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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공 신익희 선생의 생가를 가다
해공 신익희 선생의 생가를 가다
  • 김이연 기자
  • 승인 2016.03.29 14: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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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근현대사의 초상
 

일제강점기 항일운동부터 대한민국 건립, 민주정치의 선구까지, 신익희 선생은 대한민국 근현대사의 중심에 있었고, 그 삶은 투쟁기였다. 일생을 나라에 헌신한 숭고한 정신을 되새기며 기억하고자, 선생이 태어나신 곳으로 가 보았다.

진행 김이연 기자 |사진 양우영 기자

경기도 기념물 제134호, 해공 신익희 생가
20세기 초 경기 지역 중소 지주의 가옥 형태

신익희(申翼熙, 1894. 6. 9~1956. 5. 5)는 해방 전후 시기의 대표적인 정치가로 꼽힌다. 일제강점기 국내외에서 만세운동을 지휘했으며, 건국 이후에는 독재정치에 저항하는 민주주의 투쟁의 선두에 섰다. 신익희 선생은 경기도 광주 출생으로, 생가가 기념물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생가는 원래 지금 있는 자리에서 동남쪽으로 약 200m 떨어져 있었다고 한다. 고종 2년(1865)에 대홍수로 집이 파손되어 고종 4년경에 현 위치로 이전하였다. 그러나 기둥의 일부 부재를 제외하면 전체적으로 부재가 가늘고 치목 수법이 오래된 것이 아니라서, 20세기 초에 크게 고쳐 지은 것으로 짐작된다.

▲ 안방의 전경. 앞의 문쪽으로는 부엌이 있다.

가옥은 안채와 바깥채로 이루어져 있으며, 모두 목조 기와집으로 전통 한옥의 외관을 잘 간직하고 있다. 안채는 전체적으로 T자형 평면을 이루는데 중앙의 2칸 대청을 중심으로 오른쪽에 안방을 두고 왼쪽에 건넌방을 두었고, 안방 앞으로는 부엌을 두었다. 바깥채는 ㄱ자형 평면으로 가운데에 대문을 두고 왼쪽에 2칸 사랑방을 두었다. 이러한 배치 형태는 충청남도 북부와 경기도 지방에 분포되어 있는데, 바깥채를 대문간과 함께 시설하는 것이 보통이며, 사랑방은 외부를 향해 개방해서 바깥에서 출입이 용이하도록 지은 것이 특징이다. 이 집은 전통 한옥의 외관을 잘 간직하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전형적인 19세기 또는 20세기 초 경기 지역 중소 지주 계층의 가옥 형태를 취하고 있다.
1992년 12월 31일, 경기도 기념물 제134호로 지정되었다. 서울시 종로구 효자동에는 1954년 8월 국회의장직에서 물러나고 2년간 살았던 작은 한옥집도 남아 있다. 서울시 기념물 제23호로 지정되어 있다.

“못살겠다, 갈아 보자”
전설이 된 민주당 대통령 후보 시절 구호
 
신익희 선생은 장면, 조병옥, 곽상훈, 김도연 등과 ‘민주당’을 창당한 멤버다. 한국의 두 번째 큰 정당이자 전통 야당인 ‘더불어 민주당’의 모태다. 신익희 선생을 떠올리면, 그가 1956년 제3대 대통령 선거의 민주당 후보로 나왔을 때의 전설적인 구호를 잊을 수 없다. 우리나라에서 수많은 선거가 있었고 구호가 내세워졌지만, 당시 신익희 후보의 민주당에서 내걸었던 “못살겠다, 갈아 보자”는 지금까지도 널리 걸작으로 회자되고 있다. 이 구호는 당시 자유당 정권의 부패와 독재에 회의감을 느끼고 있던 국민들의 마음을 크게 흔들었다.
탑골공원 근처의 민주당 중앙당사 스피커는 이 구호를 계속해서 내보냈는데, 공감대를 형성한 시민들이 점차 모여들기 시작했고 급기야 서울 장안의 명물이 되어 인파를 끌게 되었다. 그러자 자유당은 건너편에 스피커를 설치해 “갈아 봤자 소용없다, 구관이 명관이다”라는 구호로 맞불 작전을 펼쳤다.
1956년 5월 3일 오후 2시, 민주당 대통령 후보 신익희 후보와 부통령 후보 장면의 서울 선거유세가 한강 백사장에서 열렸다. 당시 서울 인구가 160만이었고 유권자는 70만 4천이었는데, 거의 절반인 30만 이상이 이 연설장에 몰렸다. 정권 교체가 기정사실화되고 있었다. 그러나 한강 백사장 선거 유세 후 이틀째 새벽, 호남 지역 유세를 위해 열차에 오른 그는 뇌출혈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해가 서울역에 도착하자, 효자동 자택에 모인 군중들은 사인을 규명하라며 시위하다 10여 명이 경찰의 총탄에 희생되고 700여 명이 체포되었다.
그 후, 5월 15일 대통령 선거가 치러지고 이승만이 당선되었다. 부통령 선거에서는 장면이 압승을 거두었고, 신익희에게 던진 추모표가 185만 표였다. 당시 국민들의 설움을 반증하듯, “목이 멘 이별가를 불러야 옳은가, 돌아서서 피눈물을 흘려야 하는가”의 가사로 시작되는 ‘비 내리는 호남선’은 대히트를 기록했다. 이 노래를 만든 박춘석, 손인호는 당시 정권으로부터 신익희의 추모곡이라는 의혹을 받기도 했으나, 그의 타계 3개월 전에 만들어진 사실이 드러나면서 해명되었다. 그의 죽음은 한국 야당사의 시작이자 반독재 민주화 운동의 본격적인 시작이 되었다.

독립과 민주정치를 위해 살았던 삶,
온 국민의 비애 속에 영원히 잠들다

신익희 선생은 1894년 6월 9일 경기도 광주군 초월면 서하리에서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호는 해공(海公)이며, 중국 망명 중에는 왕해공(王海公) 혹은 왕방오(王邦午)를 사용하였다. 어릴 때부터 총명해 5세 때 한학을 공부하였고, 남달리 글씨를 잘 썼다. 1908년에는 한성외국어학교 영어과에 입학하였다. 당시 우리나라는 을사늑약으로 국권을 침탈당하고 식민지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선생은 일제로부터 국권을 되찾고 부국강병하는 방법은 서구의 문명을 수용하는 것임을 깨닫고 영어과를 선택하였다. 1912년에는 일본 와세다 대학 정치경제학부에 입학했다. ‘구적을 몰아내고 나라를 되찾기 위해서는 현대로 개화 진보한 일본에 가서 배워 그 놈을 이기고 일어서야 한다’는 극일(克日)의 심경이었다. 일본 유학 중에는 유학생 통일 조직 ‘학우회’를 조직하고, 기관지로 발행된 <학지광>의 주필·총무를 맡아 유학생은 물론 국내 청년들에게 민족정신과 독립사상을 심어 주었다. 그리고 1913년 동지들과 피를 나누어 마시며 독립운동에 목숨 걸 것을 다짐하였다.
1918년 윌슨 미국 대통령이 제1차 세계대전의 강화 원칙으로 민족자결주의를 천명하면서 선생은 독립운동을 계획하게 된다. 그래서 국외 독립운동 단체와 연락할 사명으로 띠고 상해로 가서 국내의 소식을 기다렸다. 그러다 3월 2일 귀국한 선생은 3·1운동을 목격하고 서울에서 대규모 만세 시위를 계획하고, 이틀 후 남대문역과 서울역의 만세 시위를 지휘했다. 그러나 일경의 주목을 받게 되면서 중국으로 망명할 수밖에 없었다. 상해에 도착한 선생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의 필요성을 공감하고 동참하였는데, 임시헌장 제정 기초위원을 지내고 ‘대한민국 임시헌장 선포문’, ‘대한민국 임시헌장’을 선포했다.
이후 임시정부의 내무차장 겸 내무총장 대리의 역할을 수행하였고, 임시정부의 각종 활동 및 소식을 전하는 연통제를 창안하는 데 일조했다. 또한 1920년 임시정부의 내무총장 대리, 외무총장 대리, 국무원, 비서장 등에 선임되어 활약했고, 이후 법무총장, 외교부장, 임시의정원 부의장 등 임시정부의 각종 주요직을 맡아 수행했다.
한편, 선생은 독립운동의 성공을 위해서는 중국 정부의 협조가 필요하다고 생각해 한중 합작의 군사 행동을 계획하기도 했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회가 닿을 때마다 중국 지도자들을 만나 협조를 얻기 위해 끊임없이 설득했다.
이후 독립운동을 주목표로 해외 각지에 흩어져있는 독립운동 단체를 모아 민족협동전선으로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을 결성하였고, 한국혁명당을 한국독립당과 결합해 신한독립당을 창당하였다. 당시 독립운동 단체는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와 조선민족전선동맹 두 체제로 존재했는데, 이 두 당의 통합 추진이 실패로 돌아가자 신익희 선생은 매우 통탄하였다.
광복 이후에는 김구 선생과 반탁운동을 추진하였고 국민대학교를 설립하여 교육에 이바지하는 한편, <자유신문>을 발행해 민족 자주성을 일깨우는 데 주력했다. 1956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그 해 5월 5일, 유세를 위해 오른 호남 행 열차에서 뇌출혈로 급서하였다.

<신익희 생가 관람안내>
주    소 경기도 광주시 초월읍 서하길 6-25
개관시간 항시 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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