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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저편으로 진, 여성 독립 운동가
역사의 저편으로 진, 여성 독립 운동가
  • 김이연 기자
  • 승인 2015.08.28 11: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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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즌 스토리

올해로 광복 70주년을 맞았다. 우리가 기억하는 독립 운동가의 이름과 업적 속에 여성 독립 운동가를 꼽으라고 한다면, 유관순 열사 외 누가 있을까? 여성의 지위가 낮은 시대였기 때문에 여성 독립 운동가의 기록과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기 어려웠으나, 그들의 업적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진행 김이연 기자|사진 양우영|참고자료 국가보훈처

소신을 굽히는 법이 없던 유관순 열사

이화학당 1학년, 유관순 열사는 기차바퀴 소리가 ‘대한독립, 대한독립’이라고 들린다던 독립 의지가 남다른 소녀였다. 1919년 3·1운동 때 서울의 3·1 만세시위와 3·5 학생만세시위에 참가했다. 고향인 목천으로 돌아와 4월 1일 아우내(병천) 장터에서 대한독립만세시위를 지휘했다. 유관순은 시위운동 중 ‘제 나라를 되찾으려고 정당한 일을 했는데 군기를 사용하여 내 민족을 죽이느냐’고 헌병에게 격렬하게 항의했다. 현장에서 체포된 그녀는 서대문형무소에 이감되었다. 매일 독립만세를 부르니 모진 악형을 당했다.
이듬해 1920년 3월 1일에는 3·1운동 1주년 기념식을 갖고 옥중만세운동을 전개했다. 3천 여 명의 수감자들이 만세시위를 했다. 이 사건으로 많은 독립 열사들이 심한 고문을 당했고, 유관순은 매를 맞아 방광이 파열됐다. 결국 그해 9월 28일 영양실조와 모진 고문으로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했다.

3대에 걸쳐 항일인재 양성한 윤희순 의사

1895년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단발령을 발표하자, 윤희순 의사는 나라를 구하는데 남녀의 구별이 없으며 여자들도 의병에 참여하고 의병대를 도와야 한다고 주장하며 '안사람 의병가'등 의병가를 지어 여성들의 의병활동을 독려했다. 일제가 고종황제를 폐위시키고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할 때는 화약을 직접 제작·공급하는 탄약제조소를 운영했다. 특히 관군과 일본군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밀고자를 꾸짖고 청년과 여성들에게 의병운동에 나설 것을 주장하며 8편의 의병가와 4편의 경고문을 남겼는데, 이는 최초의 한글의병가이자 민족저항시가로, 많은 사람들의 항일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데 기여했다.
이후 중국으로 망명해 ‘노학당’과 ‘조선독립단 학교’를 설립하고 항일운동가를 양성하며 직접 군사훈련에 참가하기도 했다. 일제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3대에 걸쳐 의병활동을 뒷바라지하고 독립운동에 참여했으나, 선대의 투철한 항일애국정신을 기록한 ‘서정록’을 남기고 1935년 8월 1일 순국했다.

한국 최초 여류 비행사, 권기옥 선생

1919년, 숭의여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던 권기옥 선생은 학교 내 독립 비밀결사대 ‘송죽회’에 가입하면서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시작했다. 태극기를 제작해 3·1운동에 참여했다.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 연락원들과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해 독립운동을 이어나가며 ‘평양청년회 여자전도대’를 조직했다. 그러나 독립운동에 대한 열정이 강해질수록 일본 경찰의 감시는 심해졌다. 결국 상해로 몸을 피한 권기옥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추천으로 ‘중국 운남육군항공학교’에 제 1기생으로 입학해 ‘한국 최초의 여류 비행사’가 된다.
이듬해부터는 ‘중국 혁명공군’에서 복무를 시작했다. 상해전쟁 때 기층소사(機銃掃射)로 일본군을 진압해 무공훈장을 받은 후, 중령을 거쳐 대위의 자리까지 올랐다. 임시정부 산하의 여성조직인 ‘대한애국부인회’를 재건해 여성들의 독립사상을 고취하며 독립운동 전열에 참가시키는 등 끊임없이 독립을 위해 애썼다. 서울 장충동에서 여생을 보내고 1988년 4월 19일 사망 후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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