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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국대 김문식 교수의 역사 특강
단국대 김문식 교수의 역사 특강
  • 송혜란 기자
  • 승인 2016.03.13 02: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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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보는 조선사
 

우리에게 역사란 무엇인가? 수많은 기록과 기억이다. 그것을 한데 모아 이야기로 엮으면 진정한 역사가 된다. 역사는 단순한 사실에 그치지 않고 끊임없이 재해석되며 현대사회에 강한 화두를 던지기도 한다. 역사에는 분명 위대한 힘이 있다. 이를 알아채기라도 한 듯 요즘 역사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뜨겁다. 단국대 김문식 교수의 역사 특강 현장에도 많은 이들이 모여들었다.

취재 송혜란 기자 | 사진 민음사 제공 | 자료사진 쇼박스, SBS 제공

김문식 교수는 단국대에서 사학을 가르치는 대한민국 역사학자이다. 그는 KBS 교양 프로그램 <역사저널>의 방송 내용을 엮은 책 <역사저널 그날 4> 출간을 맞아 민음사가 주관한 역사 특강에 초청되었다. 논현역 인근에 아담하게 자리한 카페 북 토크에 들어서자 한창 강의 준비에 분주한 그를 만날 수 있었다.
이번 강의를 위해 최근에서야 영화 <사도>를 봤다는 그는 강의 주제를 권력을 둘러싼 왕과 세자의 갈등으로 잡았다. 관객 수 600만 명의 기록을 남기며 대단원의 막을 내린 영화 <사도>에 이어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가 큰 인기를 끌고 있기 때문일 터. 주인공은 단연 태조와 태종, 영조와 사도세자이다. 알고 보면 더 재미있는 화제의 영화, 드라마 속 그날의 진짜 이야기가 펼쳐진다.

화제의 역사 속 그날을 만나다

본격적인 강의에 앞서 519년간 존속된 역대 조선 왕의 대략적인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태조 이성계가 고려를 멸망시키고 건국한 조선은 1910년 순종까지 총 27명의 왕이 승계했다.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에서 등장하는 이방원은 태조의 다섯째 아들로 훗날 3대 왕 태종에 오른다. 이후 세종과 문종, 세조가 7대 왕까지 이어 가는데…. 영화 <사도>에서 나오는 영조는 21대 왕으로, 사도는 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사도가 애달픈 죽음을 맞이하자 아들 정조가 바로 22대 왕을 물려받으며 조선사는 고종, 순종에까지 이어졌다.

권력의 묘한 속성이 낳은 비극

한국사를 배운 이라면 누구나 1398년, 1400년에 일어난 왕자의 난을 알고 있을 것이다. 태조와 태종, 아버지와 아들의 갈등이 형제간의 사투를 낳은 참극으로 기억된다. 부자(父子)나 형제 사이에서도 나눠 갖기 싫은 것이 권력이라고 했던가.
“권력이라는 게 참 묘한 속성이 있는 것 같아요. 누군가에게 권력을 집중해서 몰아줘야 끝이 나지 조금이라도 갈라지는 듯한 양상을 보이면 골육상쟁, 부자간에도 싸움이 나고 형제들끼리 피 흘리며 다투게 된단 말이죠. 요즘 기업의 2세대가 3세대로 넘어갈 때마다 보기 안 좋은 일들이 많이 일어나잖아요. 돈이 저렇게 많음에도 왜 싸우나 싶은데, 일종의 권력이라는 것이 그만큼 사람의 마음을 휘젓는 무엇인가가 있는 것 같아요.”
왕자의 난이 일어난 이유는 조선 건국 이후 태조가 세자를 책봉한 때로 거슬러 올라가 살펴볼 수 있다. 태조는 첫째 아내 신의왕후 사이에 방우와 방과, 방원 등 여섯 형제를, 계비 신덕왕후 사이에 방번과 방석을 두었다. 그중 태조는 두 번째 아내가 낳은 막내아들 방석을 세자에 책봉했다. 신의왕후의 소생 왕자들은 새어머니 출생 동생이 세자에 오르자 잔뜩 뿔이 났다. 특히 조선 건국에 큰 공을 세웠던 방원이 가만있을 리가 없었다.
“세자가 책봉되는 데에는 정도전이라는 유력한 배경이 있었어요. 방원을 개국공신에서 제외하기도 했던 정도전은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꾀하는 이상적인 왕도 정치를 표방했었죠. 이와는 달리 강력한 왕권에 바탕을 둔 왕조 국가를 지향했던 태종은 정도전과 엄청난 갈등을 겪었어요. 그렇게 6년을 지내다 기어코 사달이 난 겁니다.”
결국 방원은 같은 소생 왕자들과 함께 정도전은 물론 세자 방석과 그의 형 방번, 그 일파들을 모두 살해했다. 이 사건이 바로 1398년에 일어난 제1차 왕자의 난이다. 거사가 성공하자 방원의 형제들은 그를 세자로 책봉하려 했으나 동생들을 죽이고 바로 왕이 될 수 없었던 방원은 자신의 형 방과를 국왕으로 세웠다. 그가 바로 조선 2대 왕 정종이다. 이후 왕위에 대한 방간의 욕심이 조금씩 수면 위로 드러나자 또 다시 형제간의 싸움이 났는데, 이때의 사건을 제2차 왕자의 난이라고 부른다. 승리는 단연 수적으로 우세한 방원에게 돌아갔다.

완전히 틀어지고 만 아버지와 아들

이 사건을 계기로 방원은 마침내 조선의 3대 왕 태종이 되어 자신의 정치를 펼쳐 나갔다.
“그때 태조가 정말 못 볼 꼴 많이 봤었죠. 태종이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자기 아들까지 다 죽였는데 제정신일 수가 없지요. 곧 태조는 조정 생활에 회의를 품고 고향인 함흥으로 떠납니다.”
‘한 번 가면 아무런 소식이 없다’는 함흥차사도 바로 이때 나온 말이다. 태종이 아버지에게 사죄하기 위해 함흥으로 사신을 보내면 태조는 그에 대한 원망과 분이 풀리지 않아 사신을 죽이거나 잡아 가두면서 돌려보내지 않았다는 데서 유래했다. 당시 태조와 태종의 관계는 굉장히 험악했다고 한다.
“고려시대 때 회암사란 절이 있었습니다. 매우 큰 사찰이었죠. 태조가 그곳에 거처할 때도 태종이 만나러 오면 활을 싸 그를 죽이려고 했어요.”
제2차 왕자의 난이 벌어진 후 아버지와 아들이 완전히 어긋난 지경까지 간 것이다. 물론 그 둘이 처음부터 사이가 안 좋았던 것은 아니다.
“태조의 아들 중에 문과에 들어간 사람은 태종밖에 없었습니다. 실제로 고려 말에 이성계가 집에 손님이 오면 태종을 일부러 내보내요. ‘이 아이가 과거에 급제한 애다.’ 자랑을 늘어놓지요. 칼 쓰는 집안에 붓을 쓸 수 있는 사람이 나타났다면서요. 태종은 어릴 때부터 아버지의 큰 기대를 받고 자랐습니다. 조선을 건국할 때까지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고요. 태조가 태종의 힘이 너무 커지는 것을 견제하려다 결국 자기 아들이 다 죽고 마는 사태가 벌어지고 말았지만요.”
왕위에 올라 모든 권력을 장악했음에도 태종의 악행은 계속됐다. 자신의 처가 쪽은 물론 아들 세종의 처가까지 그 당시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냥 두는 법이 없었다. 그렇게 태종은 세종에게 무사히 왕위를 물려줄 수 있었다고 한다.
“지금까지 숱한 역사 드라마가 나왔지만, 세종 때 이야기를 다룬 이야기는 별로 없잖아요. 그 시대에 갈등이 별로 없어서 그래요. 애초에 갈등을 일으킬 만한 세력들을 태종이 다 정리했으니까요. 조선사 중에 손에 가장 많은 피를 묻힌 사람이 태종입니다.”

영조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사도세자

아버지와 아들의 갈등이 낳은 비극적인 사건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주인공이 또 있다. 바로 영조와 사도세자이다. 조선 21대 왕 영조와 사도세자는 아버지가 아들을 뒤주에 가둬 죽인 비극적인 스토리로 유명하다. 영조 역시 처음부터 사도세자를 미워했던 것은 아니다. 영조의 첫째 아들 효장세자가 어린 나이에 죽고 7년 만에 태어난 사도세자는 어릴 적 영조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어렵게 얻은 아들인 만큼 제대로 된 후계자로 키우기 위해 영조는 사도세자의 교육을 서둘렀다. 사도세자가 3살 때 왕세자로 서연(書筵) 교육을 시켰으며, 8세에 성균관에 보냈다. 10살이 되던 해에는 혜경궁 홍씨와 결혼을 시켰다.
“사도세자의 총명함은 어릴 때부터 빛을 발했습니다. 성균관 입학이나 결혼이야 당시에는 그 나이 때 다 이루어졌던 것이지만, 3살 때 서연이 시작됐다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에요. 이 무렵 세자는 무려 63개 글자를 알고 있었습니다. 글씨도 굉장히 잘 썼는데, 영화를 보면 사도세자가 큰 붓으로 쓴 ‘천지왕춘’ 네 글자를 받으려고 신하들이 앞다투어 하사를 요청하잖아요. 그게 다 기록으로 남아 있어요.”
무엇보다 사도세자의 활동에서 가장 뚜렷한 행적은 무예서의 편찬과 온양 행차로 손꼽힌다. 특히 1760년 7월의 온양 행차가 큰 주목을 받았다. 궁궐 안에서는 답답함을 느꼈던 사도세자는 이해 7월 18일에 창덕궁을 출발해 과천, 수원, 진위, 직산을 거쳐 온양에 이르렀다. 그동안 사도세자는 매우 늠름한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한중록>을 통해 혜경궁이 세자가 지나는 길마다 은혜와 위엄을 보여 주었다며 기술한 바 있다. 어린 나이에 행해진 대리청정에서 역시 사도세자는 일찍이 왕의 자질을 보였다.
“영화에서 자꾸 영조가 5살의 세자에게 양위를 하겠다고 하지요. 그것은 진심이 아니라, 신하들의 반응을 살피려는 정치적인 의도 때문이에요. 물론 신하들은 이마를 땅에 찧으며 극구 반대했지요. 대신 영조는 사도세자가 15세가 되던 해에 대리청정을 명령합니다.”

“아바마마, 소자의 죽을죄는 무엇입니까?”

 

이때부터였다. 영조와 사도세자의 사이가 어긋나기 시작했다. 물론 사도세자가 대리청정하며 내놓은 비답은 훌륭했다. 그러나 사도세자에 대한 기대가 컸던 영조는 그가 조그만 잘못을 해도 나무라는 일이 잦아졌다.
“영조는 무수리 출신이라는 콤플렉스를 지니고 있었을 뿐 아니라, 이복형 경종을 죽이고 왕의 자리를 빼앗았다는 주의의 의심 때문에 늘 부담을 떠안고 있었어요. 영조의 스트레스가 엄청났죠. 그래서 영조는 늘 자신이 왕의 역할을 잘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더불어 자신의 아들 또한 허물이 없어야 자기도 살 수 있다 보았죠. 예나 지금이나 자수성가한 아버지를 둔 자식은 굉장히 힘들게 살 수밖에 없습니다.”
영조와 사도세자 사이에서 중간자 역할을 했던 화평옹주의 죽음은 그들의 갈등을 더욱 악화시켰다. 거기에 영조가 왕이 되는 데 큰 지지를 해 주었던 숙종의 세 번째 왕비인 인원왕후마저 세상을 떠나자 영조의 시름은 더욱 깊어졌다. 슬픔에 빠진 부자간의 소통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고, 중재할 사람도 없는 상황에서 두 사람 사이의 틈은 계속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 사이 사도세자에게는 여러 병적인 증상이 도드라졌다.
“사도세자에게는 사람을 두려워하는 경패증, 천둥이나 벼락이 치면 공포에 질리는 뇌벽증, 옷차림에 대한 부친의 꾸중이 거듭되면서 옷 입기를 두려워하는 의대증이라는 병이 있었어요. 병의 증상이 나타나면 사도세자는 이성을 잃고 가까이에 있는 내시나 궁녀를 폭행해 죽인 경우도 더러 있었지요. 혜경궁에게 바둑판을 던져 왼쪽 눈을 상하게 하기도 했어요.”

뒤주에 갇힌 사도세자의 파국적 결말

사도세자가 왕위에 오르는 것을 견제한 정치적 반대파에서는 이를 가만히 두고 볼 리가 없었다. 재차 사도세자의 정신병을 걸고넘어졌다. 그러나 사도세자를 죽음에 이르게 한 결정적인 인물은 그의 생모 영빈이었다. 사도세자를 지키려다 그의 아들 정조까지 위험에 빠뜨릴까 두려웠던 그는 기어코 사도세자의 죽음을 부추기고 말았다.  
“결국 영조는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이게 되죠. 어떻게 부자간에 그럴 수 있느냐? 사도세자가 자결하려고 해도 신하들이 못하게 막잖아요. 영화에서도 잘 묘사되었죠. 영조가 직접 그에게 칼을 쓸 수도 없거니와, 신하들도 뒷날 정조가 왕위에 오르면 그 후폭풍을 염려해 나서지 않았어요. 스스로 죽게 하는 방법을 생각한 게 뒤주에 가두는 거였습니다.”
사도세자는 결국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영조로서는 최선의 방법이었다고 하나 엄청난 비극임은 틀림없다. 이후 영조는 그에게 애통하다는 의미에 사도세자의 시호를 내렸다.
“사도세자라는 이름은 그가 죽은 뒤 영조가 지어 준 겁니다. 정조는 세자의 묘를 원으로 격상시켰고요. 고종은 사도세자를 국왕으로 추숭하더니 이내 황제로 추숭했어요. 지금은 사도세자가 황제가 됐습니다.”
운명의 하루였던 그 날에 대한 이야기로 강의는 막을 내렸다. 위로는 국왕과 세자이지만 집안에서는 아버지와 아들이었던 특수한 관계, 권력에서 파생된 갈등의 비극적 결말은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많은 점을 시사한다. 앞으로도 이러한 뜻깊은 강의가 활개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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