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6 02:50 (금)
 실시간뉴스
한국 천주교의 상징 ‘절두산 순교성지’
한국 천주교의 상징 ‘절두산 순교성지’
  • 권지혜
  • 승인 2015.12.28 13:4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서울, 시간을 품다 33
 

강변북로와 지하철 2호선이 만나는 합정동에서 강변 쪽에 자리 잡은 절두산. 
머리를 높이 든 형상이라 하여, 누에머리를 닮아 잠두봉으로 불렸던 이곳은 옛 한강 나루터인 양화진의 이름난 경승지였다. 많은 풍류객과 문인들이 뱃놀이를 즐기면서 시를 지었던 곳이기도 하다. 인근 양화진 나루터는 각 지방에서 올라온 조세곡, 어물, 채소 등을 실어 나르는 배가 드나들기도 했다. 원래 한강 연안에는 주로 깎아지른 절벽 또는 모래펄이 이어지는 습지가 있었기 때문에 그 어느 곳도 배를 대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양화진은 나루의 양쪽 끝에 자연적으로 부두가 형성되어 있었는데, 남쪽에는 선유봉, 북쪽에는 잠두봉을 중심으로 비스듬하게 모래톱이 형성되어 배를 대기가 수월했다고 한다. 
1866년 정초부터 흥선대원군이 천주교 금압령(禁壓令)을 내리고 이후 1866년 2월 프랑스 군함이 천주교 탄압을 문제 삼아 한강을 거슬러 양화진과 서강까지 진입하자, 이에 격분한 대원군은 수많은 천주교인을 잠두봉에서 목을 베어 참수한다. 이후 이곳에서 머리를 잘랐다 하여 절두산(切頭山)이라는 지명을 얻게 되어 수천 명 천주교 신자들의 순교지로 변하게 되었다.

1956년 한국천주교순교자현양회에서 절두산 매입 
1962년 가톨릭 순교성지 기념탑 건립 
1966년 병인순교 100주년 성당 및 기념관 착공 
1967년 성당 및 기념관 축복식 및 개관


순교지라는 상징성 때문에 절두산에 들어설 성당 설계에는 대지 원형을 훼손하지 않는다는 원칙이 적용됐다. 그리고 설계 공모 당시 성당 건축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던 건축가 이희태의 설계안이 채택되어 세워지게 되었다. 이희태 교수가 설계한 기념관의 전체적인 구도는 한정되고 협소한 지역이지만 성당과 기념관을 유기적으로 배치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성당은 절두산 봉우리에, 기념관은 성당 동북쪽의 경사지에 배치하되 성당과 기념관 모두가 기념의 의미를 가지므로 일체가 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설계는 전체적으로 순교 정신의 상징과 한국적인 토착성, 그리고 전통적인 고유미를 표현하는 데 집중되었다. 박 덩이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초가집 지붕같이 미끄러진 추녀, 갓 모양의 지붕과 순교를 상징하는 6m 높이의 종탑을 올린 성당. 당과 기념관을 잇는 외부 발코니로 동선을 확장하고 전통적인 지붕과 1층의 필로티(벽체 없는 1층 기둥), 쌍으로 된 열주를 외부로 노출한 기념박물관. 
이러한 설계들은 포근한 정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였다. 특히 순교지에 세워진 만큼 성당은 일체의 부대 시설과 장식을 배제한 채 성당 본연의 기능을 위한 공간으로만 구성됐다. 
그 후 사적 제399호 서울 양화나루와 잠두봉 유적으로 지정되었다. 
스스로 교리를 깨치고, 수많은 목숨을 잃으면서까지 신앙을 지켜 낸 것으로 그 유례를 찾기 어렵다는 한국 천주교. 순교지 절두산에 세워진 성당과 박물관은 그 역사를 생생히 증명하는 유산일 것이다.

글·사진 백남우(tbs TV 영상콘텐츠 부장) 
tbs TV에서는 서울 일대에 남았거나 변형된 근현대 문화유산의 다큐멘터리 프로그램 제작을 통해 서울의 역사?문화적 의미와 가치를 고화질 HD 영상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프로그램은 tbs 홈페이지 tbs.seoul.kr나 네이버 TV캐스트(http://tvcast.naver.com/seoultime)에서 다시 볼 수 있다. 수상 약력 : 2013 미디어어워드 유료방송콘텐츠 다큐멘터리 부문 우수상 수상, 2014 케이블TV협회 방송대상 PP작품상 수상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