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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문화운동의 요람 ‘서울 YMCA’
청년 문화운동의 요람 ‘서울 YMCA’
  • 권지혜
  • 승인 2015.10.27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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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시간을 품다 31
 

1905년 을사조약 체결 후 많은 애국지사들이 국내외에서 구국운동을 전개하면서 이상재, 홍재기, 김정식, 윤치호, 김규식 등 독립협회 지도자들과 개화파 지도자들이 중심이 되어 자주와 개화에 대한 열정을 YMCA운동을 통해 이루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선교사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를 통하여 YMCA국제위원회에 한국 YMCA창립을 요청하였고, 마침내 1903년 황성기독교청년회(오늘의 서울YMCA)가 창설된 이래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민간단체로써 민족사와 함께 하게 되었다. 1908년 황실의 협조와 미국인의 거액 기부로 종로 한복판에 600평 3층의 웅장한 벽돌조 회관이 건립됐다. 이후 YMCA는 식민시대 억눌린 민족의 여론을 전달하는 공간이 되었다.

일제 총독부는 황성기독교청년회의 왕성한 활동을 탄압하기 위해 YMCA 지도부들이 연루되었던 105인 사건과 유신회 사건을 빌미로 고종황제가 다스리는 자주독립국 대한제국의 수도 ‘황성’의 의미를 담고 있는 ‘황성기독교청년회’라는 명칭을 강압적으로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로 개명시켰고, 교육사업의 일부를 폐지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서울YMCA의 개화구국운동은 이러한 시련에도 굴하지 않고 더욱 활발하게 전개되어 복음전도회, 강연회 등을 통한 민족의 실력 배양과 민중계몽에 주력하였고, 물산장려운동 등을 통해 민족경제를 살리기 위한 경제개혁 운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우리나라 최초로 실내체육관을 완공하면서 시작된 체육활동은 유도대회 등 각종 시합을 전국적으로 개최하면서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계기들을 마련하였고, 농촌의 궁핍화 현상이 날로 심화됨에 따라 ‘농민의 경제적 향상, 사회적 단결, 정신적 소생’을 3대강령으로 신영농법 보급과 각종 교육활동을 통해 대규모의 농촌운동을 전개하였다.

8·15 해방 후 서울 YMCA 회관은 6·25전쟁으로 전소되고 만다. 1967년 회관을 재건립하고 사업을 재건하기 위하여 YMCA 이념과 파리기준의 연구, 헌장의 개정 등 기초 작업에 착수하였고, 각종 회원사업, 간사 양성, 체육사업, 교육 사업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일제강점기와 해방 그리고 한국전쟁 후에도 대규모의 상업 건축물이 꾸준히 들어서면서 명실상부한 상업가로를 형성해온 종로 거리. 특히 현재의 YMCA 회관은 경제 개발에 따른 건축 수요가 급증하던 1960년대, 종로의 풍경을 변화시키는 시작점이 됐다. 오늘날도 서울 YMCA는 YMCA 운동의 목적과 정신에 동의하고 헌신적으로 참여하는 회원들에 의해 주도되는 기독교 평신도 운동체로서 건강한 지역사회 형성에 주축이 되고 있다.

 

글․사진 백남우(tbs TV 영상콘텐츠부장)

 

tbs TV에서는 서울 일대에 남았거나 변형된 근현대문화유산의 다큐멘터리 프로그램 제작을 통해 서울의 역사․문화적 의미와 가치를 고화질 HD영상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프로그램은 tbs 홈페이지 tbs.seoul.kr나 네이버 TV캐스트(http://tvcast.naver.com/seoultime)에서 다시 볼 수 獵�. 수상 약력 : 2013 미디어어워드 유료방송콘텐츠 다큐멘터리 부문 우수상 수상, 2014 케이블TV협회 방송대상 PP작품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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