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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 현장스님 법정스님과의 인연 이야기
제자 현장스님 법정스님과의 인연 이야기
  • 송혜란
  • 승인 2015.05.22 11: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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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 오신 날

 

살아 생전 탐욕을 버리고 무소유의 삶을 살라는 가르침을 널리 전파시킨 법정스님이 지난 3월 16일에 입적 5주기를 맞았다. 늘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오로지 본인의 삶을 통해 본보기를 보여주었던 법정스님. 아직도 그를 그리워하는 이들이 많다. 법정스님의 육촌이자 제자로 알려진 현장스님을 통해 그를 추억해본다.

취재 송혜란 기자 사진 양우영 기자

법정스님과 인연이 깊은 현장스님을 만나기 위해 이른 아침 서울을 출발해 전라남도 보성의 대원사를 찾았다. KTX 광주역에서 차로 한 시간 남짓을 달리니 대원사 벚꽃길이 보인다. 가는 길은 온통 산뿐이라 맑은 공기와 봄의 초록으로 가득했다. 세상 시름은 모두 잊힐 것만 같은 풍경. 그 길이 끝날 무렵 대원사 입구에서 현장스님을 만날 수 있었다.

불일암에서 맺은 인연

현장스님이 손수 끓여낸 따뜻한 차의 향기와 함께 자연스럽게 법정스님에 대한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현장스님은 그가 대학생 시절 출가 상담을 받기 위해 당시 법정스님을 찾았다고 한다. 서울에 있는 봉은사에서 법정스님에게 출가의 뜻을 밝힌 그는 법정스님의 허락을 얻어 송광사로 내려가게 되었다.
“나도 곧 이곳 생활을 정리하고 송광사로 갈 터이니 너 또한 미리 송광사로 가 출가 준비를 하거라.”
1975년 송광사에 불일암(법정스님이 마지막 머무신 곳)이 생기기 전 자정암이 있었다. 법정스님은 송광사로 내려와 자정암 터를 닦아 불일암을 짓기 시작했다. 자정암 건물을 해체해 쓸 만한 자재를 골라 지은 집이 불일암 아래 부엌채다. 불일암을 지을 목재와 기와는 전부 인부들 손에 의해 운반됐다. 그때 행자였던 현장스님은 당시 인부들이 먹을 음식들을 송광사에서 불일암 공사 현장까지 직접 배달해 주었다.
“송광사에서 행자생활을 하면서 인부들이 먹을 밥과 반찬들을 매일같이 두 손에 들고 날랐어요. 그 일을 3~4개월 했지요.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불일암 공사 현장에서 직접 밥을 지어주어도 됐을 텐데 왜 굳이 멀리 떨어진 송광사에서부터 나한테 음식을 나르도록 그 일을 시켰을까 생각이 들었지요.  그때 법정스님이 했던 말씀이 딱 떠올랐어요. ‘행자 때 그렇게 일하면서 지은 복으로 평생 중노릇을 하는 것이다.’ 절에서는 평생 공부만 하고 살 수 있으니까 그때 한 고생으로 평생 복을 얻었다는 뜻이었지요. 그리고 가을, 불일암 낙성식이 열릴 때 저도 사미계를 받게 됐습니다.”

 

유머가 넘치던 법정스님

현장스님이 추억하는 법정스님은 유머감각이 굉장히 뛰어난 분이었다. 신자들이 스님 책을 가져와 좋은 말씀을 써달라고 하면 즉석에서 펜을 잡고 ‘좋은 말씀’ 딱 네 글자만 써줬다고. 책을 받아 본 신자들은 진짜로 좋은 말씀이라며 유쾌하게 웃곤 했다고 현장스님은 회상했다.
“제주도 농장에 갔을 때는 메뚜기 때문에 농작물 피해를 많이 입은 농장 주인이 차 대접을 하면서 한마디 했지요. ‘스님, 제주도 메뚜기 말도 못합니다.’ 그러면 스님이 이렇게 받아칩니다. ‘어이, 육지 메뚜기도 말 못해.’ 임종을 앞둔 병상에서마저도 유머감각을 잃지 않으셨어요. 회진을 온 의사선생님이 ‘스님, 불편하신 곳 없으세요?’하면 ‘내가 불편하니까 병원에 왔지’라고 이야기하고(...)”
 
민주투쟁자로서의 법정스님

법정스님이 봉원사에 있을 때 역경을 하고 글도 쓰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글 쓰는 스님’으로 널리 알려졌다. 사람들은 그저 법정스님을 그 정도로만 알고 있다. 그러나 현장스님은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은 민주투쟁자로서의 법정스님도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1975년 유신헌법으로 장기집권을 했을 때 언론에서 재갈을 많이 물렸지요. 당시 법정스님도 불교대표로 나가 민주투쟁을 많이 했습니다. 사람들은 법정스님만 알지 민주투쟁자로서의 법정스님을 잘 몰라요. 그때 고초를 많이 겪으셨지요. 수많은 사람들이 억울하게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 아무리 스님이라도 분노가 올라오고 증오심이 생기더랍니다. 그래서 모든 걸 내려놓고 다시 산으로 들어갔어요.”

이웃 종교와 소통하는 법정스님

법정스님의 다양한 사회활동 중에는 종교교류가 있다. 서양사회에서 종교교류에 앞장선 티벳 불교의 법왕 달라이라마는 자기종교에 신념을 가지되 이웃종교에도 존중의 마음을 보일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달라이라마는 종교교류를 심화시키는 다섯 가지 방법을 이야기했다. 첫째, 종교학자들 간의 학술교류를 통한 만남. 둘째, 각 종교 수도자들과 영성체험을 나누는 만남. 셋째, 각 종교 지도자들의 교류와 만남. 넷째, 이웃종교의 성지를 순례하는 기회를 갖는 것. 다섯째, 사회적인 문제에 종교가 서로 힘과 지혜를 모아 협력하는 것.
법정스님은 달라이라마의 다섯 가지 제안을 완벽하게 실천해 종교교류의 큰 모범을 보여준 분으로 손꼽힌다. 생전 강원룡 목사와 김수환 추기경과 개인적으로 정을 나누는 친구로 지내기도 했다.
“불일암 시자 시절 기억을 되살려 보면 법정스님은 불자들보다 천주교나 기독교인들이 찾아오면 훨씬 배려하는 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스님 글을 읽은 많은 독자들이 불일암을 찾아오지만 그 중에는 특히 천주교인들이 많았어요. 법정스님은 그들을 천주보살이라 불렀고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은 천불교 신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다 스님도 본의 아니게 천불교 교주가 된 것이지요.”

원시적인 삶을 이어온 법정스님

법정스님은 불교의 수행자라는 관점을 떠나 자연주의자로서 생태철학적인 삶을 살다 갔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은 곳에서 지내며 뭐든 문제를 손수 다 해결했다고. 심지어 화장실이 없는 곳에 살면서 볼일을 보고 삽으로 덮어두는 게 일상이었다. 굉장히 원시인적인 삶을 이어온 법정스님은 그 속에서 깨우친 것들을 글로 표현해 사람들과 나누었는데 그게 바로 무소유였다.
“무소유라는 것이 아무것도 갖지 않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으로부터 우리가 얼마나 자유로워질 수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법정스님은 늘 ‘버려야 할 것은 탐욕과 무지이며 소유해야 하는 것은 무아와 무소유다’고 말씀하셨어요. 부탄이라는 나라에서는 자발적인 가난을 추구합니다. 나라가 애써 잘살려고 하지 않아요. 고립은 그 나라만의 외교정책이고요. 법정스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스님은 얼마든지 누리며 살 수 있었지만 가난한 삶을 오히려 기쁘게 받아들이셨지요. 번거롭게 사람을 만나 사귀려 하지도 않으셨어요. 낯설고 외진 곳에서 마치 원시인처럼 사셨지요.”

옳거니 그르거니 내 몰라라
산이건 물이건 그대로 두라
하필이면 서쪽에만 극락세계랴
흰구름 걷히면 청산인 것을.

“법정스님이 제게 써주신 글을 다시 되새겨 봅니다.”

‘버리고 떠난’ 법정스님

‘나, 없음’을 체험한 수행자는 청정과 청빈의 맑은 삶을 꽃피우고 ‘내것, 없음’을 깨달은 불제자는 나무와 관용의 향기로운 삶의 향기를 전하게 된다. 보다 단순하고 간단하게 사는 것이 소원이었던 법정스님은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아 머무는 곳이 번거로워지면 버리고 떠나기를 통해 무소유의 삶을 실천해왔다.
법정스님이 떠나던 마지막 순간에도 마찬가지였다. 아름다운 마무리를 통해 사후 장례절차까지 간단하게 해줄 것을 당부했다고. 특히 장례의식을 통해 총무원 사람들이 추모사하는 일은 절대 없도록 거듭 강조했다.
“남에게 폐 끼치는 일을 극히 싫어하셨던 법정스님은 폐암이라는 진단을 받고도 본의 아니게 여러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게 된 것을 무척이나 거북해 하셨습니다. 스스로 모든 것을 해결하고 남에게 의지하지 않았던 법정스님이 돌아가실 때 수발드는 보살한테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지금 내 소원이 뭔지 아느냐? 빨리 화장각 속에 들어가는 것이다.’ 병에 걸려 수발을 받고 의사만 만나니까 그것이 굉장히 불편했던 것이죠. 더 이상 폐가 되지 않게 화장각에 빨리 들어가고 싶다고 말씀한 것이지요.”
현장스님은 요즘 우리는 남에게 폐 끼치는 일을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며, 아무렇지도 않게 남의 것을 강탈하려는 시대를 살고 있다고 꾸짖는다. 또한 현장스님은 법정스님이 떠나는 마지막 모습이 시사하는 바가 많다고 강조한다.법정스님은 자신의 삶을 본보기로 많은 가르침을 준 것이다.

마음의 그릇부터 키워라

“김수환 추기경에 이어 법정스님까지 떠나고 이 시대 가장 큰 어른들이 모두 사라졌다.”
현장스님은 이제 스스로가 어른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어른이라 함은 나이가 먹어 어른인 것이 아니라, 얼이 큰 사람을 일컫는다고 덧붙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수용할 수 있는 그릇부터 만들어야 한다고.
“마음의 그릇이 커져야 무엇이든 수용하고 포용할 수 있습니다. 돈을 벌려고 하지 말고 그릇부터 키우세요. 그릇이 크면 재물은 저절로 따라옵니다. 그릇은 작은데 욕심만 차리니까 문제입니다. 돈을 아무리 많이 벌어도 자기 것이 아니면 다 나가기 마련이에요. 돈이 나갈 때는 사람을 치고 나간다고 하지요. 학문을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를 담을 그릇부터 키워야 합니다. 수행하기 위해 법을 담을 그릇을 먼저 만드는 것처럼 기초수행이 가장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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