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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간디, 함석헌 기념관을 가다
한국의 간디, 함석헌 기념관을 가다
  • 김이연 기자
  • 승인 2015.11.25 15: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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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간디’라 불리는 함석헌 선생은 비폭력주의자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인권 운동가이자 교육자, 사상가, 문필가였으며 조국의 독립과 독재정권에 맞서며 평생을 바친 인물이다. 함석헌 선생이 마지막 생애를 보낸 쌍문동 가옥이 선생의 타계 26년 만에 지난 9월 개관했다. 오랫동안 쓰고 매만져 길이 든 유품들에 민중의 자각을 일깨우던 씨알의 기개가 서린 듯했다.

진행 김이연 기자|사진 양우영 기자

함석헌 선생이 생애 마지막 7년을 보낸 곳
도봉구 쌍문동 함석헌 기념관

함석헌(1901~1989)은 ‘한국의 간디’라 불리며 1979년, 1985년 두 차례 노벨평화상 후보에 오른 바 있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인권운동가이다. <씨알의 소리>를 창간하고 시인, 교육자, 사상가, 언론인, 역사가로서의 삶을 살았다.
도봉구 쌍문동에 위치한 함석헌 기념관은 가족과 함께 마지막 여생을 보냈던 자택으로 1982년부터 1989년 2월까지 7년여 간 머물렀던 곳이다. 선생이 살았던 당시의 가옥 모습을 최대한 보존, 리모델링하여 작은 기념관으로 만들었다. 함석헌은 이 가옥에 거주할 당시 서울올림픽 평화대회 위원장으로서 서울평화선언을 제창했으며, 1980년 계엄당국에 의해 폐간되었던 <씨알의 소리>를 복간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이 가옥은 지상 1층과 지하 1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선생이 생활하셨던 지상 1층은 유품 전시와 삶과 업적에 대한 발자취, 동영상 상영 등의 전시실로 꾸며져 있으며, 창고로 사용했던 지하 1층과 앞마당, 식물을 가꾸었던 유리 온실은 주민들의 커뮤니티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세미나실, 도서열람실, 게스트 룸 등으로 조성되어 있다.
대표적인 유품으로는 이 집에서 사용하시던 서안과 평생 방에 걸어 두셨던 간디의 사진, 연천군 전곡면 함석헌 묘소에 있던 묘비, 수첩과 메모지, 직접 만드신 화분, 사용하시던 모자와 장갑 등의 생활용품 등이 있다. <끝나지 않은 강연>, <자전적 인생론>, <뜻으로 본 한국연사> 등의 대표 저서도 만날 수 있다. 선생이 생전에 가꾸셨던 나무와 온실의 화초들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함석헌 기념관은 작지만 선생의 삶과 업적을 조명할 수 있는 의미 있고 알찬 공간으로 만들어졌으며, 복합 문화공간으로 재탄생해 그를 기리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위안의 공간이 되고 있다. 서울시 미래유산으로 지정되어 보존 작업 후 지난 9월에 개관했다.

조국 독립과 독재정권에 맞서
민주화 운동에 평생을 바친 평화주의자

함석헌은 1901년 3월 13일, 평안북도 용천에서 출생했다. 1919년 3.1운동에 참여했다가 학업을 중단하게 되었으며, 그 후 오산학교에 입학해 인생의 스승인 유영모를 만났다.
1924년 일본으로 건너가 1928년까지 도쿄 고등 사범학교에서 수학했는데, 이 기간 동안 우치무라 간조의 성서 연구에 깊이 영향을 받았다. 1927년에는 동인지 <성서 조선> 창간에 참여하여 글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귀국 후에는 오산 학교와 송산 학원 등에서 교사로 활동하면서 <성서 조선> 등을 통해 왕성한 집필 활동을 벌였다. 1940년에는 계우회 사건, 1942년 <성서 조선> 필화 사건 등으로 2년 동안 투옥되기도 했다.
광복 후에는 신의주 반공 학생 시위의 배후로 지목되어 북한 당국에 의해 투옥되었다가 6·25 전쟁 기간 월남했다. 이후 종교 강연 활동을 하다 1956년부터 <사상계>를 통해 논객으로 활약하였으며, 반독재 야당 운동에 참여했다. 5·16으로 군사 정권이 들어서자 3선 개헌 반대 운동, 유신 반대 운동 등에 적극 가담했으며, 이 때문에 수차례 투옥되었다. 제5공화국 시기에도 민주화 운동을 계속했다.
또한 1962년 미국을 방문하였을 때 퀘이커교와 친밀한 관계를 맺고 귀국하여 한국 퀘이커교 대표로 활동하기도 했다. 1970년 4월에는 시사평론 잡지 <씨알의 소리>를 창간하여 민중운동을 전개하면서 반독재 민주화 운동에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2호를 내고 등록이 취소되었다. 이듬해 9월에 복간되었으나 1980년 군사정부의 탄압으로 다시 강제 폐간되었다가 1988년 12월에 복간되었다. 그 후에도 지속적으로 민주화 운동을 펼쳐 갔다.
함석헌은 성서뿐만 아니라 동서양의 각 고전을 섭렵하여 자신의 사상으로 소화하여, 씨알 사상이라는 비폭력·민주·평화 이념을 제창했다. 비폭력주의 신조로 말미암아 ‘한국의 간디’ 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평생 일관된 사상과 신념을 바탕으로 항일·반독재에 앞장섰다. 이러한 점을 인정받아 1979년 노벨 평화상 후보로 추천되었고, 1985년 두 번째 노벨 평화상 후보로 추천되었다.
1987년에는 제1회 인촌상(동아일보사)을 수여받았고 1988년에는 서울올림픽 평화대회 위원장으로서 ‘서울평화선언’을 제창했다. 말년까지도 활발한 활동을 하였으나 결국 건강이 악화되어 1989년 2월 4일 서울대학병원에서 별세했다. 그 후 ‘이달의 문화인물’(문화관광부)과 독립 유공자로 선정되었으며 묘소는 대전 현충원에 위치하고 있다. (애국지사 제3묘역 329호)

함석헌 대표작, 시(詩)

그 사람을 가졌는가

만리길 나서는 길
처자를 내맡기며
맘 놓고 갈 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맘이야' 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 꺼지는 시간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 할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저 하나 있으니" 하며
빙긋이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의 찬성보다도
"아니" 하고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 함석현 기념관 관람안내

주소 서울시 도봉구 도봉로 123길 33-6(쌍문동)
개관시간 화~일, 09:00~18:00
휴관일 매주 월요일, 1월1일, 설날 연휴, 추석 연휴
관람료 무료
문의전화 02-905-7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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