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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심이 머무는 곳, 윤극영 가옥
동심이 머무는 곳, 윤극영 가옥
  • 김이연 기자
  • 승인 2015.03.25 17: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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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인 생가 탐방 ⑪
▲ 윤극영 선생 방에는 생전 사용하던 유품들이 고스란히 전시되어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창작동요 <반달>을 작사·작곡한 윤극영 선생 가옥이 지난해 10월 리모델링 후 개관했다. 스스로를 ‘늙은 어린이’라 칭하며 어린이 문화 운동과 보급에 앞장 선 윤극영 선생의 발자취를 찾아서, ‘반달 할아버지’ 윤극영 가옥으로 가 보자. 

진행 김이연 기자|사진 양우영 기자|자료제공 서울시|참고 월간아동문학, 모국어의 속살(마음산책), 1920년대 어린이 문학의 씨앗을 뿌리며(조월례)

윤극영 가옥, 서울시 미래유산 보전사업 1호

<반달>, <설날>, <고기잡이>, <고드름>, <따오기>, <어린이날>, <무궁화>, <엄마야 누나야> 등 많은 이들이 지금까지 즐겨 부르는 동요를 작곡한 윤극영 선생은 어린이날을 제정한 색동회의 일원으로 어린이 문화 운동과 보급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서울에서 태어난 윤극영 선생은 해방과 한국전쟁을 거치며 간도, 일본, 온양, 부산, 군산으로 옮겨 다니며 생활했다. 서울로 돌아온 후 1958년 수유동 산6번지에 집을 마련하고 작곡에 전념할 수 있도록 작업실을 마련했다. 색동회 회원을 다시 모아 조직을 확대 개편하는 준비를 했고, 여러 편의 노래를 작사·작곡했다. 1968년 덕성여자대학교 근처로 집을 옮긴 뒤 글을 쓰거나 작곡을 할 때는 근처에 구한 작업실에 머물렀다.

1970년도 지어진 윤극영 가옥-마지막 생애를 보낸 곳

윤극영 가옥은 1970년도에 지어진 집으로, 고 윤극영 선생(1903~1988)이 1977년부터 세상을 떠난 1988년까지 10여 년을 살았던 곳이다. 이곳에서 장남과 함께 마지막 생애를 보냈다. 고인이 세상을 떠난 이후에는 시가 미래유산으로 영구보존하기 위해 선생의 장남으로부터 매입해 리모델링을 시행, 지난해 10월 일반에 공개했다. 서울시 미래유산 보전사업의 첫 번째 결실이다.
윤극영 가옥은 지상 1층, 30평 규모로 실내는 사용하던 모습 그대로 최대한 보존하고 세 관의 유작 전시실, 동요 교육 등 시민참여 프로그램이 열릴 다목적실, 수장고, 사무실 등으로 꾸며졌다. 실외는 선생이 생전에 작곡한 친근한 동요들을 듣고 함께 따라 부르는 쉼터로 마련되었다.
실내로 들어서면 우측 첫 번째 전시실이 선생의 방으로 사용되던 공간이다. 3평 남짓의 작은 방에는 선생이 글을 쓰고 작곡을 하던 좌탁과 지필묵, 스탠드, 트랜지스터 라디오 등이 평소 모습 그대로 전시되어 있어 소박했던 생활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우측 전시실에는 시계와 파이프, 도자기, 안경 등 선생이 생전 사용했던 물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국민훈장인 목련장과 모란장 훈장증도 볼 수 있다. 응접실로 사용되던 중앙 전시실에는 친필로 쓰여 진 노랫말과 악보 원고들이 놓여 있어 고민의 흔적을 가늠할 수 있으며, 한 편에 마련된 풍금이 세월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장남의 방이었던 다목적실은 동요 및 시낭송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지역 주민의 사랑방 역할을 하고 있다.

어린이 문화 운동에 한 평생 바친 윤극영

윤극영은 어린이 문화 운동에 큰 기여를 했다. 일제 강점기 말과 문화를 뺏긴 슬픔 속에서, 우리말 노래를 자라나는 아이들과 나누려는 마음에서 시작한 동요 짓기는 평생 이어졌다. 동요 1백여 곡을 작사·작곡하며 동요보급운동을 계속해 나갔고 동화와 수필, 시와 같은 문학작품을 4백여 편 남겼다.
1903년 9월 6일 서울 종로 소격동에서 출생한 윤극영은 1남 3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음악적 자질이 뛰어났던 윤극영은 음악 선생님으로부터 장차 음악가가 되라고 권유 받아 그때부터 음악의 꿈을 키워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가 법관이 되길 원해 경성 법학 전문학교에 입학했으나 적성에 맞지 않아 중퇴하고, 1921년 일본의 동양음악학교로 유학을 가 바이올린과 성악을 공부했다. 이 무렵 하숙집에서 방정환을 만나 두터운 친분을 쌓게 되면서 인생의 큰 전환점을 맞았다. 방정환으로부터 우리 민족 어린이들이 일본 노래만 불러 장래가 어둡고 불쌍하다는 말을 듣고 민족 어린이들을 위해 일할 것을 다짐하게 됐다.
1923년 5월 1일, 어린이들에게 순수한 우리말과 노래를 가르쳐 애국심과 순풍양속을 되찾자는 취지로 일본 동경에서 방정환, 진장섭, 조재호, 손진태, 정병기, 이헌구, 마해송과 함께 색동회를 조직한다. 색동회 활동을 통해 어린이 교육을 위한 강연이나 행사를 열며 잡지 <어린이> 발간을 주도했고, 특히 ‘어린이’라는 용어를 정식 사용하고 어린이날을 제정했다. 같은 해 9월 1일 일본 도쿄에서 관동대진재 당시, 한국인에 대한 학살이 확산되자 고국으로 귀국했다.
1924년, 일본에서 돌아온 윤극영은 부친의 도움으로 소격동 자택에 ‘일성당(一聲堂)'이라는 음악공부방을 만들어 음악 공부를 계속하면서 어린이들을 모아 음악을 가르쳤다. 이 때 우리나라 첫 어린이합창단인 ‘다알리아회'를 결성해 동요를 확산시켰으며, 우리 어린이들이 설날에 일본 음악을 듣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설날>을 창작했다. 또 우리나라 최초의 창작 동요인 <반달>을 작사·작곡했다. <반달>은 <어린이>지 창간호에 발표된 동요로 왜정시대의 우리나라 현실과 민족의 마음을 비유한 곡이다. 이 노래는 빠른 속도로 확산되어 만주, 일본에까지 전파되었다.
1925년에는 ’다알리아회‘에서 ‘파랑새를 찾아서’라는 아동 창가극을 공연해 크게 성공한 것을 계기로 여러 곳에서 초청을 받아 공연을 했고, 다음 해 간도로 넘어가 동흥중학교, 광명중학교, 광명여고에서 교사생활을 했다. 윤석중의 동시 <우산 셋이 나란히>에 곡을 붙였고, <고기잡이>를 작사·작곡했다.
1936년부터는 동경에서 생활했다. <반달>이 일본 방송국에서 애창되고 있음을 알고 처음으로 저작료를 받았으며, 레코드사의 도움으로 무랑루주에서 가수 겸 제작자로 활동해 크게 성공했다. ‘하얼빈예술단’을 조직해 활동했다.
광복 이후에는 서울로 돌아와 ‘노래동무회’에 가입해 <졸업가>를 작곡했으며, 일본의 탄압으로 없어졌던 ‘어린이날’이 다시 되살아나자 이를 기념해 동요 <어린이날>을 만들었다. 또한 ‘색동회’를 다시 조직해 방정환 동상 건립과 무궁화 보급운동에 진력하다, 1988년 11월 15일 85세의 일기로 별세했다.
윤극영은 제1회 소파상을 수상하고 ‘색동회’를 부활시켜 제4대 회장을 역임하였으며, 국민훈장 목련장과 모란장을 수상했다. 정치적 혼란기에 유랑 생활을 많이 하면서도, 조국을 잃은 어린이들을 위해 어린이 문화 운동을 끊임없이 전개하며 한평생을 바쳤다.

어린이 문학의 밑거름 ‘색동회’와 <어린이>

‘색동회’는 그 발기문에서 ‘동화 및 동요를 중심으로 하고 일반 아동 문제까지도 할 사’라고 그 취지를 밝히고 어린이를 위한 문학 활동을 주요 활동으로 잡았다. 색동회는 5월 1일에 일본에서 발대식을 가지면서 이날을 기념하기 위해 어린이날을 제정하고 그 첫 번째 기념식을 1923년 서울에서 가졌다.
이날 행사에는 12만의 선전지가 뿌려졌는데 그 내용을 보면 ‘젊은이나 늙은이는 내일의 희망이 없다. 우리는 오직 나머지 힘을 다하여 어린이에게 희망을 주고 생명을 길을 열어주자’고 하며 ‘내 아들놈, 내 딸년 하고 자기 물건같이 여기지 말고 자기보다 한결 더 새로운 시대의 새 인물인 것을 알자’고 했다. 어린 사람의 뜻을 존중하고 어린이를 어른보다 더 높게 대접하자는 것이다. 이런 존중 사상이 어린이 문학의 씨앗이 되었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어린이 문학 역사의 맨 앞자리에 있는 <어린이>가 없었더라면 어린이 문학은 몇십 년을 후퇴했을 것이다. 방정환이 편집을 맡고 색동회 회원들이 주요 필자로 참여한 <어린이>는 우리나라 어린이 문학의 씨앗이자 뿌리이다. 어린이 문학에 대한 개념도 없던 사회, 무엇보다 일제의 서슬이 시퍼런 때 어린이 잡지를 낸다는 것이 어떤 것이었을까.
<어린이>는 식민지 어린이들에게 우리말과 우리글로 된 노래와 이야기를 들려주며 우리 전통과 역사, 문화, 언어를 전달하여 우리의 민족혼을 일깨운다는 목적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주소만 보내주면 거저 보내 주겠다는 광고에도 잡지를 받아 보겠다는 이들은 18명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자 색동회는 <어린이> 잡지를 짊어지고 아이들을 직접 찾아가 나누어주고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러한 노력으로 아이들의 마음을 얻어 1925년에는 무려 10만의 독자를 거느리게 되었다. 이러한 성공의 이면에는 일제에 의해 수없이 압수, 삭제, 정간을 당하며 식민지 아이들에게 미래를 꿈꾸게 하려는 색동회 회원들의 뜨거운 열정이 있었다.

나라 잃은 슬픔 노래한 우리나라 최초의 창작동요 <반달>

1924년에 발표된 반달은 한국 최초의 본격 동요라 할 만하다. 더불어 이 동요는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노래 가운데 하나로 꼽힐 것이다. <아침이슬>을 모르는 한국인은 있겠지만,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엔’으로 시작하는 <반달>을 모르는 한국인은 없을 것이다.
윤극영이 1962년 <사상계>에 연재한 회고록에 따르면, <반달>은 시집간 맏누이의 부고를 듣고 초연한 마음이 되어 만든 노래다. 그 직전 아버지에게서 들은 이백(李白)의 시에서 착상을 했다고 한다. 1973년 <한국일보>에 연재한 회고록에서는 시상과 악상의 실마리로 '나라 잃은 슬픔'이 보태졌다. 그 이후로 <반달>은 나라를 잃은 망국인의 비애라는 측면에서 불려 졌다. 2절 마지막 구절 ‘샛별 등대란다, 길을 찾아라’에서 한 가닥 희망이 암시되기는 하지만, 이 곡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매우 서정적이다.
사실 이와 같은 곡은 윤극영의 작품에서 예외적인 것이다. 윤극영은 150여 편의 동시를 써 그 가운데 반가량에 스스로 곡을 붙였고, 남의 동시에 선율을 붙인 작품의 양도 그 이상 되지만, 그의 손에서 나온 동시와 동요들은 대개 한 점의 그늘 없이 밝고 맑다. 윤극영의 동시에서 그가 아이들의 세계를 들여다보는 시선은 매우 섬세하고 정겹다. 또 거기 붙여진 선율을 모른 채 그냥 읽어도 자연스러운 호흡과 리듬이 느껴질 만큼 음악에 밀착되어 있다. 그것들은 선율이 붙여지기도 전에 이미 노래였다. 윤극영의 주옥같은 노래들은 지금도 어른들의 잊혀 진 동심을 자극하고 어린이들의 가슴과 입에서 영원히 불리어 지고 있다.

<윤극영 가옥 관람정보>

주    소: 서울시 강북구 인수봉로 84길 5(수유동 566-26)
관람시간: 하절기 10:00~18:00, 동절기 10:00 ~ 17:00
휴 관 일: 일요일, 공휴일
관 람 료: 무료
문    의: 070-8992-9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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