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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이장 출신의 최연소 행정자치부장관 김두관
마을 이장 출신의 최연소 행정자치부장관 김두관
  • 매거진플러스
  • 승인 2003.04.18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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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관이 되었어도 서울서 전세집 한 칸 얻기도 힘드네요”

마을 이장에서 민선 군수로, 그리고 노무현 정부의 첫 행정자치부 수장으로 발탁된 김두관(44) 장관. 그는 입각하면서 무수한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최연소 관료, 파격적 행보로 개혁의 상징이 된 김두관 장관의 이야기가 흥미롭다.

모 시사주간지 판촉사원, 재야 단체 간사, 마을 이장, 군수 그리고 장관. 마치 여러 사람의 이력을 조합해 놓은 것같지만 실상 김두관이라는 한 사람의 이력을 정리해 놓은 것이다. 노무현 정부의 이색 인사로 손꼽히는 김두관 행정자치부(이하 행자부) 장관. 인구 3만의 시골 군수에서 장관으로 올라선 그를 보는 시선은 경이로움과 함께 그의 행보를 예의 주시하고 있다.
김두관 장관과의 만남은 처음이 아니었다. 그가 민선 군수를 하던 시절 남해군을 방문했다가 우연히 만난 그에게서 색다른 인간적 매력을 느꼈다. 김 장관은 속칭 좋은 학력을 지닌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뒷배경이 좋은 것도 아니었다. 그가 가진 자산은 행정가답지 않은 순박함과 원칙을 우선하는 정신, 그리고 산만한 덩치에 어울리지 않은 여린 속정을 갖고 있다는 것이었다.


“정치 안했으면 권투 해설가가 되었을 겁니다”

관사를 쓰지 않았던 그의 집은 무척이나 고색창연했다. 운동을 좋아하는 사람답게 마당에 샌드백을 걸어놓고 체력단련을 한다는 그는 한때 남해군에서 날리는 씨름선수였다. 홍수환 · 유제두의 세계 타이틀매치 상대인 외국선수들의 이름을 줄줄이 외울 정도로 권투에도 일가견이 있다. 사회운동을 하지 않았으면 그는 스포츠 해설가를 했을지도 모른다며 쑥스럽게 웃었다.
군수 시절 남해 금산을 올랐을 때 그는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기초단체장으로서의 포부, 모범적인 행정으로 남해를 올려 세우겠다는 청사진에 대한 열변을 토했다. 남해에 관한 관광정보를 다루는 취재를 위해 내려온 상황에서 김 군수의 말들은 실상 취재와 거리가 먼 것이었지만 그의 열정과 우직함은 오랫동안 순수한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그리고 5년이 지난 후 그는 행정자치부 장관이 되었다. 두툼한 손길과 함께 한 그의 웃음은 언제나 넉넉했다.
“중앙무대에서 기초단체장 시절에 구상했던 여러 가지 정책을 펴고 싶다는 소망이 있었지만 이렇게 빨리 이루어지리라고는 실상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부담도 되지만 순수하게 최선을 다할 겁니다.”
인생역정과 철학이 노 대통령과 흡사해 ‘작은 노무현’으로도 불리는 김 장관의 이력은 그야말로 드라마틱하다.
김 장관이 태어난 곳은 경남 남해군 고현면의 이어마을이다. 그는 대대로 농사를 지으면서 살아온 전형적인 농민의 아들이었다. 김 장관의 아버지는 그가 초등학교 4학년이 되던 무렵 세상을 떠났다. 가뜩이나 빈한한 가세가 급격하게 기울었고, 그의 유년기는 가난과의 힘겨운 고투로 채워져 있었다.
“중학교 때는 보충 수업비를 내지 못할 정도로 어려웠습니다. 어느 날 선생님이 보충 수업비 내지 못한 아이들은 앞으로 나오라고 하더군요. 저도 당연히 안 낸 것으로 알고 앞으로 나갔는데 선생님이 의아해 하면서 ‘니는 왜 나왔노’하시는 겁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할아버지께서 매번 공과금을 제때 못내는 손주가 안타까워서 직접 학교까지 찾아와서 돈을 내주고 가신 겁니다.”


군대시절 사회운동에 눈뜨면서 적극적인 참여파로 변신

남해종합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국민대학교 어문학계열에 합격했지만 가난한 집안 살림에 등록금을 낼 여유가 없어 학업을 포기하고 한동안 둘째형과 함께 농사일에 매진했다. 당장 농사를 짓지 않으면 집안이 쓰러질 정도로 어려웠다. 그는 “지금도 그리 넉넉하지 않지만 어려웠던 유년시절과 등록금 때문에 포기해야 했던 첫 입시의 기억들이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회고했다.
그렇게 2년간 농사를 짓다가 뒤늦게 경북전문대 행정학과에 입학했다. 그와 동생이 우여곡절 끝에나마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세 형들 덕택이었다. 고등학교를 나온 큰형은 서독의 광부로 갔고, 초등학교 밖에 나오지 못한 둘째형은 남해의 논밭을 지켰으며, 중학교를 나온 셋째형은 기술을 배워 이라크 노동자로 일했다. 형들이 보내준 돈으로 아래 두 형제는 대학물을 먹을 수 있었다.
그가 대학을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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