치고 세계의 제1언어가 될 날이 머지않았다고 하죠. 저는 홍콩에서 살면서 그 변화의 흐름을 조금 더 빨리 느꼈던 것 같아요.”
또 한 번 운명처럼 선택의 시간이 왔다. 홍콩에서 머문 지 3년이 지나고, 아이들은 홍콩 국제학교를 마칠 즈음 남편이 다시 서울로 발령을 받은 것이다. 부부는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중대한 결심을 한다. 아이들이 공부를 마칠 때까지만 남편 혼자 서울에서 지내도록 하고, 그이는 아이들을 데리고 중국유학을 떠나기로 한 것이다. 물론 아이들이 처음부터 중국행을 흔쾌히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딸아이는 사춘기였던 때라 한국으로 들어가겠다는 고집을 부리기도 했다. 중국 문화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가 깊었던 탓이었다.
“중국 유학을 거부하는 아이들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어요. 일종의 ‘미리보기 유학’인 셈인데 중국 내 학교에서 일 주일만 청강 수업을 들어보고, 그 뒤에 결정을 하라는 것이었죠. 다행히 기간을 짧게 정해 놓으니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더라고요.”
그때부터 인터넷으로 자료 조사를 시작하고, 어떤 곳은 직접 여행을 가서 세세히 둘러보기도 했다. 베이징을 시작으로 심천, 주하이, 후이저우, 산토우 등 다양한 곳을 조사한 끝에 그의 마음에 들어온 곳은 칭다오였다. 산둥성의 동쪽에 있는 항구 도시 칭다오는 명문 학교가 많았으며, 도시도 깨끗했고 무엇보다 우리나라의 많은 기업이 진출해 있어 한국 사람들도 비교적 많이 살고 있던 곳이었다.
그리하여 칭다오의 명문 칭다오A중학교(중국에서는 중학교는 초중, 고등학교는 고중이라고 부르며 칭다오A중학교는 고등학교 과정만 있다)에 청강 수업을 요청하는 편지를 직접 썼고, 일주일 만에 허락의 답신을 받게 된다. 그이의 이러한 열정적인 노력이 통했는지, 아이들은 약속했던 일주일의 청강 수업을 마친 후 중국에 남아 공부를 하고 싶다고 했다.
그렇게 한국으로 돌아가겠다고 떼를 쓰던 아이들의 일주일 전 모습을 생각하면 전혀 예상 밖의 말이었다. 일주일간의 학교생활에 아이들 스스로가 만족을 느꼈던 결과였다.
“그때만 해도 아이들이 중국어를 거의 하지 못했던 상태였기에 짧은 기간이지만 학교 안에서의 교우관계가 아이들에게 좋은 영향을 끼친 것 같아요. 좋은 친구들을 만났기에 중국에 대한 이미지도 좋아졌고, 그들과 함께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죠.”

자연스럽게 중국을 접하고 느낄 것

그렇게 아이들의 중국유학이 결정됐다. 그이의 남편은 서울로, 그이와 아이들은 중국 칭다오로 떠났다. 아이들을 위한 선택이었기에 잠시 헤어짐을 감수한 엄마, 아빠를 보며 아이들은 더욱 더 열심히 공부에 매진할 것을 다짐했다고 한다.
우선은 중국어 공부가 시급했다. 사실 중국어에는 병음(중국어 발음기호), 성조(말의 높낮이)가 있어 독학을 하기에는 어려운 부분이 많다. 그이는 인맥을 총동원해 과외 선생님을 알아보기 시작했고, 결국 좋은 선생님을 만날 수 있었다.
“중국어에도 표준어와 방언이 있잖아요. 그런데 그 방언이 너무 달라서 서로 못 알아듣는 상황도 벌어지죠. 예를 들어서 광둥성 사람과 푸젠성 사람이 만나면 의사소통이 전혀 되지 않아요. 그래서 과외 선생님을 구할 때도 몇 가지 원칙이 필요해요. 표준어를 정확히 사용할 수 있으며, 최소 3년 이상은 한국 사람을 가르쳐 본 적이 있는 분이어야 했죠. 사실 외국인들은 중국어를 배울 때 발음의 강약이나 성조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데, 그 점을 잘 알아야 효과적으로 가르쳐줄 수 있기 때문이에요.”
그이의 탁월한 선택으로 아이들의 중국어 실력은 몰라보게 향상됐다. 칭다오 A중학교에 입학하면서는 기숙사 생활을 했는데 언어문제로 큰 불편함은 겪지 않았다. 8명이 방 하나를 쓰는 기숙사 생활이 불편했을 법도 한데, 아이들은 학교에 잘 적응했고 기숙사 생활도 그저 즐겁다고 할 만큼 스스로 중국 생활에 만족을 표했다.
“하고자 하는 의지가 그만큼 중요한 것 같아요. 사실 딸 아이는 처음에 중국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 밥을 못 먹다보니 살이 엄청 빠졌었어요. 그런데 어차피 중국에서 공부를 하기로 마음먹은 이상 적응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는지 얼마 가지 않아 중국 음식도 잘 먹게 되더라고요. 국적과 문화가 다른 친구들과 공부하며 생활하는 것이 마냥 쉽지만은 않았지만 엄마, 아빠와의 약속으로 또 스스로의 의지로 극복했던 셈이죠.”
서울에서 홀로 지내고 있던 남편과는 포털사이트에 ‘생쥐’라는 이름의 가족 카페를 만들어 수시로 이야기를 나눴다. 남편은 한국 주요 일간지들의 기사를 카페에 올리며 아이들이 한국 문화와 소식을 잊지 않도록 했고, 또 한국의 역사, 중국 근대사와 관련된 자료들을 올려 공부하게 했다. 그 결과, 아이들은 간혹 중국의 학생들이 한국과 관련이 있는 민감한 역사에 대해 잘못 알고 부분이 있다면 확실한 근거를 들어 조목조목 설명할 줄 알게 되었다.
“유학 생활 중이었지만 우리는 분명 한국인들이었으니까요. 올바른 역사의식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죠. 아이들은 역사 공부를 하며 서로의 차이점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되 차분히 상대가 갖고 있는 오해에 대해 대화할 수 있는 능력까지 기르게 된 것 같아요.”
그렇게 칭다오A중학교 생활을 한지 1년 2개월 정도가 지났을 무렵, 아이들은 대학입시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너무 이르다는 주변의 만류가 있었지만 아이들은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 그렇게 6개월을 입시 학원에 다니며 공부한 끝에 딸 현지 양은 칭화대 영어과에, 아들 동인 군은 베이징대 국제관계학과에 합격했다.
“사실 외국인의 경우에는 외국인 특별전형이라는 제도가 있기 때문에 입시 과목과 시험 유형만 잘 파고들어 공부한다면 시험에 합격할 수 있어요. 우리 아이들은 시기가 조금 빨랐던 편이지만 누구나 원하고 그에 걸맞은 노력을 한다면 분명 이룰 수 있는 꿈이라는 것입니다.”
중국에 온 지 채 2년이 되지 않았을 때 얻은 결과 치고는 너무도 컸고, 달콤했다. 현재 아들 동인 군은 군 복무 중으로 훗날 외교관의 꿈을 키우고 있으며, 딸 현지 양은 서울대학교 국제대학원 중국지역학과에서 석사 과정 중이다. 미래를 내다볼 줄 아는 부모의 용기 있는 결단이 아이들의 미래를 밝혔다.
“내 아이의 미래는 중국에 있다는 확고한 믿음과 비전이 좋은 결과를 얻게 한 것 같습니다. 혹 자녀의 중국유학을 준비하고 계시는 분들이 있다면 중국어능력시험부터 준비하기보다는 중국의 학교와 기숙사 혹은 홈스테이를 통해 자연스럽게 중국을 접하고 느끼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해주세요. 그렇게 하면 아이들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중국유학생활에 대한 의지와 확신이 생기게 됩니다. 우리 아이들의 잠재력은 생각보다 더욱더 무한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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