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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 문화재 수호자, 간송 전형필 가옥을 가다
민족 문화재 수호자, 간송 전형필 가옥을 가다
  • 김이연 기자
  • 승인 2015.12.29 11: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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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한파가 물러나고 형형색색의 낙엽이 뒹굴던 날 오후, 도봉산 자락의 간송 전형필 선생 가옥을 방문했다. 전형필 가옥은 일제강점기 때 수많은 우리 문화재를 수호해 민족혼을 지켜 낸 ‘문화적 독립 운동가’ 간송 선생이 거주하던 공간으로, 지난 9월 새 단장을 마치고 개관했다.

진행 김이연 기자|사진 양우영 기자

간송 선생의 자취가 남은 유일한 건물
등록문화재 512호, 전형필 가옥

간송 전형필(1906~1962)은 일제강점기 때 수탈되어 가던 우리 문화유산을 보호, 수집하고 해외에 유출된 문화재를 되찾아 오는 등 문화재 수호에 큰 공을 세운 인물이다. “간송의 수집품을 거론하지 않고는 제대로 된 한국 미술사를 논할 수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수많은 국보급 문화재들을 지켜 냈는데, 그 유산으로는 훈민정음해례본, 고려청자, 추사 김정희의 글씨, 겸재 정선과 단원 김홍도의 그림 등이 있다.
그의 자취가 남아 있는 묘소와 100여 년이 된 ‘전형필 가옥’은 서울시 도봉구 방학동에 위치해 있다. 전형필 가옥은 성북동 북단장(간송 선생이 설립한 최초의 사립미술관 보화각을 일컬음) 한옥 건물이 소실되고 종로4가의 생가 건물이 재개발로 모두 사라진 현재, 간송 선생이 거주했던 자취가 남아 있는, 전국에서 유일한 건물이기도 하다. 역사적 보존 가치가 높을 뿐만 아니라 100여 년 된 전통 한옥으로서 건축적 가치도 높아 등록문화재 제521호로 등재되었다.

1900년대 부친이 지은 100여 년 된 가옥 
간송 선생과 부친의 묘소도 자리

1900년대에 준공된 전형필 가옥은 그의 아버지 전명기 공(1870~1919) 때 지어진 가옥이다. 당시 지주였던 전명기 공은 인근에 있던 대규모 농장 및 경기 북부와 황해도 등지에서 오는 소출을 관리하기 위해 이 집을 지었다. 간송 선생은 1919년 아버지가 별세한 이후 한옥 뒤편에 묘소를 만들고, 제사가 있거나 양주군의 농장을 방문할 때 이곳에 자주 들러 생활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제사에 필요한 제구를 보관하거나 제실로 사용되었으며, 1962년 간송 선생이 종로 자택에서 별세한 후에는 부친 곁에 묘소가 마련되었다.
가옥은 2011년 가을, 심하게 훼손되고 파란 천막이 덮인 상태로 발견되었다. 한국전쟁 도중 소실된 대문과 일부 담장이 개보수로 원형이 많이 바뀌었고 건물 역시 피해를 입은 상태였다. 따라서 퇴락한 본채와 부속 건물, 주변 담장을 보수함에 있어 변형된 부분의 원형을 되찾는 데 주안점을 두고, 주변을 공원으로 정비하는 복원 작업이 이루어졌다.
전형필 가옥은 목조 기와지붕 구조로, 본채 1동, 협문, 담장, 화장실 및 부속 시설로 구성되었다. 건축양식은 정면과 측면 칸이 ㄱ자형을 이루며 단층 홑처마팔작지붕 7량가이다. 본채는 평평한 대지에 남향으로 자리하고 있으며, 기와 담장이 가옥을 둘러싼 형태로 정면에 솟을대문이 위치해 있다. 좌측으로는 묘역으로 출입하는 사주문이 있고, 우측으로는 후원으로 출입하는 협문이 있으며, 산자락이 연결되어 있는 뒤쪽 언덕에 간송 선생 및 부친의 묘역이 있다. 본채 내부로 들어서면 대청마루를 중심으로 좌측에 안방이, 우측에 작은방과 누마루가 있다. 창문 등 일부 세부적인 소재는 교체 작업이 이루어졌지만, 대들보 등 가옥의 뼈대를 이루는 부재들은 본래의 것을 유지하고 있어 의미가 있다.
전형필 가옥은 일제강점기 우리 유산을 보호하고 수집하는 민족 문화유산의 수호자였던 간송의 얼과 혼이 서려 있는 공간으로, 기념 전시 기획 및 기념관, 전통 교육관, 전통 다실 등 문화 공간으로도 시민들에게 개방될 계획이다.

선조들의 유산은 우리 민족의 혼
가산을 탕진하며 문화재를 지켜낸 간송 전형필

간송 전형필이 태어난 곳은 종로4가 112번지이다. 그는 휘문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와세다대학 법학과에 입학하여 음악, 회화, 연극 등 당대 일류 예술가들과 교류하며 문화적 안목을 키웠다. 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진로에 대해 고민하던 중 휘문고보 시절 미술 교사였던 고희동으로부터 “왜놈들 손으로 넘어가는 우리 서화와 전적을 지키는 선비가 되라”는 당부를 듣고, 오세창을 소개받는다.
서화가, 금석학자인 위창 오세창(1864~1953)은 3ㆍ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이었으며, 간송 선생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쳤던 인물이다. 그는 우리 문화를 보존하기 위해 역대 명인들의 글씨와 그림을 수집해 엮은 ‘근역서휘’(槿域書彙)와 ‘근역화휘’(槿域畵彙)를 보여 주었다. 그러면서 우리 선조들이 남긴 그림, 글씨, 책, 도자기는 우리 민족의 혼임을 역설하며 우리 문화를 보존하기 위해서는 문화재를 보는 안목을 키울 것을 권고한다. 그리고 간송 선생에게 산골물 ‘간(澗)’자와 선비의 지조를 상징하는 ‘송(松)’자를 합해 ‘간송(澗松)’이라는 호를 지어 주었다.
일제강점기는 수많은 문화재들이 해외로 밀반출되는 시절이었다. 위창 선생에게 사사받으며 서화 수집과 감식을 배운 간송 선생은 1932년 인사동의 고서점 한남서림(翰南書林)을 인수하면서 본격적으로 고서화와 문화재를 수집했다. 10만 석 가산을 모두 탕진한다는 비방을 들을 정도의 노력으로 훈민정음 원본 등 우리나라의 귀중한 문화재를 지켜 냈다. 1934년 성북동에 북단장(北壇莊)을 개설하여 본격적으로 서화 작품과 조선자기·고려청자 등 골동품과 문화재를 수집하였고, 1938년 한국 최초의 사립박물관인 보화각(葆華閣)을 건립했다. 그의 수장품은 대부분 국보 및 보물급의 문화재로 김정희·정선·신윤복·심사정·김홍도·장승업 등의 회화 작품과 서예 및 자기류·불상·석불·서적에 이르기까지 한국 미술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일제강점기 인재 양성의 절실함을 깨달은 간송 선생은 1940년대에는 보성고등보통학교를 인수하여 육영사업에 힘썼다. 해방 이후에는 고적 보존위원회 위원, 문화재 보존위원회의 위원이 되었고, 1960년 고고미술동인회를 결성하고 동인지 <고고미술(考古美術)> 발간에 참여했다.
간송 선생은 1962년 1월 26일 자신이 태어난 종로 자택에서 향년 57세로 급서했다. 1966년 보화각은 간송미술관으로 개칭되었으며, 북단장에는 한국민족미술연구소가 설립되었다.
우리 문화재의 해외 유출을 막고, 후대에 전하는 위업을 이루어 낸 간송 선생의 업적은 애국심과 문화재에 대한 남다른 애정, 문화 예술 분야의 심미안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전형필 가옥 관람 안내

주소 서울시 도봉구 시루봉로 149-18(방학동)
개관시간 화~일, 09:00~18:00
관람료 무료
문의전화 02-2091-2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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