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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정 한무숙 창작 40년 산실, 한무숙 문학관
향정 한무숙 창작 40년 산실, 한무숙 문학관
  • 김이연 기자
  • 승인 2015.03.02 10: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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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인 생가 탐방
▲ =체취가 그대로 보존된 한무숙 집필실

한무숙문학관은 선생이 40년간 거주한 한옥을 개보수해 문학관으로 운영, 집필 활동의 흔적을 고이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잦은 병치레와 고충 속에서도 문학의 꿈을 포기하지 않고 열의를 다진 근대 여류문학의 선구자, 한무숙 선생의 생가로 가보자.

진행 김이연 기자|사진 양우영 기자|자료제공 한무숙문학관|참고자료 한무숙소설연구(조동주)

한무숙문학관 - 서울시 전문 박물관 등재, 한무숙문학상 개최

서울시 종로구 명륜1가 33-100. 고풍스럽게 기와 담이 둘러진 외부의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소설가 향정 한무숙 선생이 1953년부터 작고(1993년)할 때까지 40여 년을 거주한 고택을 만난다. 전통 정원(선생의 작고 이후 일부 서양식으로 개조)을 둘러싼 이 한옥은 부군 김진흥 선생이 작가 별세 후 문학관으로 개조했다.
한무숙문학관은 삶과 인간을 사랑한 작가 한무숙 선생의 생애와 문학을 체험할 수 있는 의미 있는 공간이다. 한무숙의 작품과 유품은 물론, 독자적 문학정신을 보존하고 알리기 위해 본격 설립된 한무숙문학관은 2010년 3월, 서울시 전문 박물관으로 등록되었으며 전시실과 집필실 등 4개 전시실을 중심으로 한무숙의 문학과 생애에 관해 전시하고 있다.

전시실로 거듭난 100년의 고택  
 
서울의 유서 깊은 성균관 부근에 자리 잡은 이 한옥은 20세기 초 장안의 대목 심목수라는 사람이 지었다. 바로 위에 있던 앵두밭 자리에 지금은 고층 아파트가 들어서 있고, 역시 심목수가 지었던 한무숙 생가 뒷집도 헐려 지금은 원룸 아파트가 되었다. 이처럼 전통 한옥이 하나둘 사라져 가는 가운데 이 한옥은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귀중한 사료로 남아 있다.
100여 년 전, 1910년대에 지어진 한무숙 생가는 안채, 사랑채, 행랑채가 ‘ㄷ’자로 이루어진 전형적인 한옥이다. 다만 개보수를 하기 전, 대문 옆에 있던 행랑채는 지금 한무숙문학관의 정원 화단이 되었고 한무숙의 집필실과 침실 등이 있던 안채 대청마루에는 난간이 있었다.  
1층에는 1전시실과 2전시실이 마련되어 있다. 1전시실은 본래 응접실과 작은 방이 이어져  있었다. 빛이 잘 드는 남방향의 대청마루에 위치한 1전시실은 선생의 출판기념회 등 크고 작은 연회가 열리던 곳이었다. 현재는 육필원고, 저서, 국내외 저명인사 친지 편지, 각 훈장, 생활용품 등 주요 물품이 전시되어 있다.
한무숙 선생의 대표작인 ‘역사는 흐른다’ 초판본과 천경자 화가가 표지를 그린 재판본과 단행본을 볼 수 있다.

2전시실은 선생이 생전에 국내외 문인과 명사 등 많은 손님을 대접하던 응접실을 재현한 곳으로 이승만 대통령과 미당 서정주, 월전 장우성, 소전 손재형 등 유명 문인과 화가들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어 당시 한무숙을 아껴주셨던 분들의 마음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이곳에는 유명 문인과 화가들이 작가에게 직접 선물한 족자와 평소 선생과 가까이 지냈던 김기창 화백의 그림과 구상 시인이 쓴 추모시가 남아 있고, 금융인이며 조각가이기도 했던 부군 김진홍 옹의 조각 작품과 선생이 가사 일에 사용했던 자기 항아리, 남편을 위해 직접 그린 용무늬가 새겨진 장롱도 보존되어 있다.
한옥과 붙어있는 양옥 2층 집필실은 1970년대부터 선생이 사용하던 공간으로 별세 전까지 23년간 집필 활동에 전념한 공간이다. 집안일이 끝나는 밤중에 작업이 이뤄지는 곳이었기 때문에 집필실 기능 외에 침실이자 거실이기도 했다. 삼면이 문인들의 저자 서명 기증본과 집필에 필요한 전문자료, 문학 서적들로 둘러싸여 있으며 집필도구와 일상 도구들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펄 벅과 게오르규 등 세계 유명 작가들과 함께 찍은 사진, 이어령 박사와 박재삼 시인, 박경리 소설가와 찍은 사진 등도 보인다. 젊은 작가들은 이 집필실로 작가를 만나기 위해 자주 왔었다.
3층의 3전시실은 작가의 예술 및 문학 활동의 단면을 볼 수 있는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처녀작 ‘등불 든 여인’의 육필원고, 역사 고증 과정의 메모 등과 학창시절 화가가 꿈이었던 작가의 삽화작업 및 공예품이 있다. 선생이 직접 그린 그림은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선생은 말년까지도 자택의 정원과 화분을 직접 키워 가꾸었으며, 한옥 가운데 자리한 아담한 정원은 사계절 각기 다른 아름다움을 보여주며 문학적 향취에 자연의 아름다움을 더하여 색다른 명소로 꼽힌다. 

 
잦은 병치레와 고충을 작품으로 승화

한무숙은 1918년 10월 25일, 외가인 종로구 안국동에서 출생했다. 부친은 일본 유학을 다녀온 지식인으로서 청빈 근면한 관료였다. 모친은 식사, 언어, 의복 등 여러 면에서 깔끔하고 단정하였으며 전형적인 서울 양반가의 부인이었다. 한무숙은 전통적인 사대부가의 부인을 묘사하는 데 강점을 지니고 있는데 그것은 이러한 환경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어린 시절은 부친의 직업 관계로 부산, 진주, 사천, 창녕 등을 돌아다니며 생활했고, 1년 반은 병석에서 지낼 정도로 몸이 허약했다. 1926년 초등학교 2학년 때 베를린 세계 만국 아동그림전시회에 입상하여 그림에 뛰어난 자질을 보이며 한국인 학생으로는 유일하게 부산고등여학교에 입학했다. 이때부터 미술학교 진학을 위해 준비했고 동아일보 연재소설 ‘밀림’에 삽화를 그렸으며 일본인 화가 아라이(荒井筏久代)에게 그림을 사사하기도 했다.
그러나 거듭되는 병으로 누워 지내게 되면서 독서에 열중하게 되었다. 그는 안톤 체홉, 도스토예프스키, 토마스 만의 작품에 매료된다. 독서와 사색으로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된 그는 인생은 바라보는 것, 생각하는 것이지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된다. 죽음에 직면해야 했던 경험과 요양생활 중의 많은 사색은 끊임없이 죽음의 의미를 해명하고자 하고, 인물의 내면 심리를 드러내는 그의 작품세계의 바탕이 된다.
1940년 병세가 호전되어 부모님 뜻대로 결혼을 했으나 종가 댁의 며느리로 힘든 시집살이를 해야 했다. 그림을 그리고 개화된 가정에서 일본인 학교를 다니는 등 색다른 환경에서 자란 그에게 결혼으로 인한 생활의 돌변은 커다란 절망을 안겨주었다.
그로 인해 그림의 꿈을 실현하기 어려워진 그는 삶의 고뇌를 글로 해소하며 작가로 전향하게 된다. 한무숙은 자서전적 수필 ‘불씨’에서 소설을 쓰게 된 동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쓴 바 있다.
“내가 하는 일, 내 주위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이 여전히 남의 일 같이만 느껴지면서 의식의 밑바닥 깊숙이 겹쳐진 채 깔려 있는 갈피 속에서 무엇인가가 ‘이것이 아닌데 이런 것이 아닌데’ 하며 절규하는 소리가 들렸다. 인간답게 살고 싶다. 내 의지가 참가하는 인생을 살고 싶다. (중략) 어느 날 그 곳에는 반은 찢어져 사용된 잡지가 한 권 매달려 있었다. 오랜만에 동강나지 않은 완전한 문장을 주워 읽는데 장편 소설 모집 광고가 눈에 들어왔다. 1,500매, 마감이 두 달 남짓 남아 있었다. 불현듯 쓰고 싶다는 생각이 불길같이 솟아올랐다. 그리고 싶다는 욕망은 팽개친 지 오래였다. 그것은 이미 난도질당하고 짓뭉개진 욕망이었다.”
그 첫 작품이 1942년 <신시대> 장편소설 공모에 응모해 당선된 ‘등불 드는 여인’이다. 1943년에는 조선연극협회 작품 모집에서 희곡 ‘마음’이, 다음해에 ‘서리꽃’이 당선되었다. 1948년에는 <국제신보> 장편소설 공모에서 ‘역사는 흐른다’가 당선되었다.
문단 데뷔작인 이 작품은 동학군에게 학살된 군수 집안의 두 아들과 딸이 격변하는 시대에 어떻게 살아가는가를 보여준 수작이다. 1956년에는 첫 창작집 ‘월훈’을 간행했고, 이듬해 ‘감정이 있는 심연’으로 자유문학상을 수상하고 같은 이름의 창작집을 간행했다. 1960년에는 장편 ‘빛의 계단’을 발간했다.
1970년에는 미국에 가 있던 차남이 교통사고로 사망하자 큰 충격으로 한때 실명하고 병상생활을 했다. 아들을 잃은 고뇌를 ‘우리 사이 모든 것이’에 담았으며, 1976년 자신의 실명 체험과 한 맹인 아내의 한 맺힌 토로에 자극받아 맹인의 세계를 그린 ‘어둠에 갇힌 불꽃들’을 발표해 호평을 받는다. 1986년에는 장편 ‘만남’으로 대한민국 문학상을 수상했다.
한무숙은 허약한 몸에 죽음을 넘나드는 잦은 병치레와 화가의 꿈을 포기해야 했던 힘든 시간들을 겪으면서도 현실을 인정하고 작품으로의 승화를 통해 충실한 삶을 산 사람이었다. 한무숙은 4편의 장편과 40편의 중·단편을 남겼으며 한국여류문학인회 회장(1980∼1982), 한국소설가협회 대표위원(1980∼1983)과 예술원회원을 역임했다.

근대 여류문학 이끈 한무숙 작품 세계

한무숙 소설의 가장 두드러지는 세계는 가부장 체제에 대한 순응과 저항이다. ‘내일 없는 사람들’, ‘귀향’, ‘환희’의 여성 인물들이 모두 가부장제 사회에서 고통스러운 삶을 산다. 그들을 괴롭히는 요인들은 남편의 축첩으로 인한 버림 받음이나 남편의 방탕한 생활, 시어머니의 학대, 가사노동 등이다.
가부장적 문화는 여성에게 침묵을 미덕으로 가르쳐왔으며 여성의 삶은 어머니로서, 아내로서의 가치가 주어질 뿐 독립적 자아로 인정받지 못했다. 한무숙은 이러한 문화에 순응하는 여성의 모습을 제시한다. 그러나 ‘수국’, ‘이사종의 아내’, ‘굴욕’에서는 여성현실에 대한 문제의식이 강하게 표출된다. 여성들은 아내로서 남편의 부도덕함, 무책임함에 대해 분노하고 남성중심 사회에 저항한다. 특히 ‘이사종의 아내’에서는 여성을 배우지 못하게 했던 조선시대 유교이념을 비판하고 방탕한 남편 뒷바라지로 인해 노비 신세로 전락하는 여성의 삶에 대해 분노하며 억압받는 여성현실에 대한 문제의식을 표출한다.
‘월운’, ‘감정이 있는 심연’, ‘축제와 운명의 장소’에서는 성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표출한다. 여성의 성적 행동을 강하게 규제했던 가부장 체제에서 성의 본질과 의미를 파악하여 성의식에 도달한다는 것은 체제에 대한 근원적 저항이었다.
그는 위 작품들을 통해 인간의 삶에서 생명의 탄생은 어떤 연유라 할지라도 고귀하고 존엄하며, 성에 대해 무조건적인 죄의식과 금기시 하려는 태도가 지양되어야 하며, 성은 인간이 인간임을 확증하는 축제의 자리라는 인식을 보여준다. 이로써 한무숙은 그 시대에 개방적으로 논의되기 어려운 논의에 대해 그 의미를 묻고 천착해 간 작가임을 알 수 있다.
‘역사는 흐른다’는 조선조 양반가의 풍습과 언어를 살려내면서 봉건사회 신분의 억압을 벗어나 자아실현의 의지를 보여주는 인물이 등장하여 전통적 자아와 근대적 자아가 함께하는 작가의식을 보여준다. ‘파편’, ‘김일등병’, ‘소년상인’, ‘모닥불’은 6·25 당시의 피난체험을 바탕으로 전쟁으로 인한 수난의 민족 현실과 일그러진 개인의 삶에 대한 인식을 보여준다.
한무숙에게 역사적인 사실들은 개인에게 시련을 주는 거대한 힘이다. 식민지와 전쟁, 혁명을 거치는 동안 개인의 삶은 일그러지고 파괴된다. 그러한 시련을 극복하는 방법은 사회의 변혁보다는 개인의 내면적 자기성찰, 인간성 회복 등으로 드러나고 있다.
한무숙은 여성, 사회, 신구갈등, 본성탐구, 구원모색 등의 다양한 주제를 다루며 치밀한 심리묘사와 정확한 언어구사로 한국인의 정체성과 역사의식을 고취시킨 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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