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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집 낸 서른의 당신에게 전하는 이야기 강금실 ‘내 삶의 굽이에서’
에세이집 낸 서른의 당신에게 전하는 이야기 강금실 ‘내 삶의 굽이에서’
  • 매거진플러스
  • 승인 2007.03.10 2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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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하나 - 선택
내가 법원 첫 근무지로 시국사건 많고 시끄럽기로 유명했던 서울 문래동 남부지원에 발령받은 것은 ‘운명의 장난’이었다고나 할까.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 첫 멜로디 ‘빠바바밤~’이 울려 퍼지듯이. 왜냐하면 여기에서 나는 판사생활의 첫 번째 선택에 맞닥뜨렸기 때문이다. 사소한 학생들 시위사건도 꼭 잡아넣어야 한다고 야단하는 그런 시절이었다. 판사들마저 좌천을 당한다든가 사돈의 팔촌까지 세무조사를 당할 정도로 여러 가지 물리적 억압에 노출되어 있던 시기라서 힘들 때였다.
그런데 하필이면 내가 즉결 재판을 하는 날 시위 중에 돌멩이를 던진 대학생들이 잡혀왔고, 그들의 변명을 들어보고서 법의 기준에 따라 그 자리에서 바로 결정을 해야 했는데, 난들 무슨 용기와 소신과 정의감에 불타는 배짱이 있었겠는가. 풀어줄 만한 사안이라 풀어주고서는 겁에 질렸다. 내 주변, 가족들, 무고한 사람들에게 피해가 가면 어쩌나. 법대 위에 앉아 재판하는데 생각 좀 해보자고 할 수도 없이 바로 결정을 해놓고선 ‘아이구, 어쩌나’고민에 빠진 것이다.
이 사건으로 법원이 발칵 뒤집혀서(내가 다시 당직을 못 맡도록) 날마다 돌아가며 맡던 당직 순번도 바뀌고, 여러 가지로 같이 일하는 판사들에게 번거로움을 끼쳐드려 마음이 불편했다. 하지만 여자라는 이유로(그 당시에는 법원 전체에서 여성 판사가 채 열 명이 안 되었다) 다소 특혜를 받아서 지방으로 쫓겨나지는 않고, 서울가정법원으로 옮기게 되었으니, 처음 걱정한 것보다는 그다지 나쁜 선택은 아니었다. 사건의 이면에는 항상 그물망같이 깔려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있어서 사건을 잘 추스르고 다듬어서 모양새 좋게 흘러가도록 하는 법이다. 그래서 주위사람들의 음덕으로 사람이 산다고 할 수 있는데, 당시 지원장님이나 선배 판사들이 상당히 두터이 보호하고 감싸주시는 등 도움을 많이 받았다.
다만 불똥이 엉뚱한 데로 튄다고, 당시 남편이었던 김태경 씨가 나로 인해 불이익을 받는 일이 생겼다. 김태경 씨야 시국사건으로 이미 두 번의 실형 전과를 갖고 있는 전과자였으니 그로 인해 내가 불이익을 받으면 받았지, 내가 불이익을 줄 일이 있겠는가. 그런데 김태경 씨가 주위사람들의 추천과 배려로 모 언론사에 취업하기로 하고 어느 날 아침 새로 산 양복까지 차려입고 면접을 보기까지 하였으나, 부인이 재판에서 말썽 냈다는 것이 신원조회에 걸려 결국 언론사에 취업을 하지 못했다.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만일 그때 그가 언론사에 취업을 했더라면 출판사를 차리지 않았을 테고, 그랬더라면 ‘자본론’으로 구속되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테고, 부채로 인하여 이혼하는 결과도 오지 않았을 수 있지 않을까?


이야기 둘 - 보라색 수난사
보통 십대 시절에 사춘기를 겪으면서 ‘나는 누구일까, 왜 태어났나, 어머니, 왜 날 낳으셨어요’하면서 부모로부터의 독립 심리가 강해지고 ‘천상천하 유아독존’과 같이 인생 고민에 빠지기 시작하면서 스스로 강해진다. 그런데 나이가 들수록 자신의 생김새는 물론 말버릇, 성격, 심지어는 아주 사소한 습관들, 취향들조차 모조리 부모를 닮은 것을 확인하면서 ‘나’를 이루는 것이 대부분 유전자들이니, 그 무한함에 경이로워진다.
가령 나의 색채 취향은 어머니를 닮았다. 어머니는 분홍, 보라, 옥색과 같은 연하고 화사한 색깔을 좋아하셨는데, 내가 그러하다. 또 어머니는 부지런히 단장하시는 분이셨다. 일흔여덟에 세상을 떠나시기 전까지, 아침마다 곱게 화장하고 좋아하는 색깔의 블라우스와 치마를 차려입곤 하셨다. 그런데 사실 나는 사회와 타인에 대해 예의상 마지못해 화장하는 스타일이지, 단장하는 데 부지런하지는 못하다. 내 바로 위의 언니는 화장이 즐겁다고 하니, 깔끔 떨고 매일 가꾸는 것은 어머니를 닮은 것이리라.
보라색을 왜 좋아하느냐고 하면, 제 눈에 안경이라고, 취향이니까 좋아하는 것이고, 유전인 데야 난들 이유를 알겠는가. 기억을 더듬어보면 꽤 오래전부터 유별나게 보라색을 좋아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을 뿐.
대학교 1학년 때, 그것도 초봄에 하얀 스웨터에 보라색 긴 치마, 보라색 스타킹에 하얀 샌들을 신고 다녔는데, 그 직후 학교는 큰 시위 사건으로 휴교까지 하게 되었으니, 나의 보라 패션은 꽤나 썰렁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꼭 보라색만 고집했던 것도 아니고, 빨간 치마에 빨간 스타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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