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3-29 07:35 (금)
 실시간뉴스
경성의 복합문화공간 ‘부민관’
경성의 복합문화공간 ‘부민관’
  • 권지혜 기자
  • 승인 2016.02.29 11:4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서울, 시간을 품다 35
 

서울시청 맞은편에 있는 이색적인 한 흰색 건물이 주위의 초현대식 빌딩과 대조가 되어 지나가는 이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바로 해방 이후부터 지난 1975년까지 대한민국 국회의사당으로 사용되다 지금은 ‘서울시의회’로 쓰이고 있는 옛 부민관 건물이다.
일제 강점기 당시 동양극장, 단성사, 명치좌 등의 여러 극장은 영화 상영으로 인기가 높았던 경성부민들의 문화공간이었다. 하지만 많은 연극단체와 악극단을 위한 대규모 공연장으론 적합하지 않았다. 그러던 1935년, 태평로를 사이에 두고 지금의 서울시 청사인 경성부청 맞은편에 연건평 5,676㎡에 지하 1층, 지상 3층으로 이루어진 국내 최초의 다목적 공연장이 들어섰다.
현재 서울 시의회 건물로 사용되고 있는 부민관은 1,800명을 수용했던 대강당 외에도 중강당과 소강당, 조명과 냉난방 시설 등 새로운 기술을 도입해 지어진 당시로선 최신식의 대규모 공연장이었다. 그 밖에 담화실·집회실·특별실·식당·이발실 등 부대시설도 잘 갖추고 있어서 극단들의 창단공연과 유명 연극단체들의 공연을 비롯해 중요 강연회 등이 끊임없이 이루어졌다. 또한, 관립 극장으로 개방이 자유로웠던 부민관의 등장으로 창작극이 활성화되고 한국 연극이 한걸음 발전하는 토대가 되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말부터 동원예술과 정치집회 장소로 변질하기도 했는데, 1945년 7월 24일 친일파 박춘금의 아시아민족 분격 대회 당일 요란한 폭음과 함께 대회를 무산시킨 대한애국청년당의 ‘부민관 폭파 의거’는 패망 직전의 일제를 향한 광복 전 마지막 폭탄 의거로 기록되고 있다.
8·15광복 뒤 미군이 접수해 임시 사용하다 1949년 서울시 소유가 되었고, 1950년 4월 29일 국립극단이 창단되면서 국립극장으로 지정되었다.
58일간의 국립극장 시절을 거쳐 1950년 서울 수복 뒤 국회의사당으로 사용되다가 1975년 여의도 국회의사당이 준공됨에 따라 시민회관으로, 1976년 세종문화회관 건립과 동시에 그 별관으로 이용되었다.
제헌국회가 출범하고 초대 대통령을 선출한 곳이기도 하지만, 사사오입 개헌과 유신 헌법 등 한국의 의회민주주의가 질곡에 빠지는 사건들도 이곳에서 벌어졌다.
그 뒤, 지방자치제가 시행되면서 1991년 다시 서울시의회 의사당으로 돌아온 옛 부민관.
문화공간의 기능은 잃었지만, 근대 건축물 중 몇 안 되는 원형의 공간으로서, 부민관은 태평로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

글·사진 백남우(tbs TV 영상콘텐츠부장)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